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19- 시원에 관한 기존 이론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9- 시원에 관한 기존 이론 비판
1)
이상과 같이 일단 헤겔은 왜 논리학의 시원이 순수 존재인지를 밝혔다. 이야기를 좀 정리해 보자.
①논리학의 운동은 순수지를 바탕으로 전개한다.
②순수지는 정신현상학 운동의 결과이다. 정신현상학의 운동은 개별로부터 일반으로 나가는 운동이다.(근거로의 복귀)
③순수지의 이면은 곧 순수 존재이다.
④논리학의 시원은 순수 존재이다. 왜냐하면, 논리학의 운동은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이기 때문이다.(자기 정립)
이상 서술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③‘순수지의 이면이 순수 존재다’라는 것으로 보인다. 지식이라는 주관이 존재라는 객체로 전환하는 것이 무언가 신비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심층적인 근거로의 복귀가 곧 내면적 본질이 외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는 순수지가 곧 순수 존재임을 보여주는 확고한 논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헤겔은 다른 관점에서 이를 설명하는데, 이번에는 그의 설명을 들어 보자. 우선 예비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알다시피 순수지는 의식과 대상의 통일, 즉 대상을 자기로 인식하는 자기의식으로부터 출현한다. 이런 자기의식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자기의식 즉 절대정신이 곧 순수지다. 여기서 의식과 대상의 구별이 철저하게 사라졌으므로, 자기의식이라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순수한 통일 자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식은 객체와 합일하는 최정점에서 전면적으로 몰락하면서 통일성으로 들어가며 이 통일성이 다름 아닌 순수 존재이므로, 지식은 이런 통일성 안에서는 사라지고 말며, 이 통일성으로부터 전혀 구별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규정도 그런 통일성에 남아 있지 않다.”(논리학, S.59)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헤겔에서 순수 존재는 곧 판단 형식에서 주어와 술어의 통일로서 계사인 ‘이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순수 존재는 그런 계사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계사, 즉 주어와 술어가 무구별적인 통일 상태에 있는 것이다. 순수 존재 역시 통일 자체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원으로서 간주된 것 즉 존재라는 규정조차도 제거될 수 있으니, 다만 요구되어야 할 것은 시원이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다.”(논리학, S. 59-60)
2)
순수지와 순수 존재의 의미를 이처럼 이해한다면, 순수지가 순수지인 이유가 금방 드러난다. 양자는 모두 ‘무구별적 통일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무구별적 통일은 인식의 운동에서 본다면 최후로 등장하지만, 논리학의 운동에서 본다면 처음에 전제된 것이다. 동일한 무구별적 통일이 정신현상학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순수지(의식과 대상의 통일로서)라고 표현한 것이며, 논리학의 운동에서 본다면 순수 존재(주어와 술어의 통일로서)로 표현된 것이다.
무구별적 통일 자체는 사실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다. 그것은 지식도 아니며 존재도 아니다. 그러나 인식의 운동에서 본다면 그 무구별적 통일체는 순수지가 되며, 논리의 운동에서 본다면 그것은 순수 존재가 된다. 그래서 순수지가 나타나면 그 이면에 순수 존재가 나타나고, 순수 존재가 나타나면 그 이면에 순수지가 나타나게 된다. 헤겔은 이 무구별적 통일을 순수지로 본다면, 이에 대립해서 순수 존재가 나타나는데, 전자는 형식에 해당하고 후자는 내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 순수 존재는 순수지가 되돌아간 통일성이며, 달리 말하자면 순수지 자체가 여전히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 통일로부터 구별된 채 유지되어야 한다면, 순수 존재는 그런 순수지의 내용이기도 하다.”(논리학, S. 59)
3)
이어지는 부분에서 헤겔은 주로 다른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비판적으로 설명한다. 헤겔은 우선 근대에 들어와서 철학 또는 학문(그 가운데 논리학도 포함한다)이 “가설적이고 개연적인 진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검토한다. 즉 어떤 학문의 대상에 관한 흔히 통용되는 진리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이런 진리를 비판하면서 진리에 다가간다는 것인데, 흔히 플라톤적 대화록이 취하고 있는 방법이 그러하다.
헤겔은 대표적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철학자를 라인홀트로 들고 있는데, 라인홀트가 당대의 여러 철학자를 일종의 범신론으로 비판하면서 기독교의 인격신 개념을 옹호한 것을 잘 알려진 얘기다.
겉으로 보기에 변증법적인 전개를 옹호하는 헤겔로서는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주장이지만, 헤겔은 이런 주장이 갖는 맹점을 지적한다. 이런 주장은 학문이 일반적인 진리인 근거에 이르는 모색의 길이라는 점에서 주장된 것이다.
이런 주장은 진리에 이르는 인식의 과정에서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철학이나 논리학의 길이 근거를 시원으로 삼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런 길에서 본다면, 개연적이고 가설적인 진리는 시원인 근거로부터 도출된 결과일 뿐이다.
“사실 시원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그런 근원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런 것에 의해 사실상 산출된 것이다.”(논리학, S. 57)
4)
이어서 헤겔은 기하학적 작도와 같은 시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기하학에서는 증명을 위해 먼저 작도가 필요하다. 작도가 제대로 놓인다면 증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만일 작도가 잘못 놓인다면, 증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헤겔은 작도가 올바로 놓인다는 것은 증명이 실제로 성공한 다음에서야 확인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작도가 증명하는 과정에 외면적이고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하학적 증명은 선배가 해 놓은 작업을 기억할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그 스스로에게서는 독창적인 상상이 필요하다.
논리학은 외면적이고 우연적인 과정을 통해 나가지 않고 필연적이며 내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므로, 기하학에서 작도와 같은 것을 시원으로 삼을 수는 없다.
5)
학문에서 시원은 자주 ‘이미 널리 알려진 관념’을 말한다. 학문은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하여, 이 대상에 관해 누구나 동일한 관념을 가지며, 그런 관념은 이미 누구에게나 알려진 것이다. 학문은 그런 관념 속에서 “분석과 비교 또는 그 밖의 추론”을 통해 동일한 규정을 발견해 이것을 학문의 개념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경우도 앞에서 말한 개연적인 진리를 시원으로 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미 알려진 것은 다양한 규정의 구체적 관계를 갖는데, 그런 관계는 그 자체로 직접적인 것이 아니며, 추상적인 어떤 것이 구체화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매개된 것이며, 진정한 시원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비판의 핵심은 오히려 분석과 비교, 추론이라는 방법에 있다. 학문이 이런 알려진 관념에서 분석과 비교, 추론을 통해 일반적 개념을 얻으려 할 때, 그런 방법은 주관적인 자의에 따라서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그것을 통해 얻은 학문의 개념은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런 관계에 관한 필연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 필연적으로 생성된 것, 추상적인 것이 자기 자신을 통해서 정립된 것이 되어야 하니, 헤겔은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구체적인 것 즉 종합적으로 통일된 것 속에 함축된 관계가 필연적이어야 한다면 이것은 이 관계가 미리 발견되는 관계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계기가 자신의 통일로 되돌아가는 고유한 운동 가운데 산출된 관계인 경우에만 한정된다. 이런 운동은 분석적 경과 즉 사상 자체에 외적인 주관에 귀속되는 활동과 반대되는 운동이다.”(논리학, S. 61-62)
여기서 ‘자신의 통일로 되돌아간다’라는 말은 곧 구체적인 것이 지닌 모호한 통일이 다양한 규정이 명확한 관계를 맺는 통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런 명확한 관계는 필연적이고 내적인 생성을 통해 출현하는 것이다.
6)
시원에 관한 논의는 마침내 데카르트가 철학의 시원으로 삼은 에고 고키토의 문제로 나간다. 데카르트는 에고 고기토의 확실성이야 말로 철학의 시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명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에고 고기토는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사유하는 자아이다. 그것은 순수한 자아인데, 이런 자아에 이르기 위해서는 경험적 자아를 벗어나는 운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경험적 자아로부터 순수한 자아에 이르는 운동은 곧 정신현상학의 운동이니 감각적 확신에서 순수지에 이르는 운동과 다르지 않다.
헤겔은 철학적 시원으로서 에고 고기토는 이중적인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런 주장은 마치 경험적 자아가 그 자체로 자명하고 근원적인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순수한 자아에 대해 말한다면, 그런 주장은 사실 순수지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을 순수지라고 하지 않고 순수한 자아로 규정한다면, 헤겔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순수한 자아로 규정한다면, 여전히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수 본질을 나로 규정하는 것은 애먹이는 모호성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또한 좀 더 상세하게 고찰해 볼 때 여전히 주관적 나로 머무른다.”(논리학, S. 64)
그러므로 헤겔은 데카르트의 시원은 차라리 순수지라고 말해야 옳다고 한다. 순수지는 이미 자아와 대상의 통일이니, 자아의 한계 자체를 벗어난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시원이 될 수 있다.
7)
마지막으로 헤겔은 철학의 시원으로서 ‘영원한 것’, ‘신적인 것’, ‘절대자’를 거론하는 주장을 비판한다. 이런 것은 헤겔이 논리학의 시원으로 삼은 가장 추상적인 순수 존재보다 구체적 내용 즉 영원, 신, 절대라는 내용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적 시원보다는 더 확실하게 시원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그런 것이 사유 속에 들어오고 또 언표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이들은 지적 직관을 들고 있다. 그러나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말했듯이 지적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잠 속에서 주어지는 꿈처럼 몽롱한 것이며, 명확하고 체계화된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영원한 것, 신적인 것, 절대자로 규정하더라도 그 의미는 알 수 없는 단순한 지칭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이런 것들 속에 어떤 구체적 내용이 주어진다면, 이 구체적 내용은 그 자체가 시원적인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앞에서 말한 개연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 가운데서 출현한 매개된 것이니, 시원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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