헤겔 형이상학산책35-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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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산책35-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

1)

철학자마다 간판 단어가 있다. 칸트 하면 단연 ‘선험’이라는 말이 생각날 것이다. 하이데거 하면 ‘실존’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하면 ‘언어그림’이고, 데리다라면 ‘차연’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 하면, 어떤 개념이 생각날까? 아마도 대부분 ‘대자’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까?

‘대자[für sich] 존재’라면, 말 그대로 번역하자면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데,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때로는 주관성을 의미하며 때로는 고립성을 의미하다.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단어지만, 헤겔은 자주 사물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적용한다. 사물이 지닌 고유한 본성을 그는 대자 존재라고 말한다.

더구나 다른 용어가 뒤섞이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그 자체로 그리고 대자적으로[an und für sich]’라는 말이다. ‘대자’는 자주 ‘대타[für andres]’와 동전의 이면처럼 결합해 사용되며, 논리학에서는 ‘일종의 존재[für Eines Sein]’이라는 용어가 대자 존재와 짝을 이루고 있다.

헤겔의 대자 존재라는 개념은 논리학에서는 앞에서 다루었던 무한성 개념 다음에 나온다. 즉 1부 객관 논리학 1권 존재론 2장 현존의 2절 마지막 개념이 ‘무한성’이고 이어서 3절이 ‘대자 존재’다. 이 대자 존재 다음이 3장 양이니 이 대자 존재는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직접 만나는 것은 어디서나 질적인 것이다. 피타고라스가 질적인 음을 양적으로 규정한 이후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것을 발견하면서, 과학이 발전했다. 그런데 질에서 양적인 것은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헤겔은 대자 존재에서 양적인 것을 발견했는데, 대자 존재와 양적인 것은 어떤 연관을 지니는 것일까? 우리의 의문은 꼬리를 문다.

2)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은 헤겔의 논리학 초판과 재판 사이에 목차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아예 구조틀 자체가 달라 서로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지 알기 힘들다. 1판과 재판의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보면 간신히 그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대자 존재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진데, 초판과 재판의 목차를 비교해 보자.

초판

재판

A

대자 존재 자체

대자 존재 자체

1) 대자 존재 일반

a 현존과 대자 존재

2) 대자 존재의 계기

b 일자에 대한 존재

a 그 자체 존재

b 일자에 대한 존재

c 관념성

3) 일자로의 생성

c 일자

B

일자

일자와 다자

1) 일자와 공허

a 그 자체에서 일자

2) 다수의 일자

b 일자와 공허

3) 상호 반발

c 다자와 반발

C

견인

견인과 반발

1) 하나의 일자

a 일자의 배제

2) 견인과 반발의 균형

b 견인과 하나의 일자

3) 양으로의 이행

c 견인과 반발의 관계

이렇게 비교해 놓으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는데, 초판이 상당히 복잡하게 전개했던 것을 재판은 단순화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대체로 A 절은 대자 존재가 일자에 대한 존재를 거쳐 일자로 가는 과정이며 B 절은 일자와 일자 즉 다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반발의 관계이며 그 관계를 공허가 매개한다. C 절을 다자들 사이에 견인을 거쳐 양적인 단위(하나의 일자, 실재하는 일자)로 가는 과정이다. (위의 표 가운데 붉은 글자에 주목해 보기를 바란다)

현존 장 앞 부분은 초판보다 재판이 비교적 이해하기 쉬웠다. 3 절 대자 존재에 관해서는 재판보다는 오히려 초판이 이해하기 쉽다. 헤겔은 초판의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재판을 썼을 텐데, 오히려 이 부분은 재판이 더 난삽해진 느낌을 받는다.

3)

앞에서 헤겔의 논리학에서 범주가 발전하는 과정은 경험의 발전하는 과정을 매개로 한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의 발전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헤겔의 복잡한 개념들의 연관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유한성에서 무한성으로 이행하면서 실재하는 어떤 것이 지닌 다양한 속성이 문제됐다. 다시 소금의 예를 끌어들이자면, 소금의 흰색은 우연성이다. 소금의 짠맛이나 소독성은 소금의 필연적 속성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이 하나의 관계(dy/dx)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이 관계가 발전하면서 어떤 때는 짠맛으로서 소금이 어떤 때는 소독제로서 소금이 등장한다. 이때 속성의 관계 즉 미분적 힘이 무한성이며, 짠 소금이나 소독제 소금은 유한성이다.

유한성은 하나의 사물이며 그 내부에 이 사물을 생성하는 것이 곧 무한성이다. 이 무한성은 ‘부정의 부정’이거나 ‘자기 관계하는 부정’으로 규정됐다. 유한성은 이런 자기 부정을 통해 산출된 결과이며 직접성을 지닌 것이다.

이런 유한성과 무한성의 관계는 이제 하나의 소금과 다른 소금과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사실 짠맛의 소금도 소독제로서 소금도 동일한 미분적 힘의 산물이면서 서로 다른 소금이 된다. 여기서 하나의 소금과 다른 하나의 소금, 즉 동일한 것이 서로 다른 것으로 될 때 이 동일한 것들이 지닌 관계가 문제 된다. 이 관계가 이제 대자 존재에서 다루는 경험적 맥락이 된다.

4)

예를 들어 이런 소금과 소금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볼 때 A 절은 이런 관계 속에서 어떤 것이 지닌 내적인 이중성을 다룬다. B 절은 하나의 소금과 다른 하나의 소금 사이의 외면적인 관계 즉 서로 다른 동일한 것의 관계가 다루어진다. 논리학의 거의 모든 장, 절이 이렇게 어떤 범주에서 내적 대립이 대상의 외면적 관계로 전개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범주가 출현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런 방식이 논리학이 전개되는 틀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A절에 들어가 보자. A 절에서 다루어지는 것 즉 하나의 동일한 것 예를 들어 하나의 소금은 내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 이중성은 곧 ‘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다. (일종의 존재란 말이 어색한데, 그 말에 대한 설명은 이 글 뒷부분에 나온다.)

먼저 대자 존재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대자 존재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식은 노동과 같은 개념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어떤 것을 산출했을 때 그 속에 나 자신이 투입돼 있으니 그것은 곧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노동 산물에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존재한다. 칸트에 이르면 의식도 이런 노동을 하는 것으로 된다. 즉 의식은 범주를 통해 대상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의식의 대상은 자신의 범주가 투입된 것이니, 의식 자신이고 따라서 의식은 자기 자신을 마주 보고 있으니 대자 존재가 된다.

이런 산출의 관계에서 보면 무한성과 유한성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무한성은 유한적 사물을 산출한다. 이 사물은 곧 무한성에 의해 산출된 것이니 무한성이 곧 대자 존재다. 이 무한성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유한성과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무한성은 사실 유한자를 이루는 필연적 속성의 관계이며, 이 관계는 미분적 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듯이 하나의 유한자로부터 자기 내로 복귀하고 다시 다른 유한자를 산출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 과정은 부정의 부정으로 이어지므로, 헤겔은 이를 ‘자기 관계하는 부정[das sich auf sich selbst beziehendes Negative]’으로 규정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 운동은 유한자가 자기를 자기가 매개하는 운동이다. 바로 이런 무한성의 매개과정을 통해 무한성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 존재하게 되므로 이 무한성을 헤겔은 대자 존재로 규정한다. 무한성과 대자 존재는 개념상 서로 공속하는 개념이다.

앞에서 우리는 대자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노동과 의식을 예로 들었는데, 사실 노동과 의식은 대자 존재가 더 구체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대자 존재가 노동과 의식의 근본 전제가 된다.

5)

무한성의 매개를 통해 산출된 유한자는 곧 무한성의 타자는 무한성에 의해 산출된 것이니, 독립된 존재로서 무한성의 타자가 아니라, 다만 무한성에 의해 산출돼 자기 자신을 지양한 것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무한성의 한 계기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의식이 대상을 구성하고 노동이 사물을 가공하면서, 의식의 대상이 자립성을 잃고 관념이 되고 자연적 사물이 가공된 존재로 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도 대상이나 사물은 지양된 것으로서만 즉 계기로서만 존재한다.

거꾸로 무한성의 측면에서 보면, 이 무한성이 자기를 산출한 결과 타자가 지양되면서 자기 자신이 되니 처음에 자기 밖의 타자에 부딪혀서 자기를 상실했던 상태에서 다시 자기로 복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고 인식을 통해 낯선 대상을 이해하는 데서 얻어지는 기쁨은 바로 자연 앞에서 또 낯선 대상 앞에서 두려움을 떨던 자가 자연과 대상 앞에서 자기를 되찾는 안도의 기쁨이라 할 것이다.

“타자는 대자 존재 속에서 다만 지양된 것으로서만 그리고 그것의 계기로서만 존재한다. 대자 존재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그의 타자 존재를 넘어서면서 이런 부정을 통해 무한한 자기 내 복귀라는 데 있다.”(논리학 재판, GW21, 145쪽)

이런 점에서 ‘현존’과 ‘대자 존재’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현존은 어떤 규정성을 지닌다. 이 규정성은 타자에 대립하면서 얻은 부정성(대타 존재)이니, 현존은 항상 자신의 외부에 어떤 타자에 부딪힌다. 그러나 대자 존재에 이르면 자기 앞에 있는 낯선 타자는 없다. 자기 앞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니 타자는 자기 안에 있는 타자일 뿐이다.

여기서는 자기 완결적인 관계가 출현한다. 헤겔은 이를 ‘무한한 자기 관계’라 한다. 이제 규정성은 사라지고 규정성이 없는[bestimmungslos] 존재가 된다.

그렇다고 이런 무한한 자기 관계가 전혀 미분화된 상태의 어떤 것, 즉 동어반복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무한한 자기 관계는 이미 그 속에 이중성 자기의 타자와 자기라는 두 요소의 관계가 존재한다. 다만 이 타자가 지양된 것, 그 자신으로서 정립된 것이므로 동일성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타자 속에서 자기 관계한다’(GW11, 87쪽)라든가 ‘타자에 머무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에 머무른다’(GW 21, 145쪽)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물론 이 순수한 존재는 논리학의 출발점으로서 순수한 존재와는 다르다. 순수한 존재는 사실 무[無]였다. 그것은 끊임없이 명멸하는 가운데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제 대자 존재 속에 자기는 오직 자기와 마주 대해 있으니 자기를 파괴하는 타자에 대한 대립이 없으므로 자기 자신은 지속해서 존재하게 된다. (이런 대자적 관계가 후일 본질이나 실체 개념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으리라.)

6)

이렇게 대자 존재가 자기 완결성 속에서 순수한 존재가 되면, 직접성을 회복한다. 이런 직접적 존재를 헤겔은 ‘일종의 존재[für Eines sein]’라고 한다. 흥미로운 표현인데 사실 대자 존재와 관련해서 논리학에서만 나오는 개념이고 다른 데서는 나오지 않는 개념이다. 번역하기도 곤란한데, 흔히 ‘일자에 대한 존재’로 번역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어서 이 존재가 대해 있는 ‘일자[Eines]’라는 말은 곧이어 나오는 ‘일자[Eins]’와 혼동되기 쉽다.

다행히 헤겔이 이 말의 유래를 주석에서 밝히고 있다. 독일어에서 ‘이것은 어떤 종류의 사물인가?’라고 물을 때, 이렇게 말한다. ‘Was für ein Ding etwas sei?’ 헤겔은 이 표현에서 für가 의미하는 바를 고민하면서 이 ‘대해서[für]’는 ‘비추어서’라는 의미로 본다. “너는 꽃에 비해서 보면, 장미꽃이다.” “이 길은 강에 비추어 본다면 고난의 강이다”

인간은 항상 어떤 것을 이해할 때 이미 알고 있는 다른 것에 비추어서 이해한다. 이런 비유가 곧 인식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다. 그런데 이제 어떤 것을 그처럼 구체적인 다른 사물에 비추어서 이해하지 않고 일반적 존재자 또는 유적 본질에 비추어서 이해하게 되면, 비로소 나오는 표현이 ‘was für Eine’라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어떤 것은 그것이 속한 일반적 존재자 또는 유적 본질에 비추어서 이해되고 있다. 비유적 사고가 동일성의 사고로 이행하는 매개가 위에 나온 표현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사물인가?’ 이렇게 물었을 때 나오는 대답은 ‘그것은 그런 종류의 사물이다’라는 대답이다. 그것은 꽃의 일종이며, 나무의 일종이다. 이때 이런 일종의 존재를 헤겔은 철학적 용어로 만들어 ‘Sein für Eines’(재판) 또는 ‘Für Eines Sein’(초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일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겠다.

7)

그러면 ‘일종의 존재’란 범주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에서 무한성이 보기에 유한한 사물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니, 대자 존재라고 규정했다. 거꾸로 유한한 사물은 이런 대자 존재에 비추어서 어떤 것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유한한 사물은 이런 대자 존재의 일종이며, 곧 일종의 존재다.

“대자 존재의 두 번째 계기[일종의 존재]는 무한성과 통일성 속에 있는 유한자의 모습이다.”(논리학 초판, GW11, 88쪽)

대자 존재는 자기 부정을 통해 순수한 존재로 되돌아 왔으니 이 순수한 존재를 내적으로 보면 아무런 규정도 없는 무규정적 존재다. 그러나 이것이 직접성을 지니는 한, 즉 존재하는 것인 한에서는 어떤 구체적 규정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소금은 흰색의 소금도 있고 보라색의 소금도 있다.

그러나 소금을 대자 존재의 산물로 보는 한 모든 소금은 동일한 소금이다. 여기서 흰색이나 보라색과 같은 우연성은 일단 무시된다. 모든 소금은 동일한 관계 즉 미분적 힘이 산출한 것이며 그런 산출된 것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소금’이 된다.

사실 대자 존재와 일자에 대한 존재는 동전의 양면이다. 무한성의 측면에서 보면 대자 존재이며, 유한자의 측면에서 보면 일자에 대한 존재다. 무한성이 유한성과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고 유한자의 자기 매개이듯 대자 존재는 일자에 대한 존재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존재가 지닌 자기 매개다.

양자는 서로 매개하는 가운데 매개하는 운동의 측면이 대자 존재며, 이런 끊임없는 매개를 통해 고요하게 존재하는 것이 곧 일자에 대한 존재다. 이렇게 대자 존재와 일자에 대한 존재는 꼬리를 서로 물고 있는 뱀처럼 얽혀 있고 그 내분에서는 구별되면서도 통일된 관계 속에 있다. 이처럼 자기가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을 헤겔은 관념성이라고 한다.

“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는 관념성의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본질적인 계기다.”(논리학 재판, GW21,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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