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철학 서론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에세이 철학 서론
이 땅에서 흔히 하는 철학 활동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남의 철학을 소개하고 해설하고 해석하는 것들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양철학의 경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근대의 데카르트를 거쳐 영국의 경험론이나 독일의 관념론, 그리고 20세기 들어 후설이나 하이데거, 프랑스의 구조주의나 해체주의 계열들을 포함해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수도 없이 많다. 이들을 학습하기도 쉽지 않은데 어찌 독자적으로 해석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이런 철학들을 연구하면서 자기 이야기나 철학을 이야기하기는 더 어렵다. 마찬가지로 동양철학의 경우도 공맹과 노장사상, 전국시대의 법가로부터 시작해서 송나라의 주희를 비롯한 신유학자들을 연구하는 것도 벅찬데 어떻게 자기 철학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사정은 한국의 사상과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경험하고 있다. 원효와 의상의 불교 철학으로부터 고려의 의천과 지눌, 그리고 조선의 뛰어난 유학자인 퇴계와 율곡의 철학, 또 다산과 같은 실학자의 사상들을 평생 연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나의 철학과 사상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철학이야말로 가장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학문인데 이렇게 허구한 날 고래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의 철학만 한다면 내가 하는 철학을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는 오늘날 이 땅에서 철학을 하는 연구자들이 부닥치는 공통된 딜레마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철학을 오로지 이론으로 학습을 하려 하고, 철학 공부를 특정한 철학자들을 연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갖고 스스로 세운 문제들을 탐구하면서 철학을 하지 않다 보니 그들 거의 대부분 다른 철학자들이나 사상에 의존해서만 철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찍이 임마누엘 칸트도 자기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을 보면서 “요즘 학생들이 철학은 많이 알고 있지만 자기 스스로 철학을 하지는 못한다(nicht philosophieren)”고 지적한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철학을 연구하고 해석하기만 할 뿐 자기 스스로 철학적 사유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자문해 보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G.W.F 헤겔은 “철학은 사유 속에 포착한 그 시대”라고 갈파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저기서 말하는 사유와 시대에 과연 나의 사유가 있고, 우리의 시대가 있을까? 영국의 경험론은 17-8세기의 영국의 시대를 포착한 것이고, 독일 관념론은 18-9세기의 독일의 현실을 반성하면서 나온 철학이다.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는 이차 세계 대전 후 공고해진 자본주의 질서와 냉전, 그리고 6.8 혁명에 대한 반성에서 싹튼 철학이다. 이에 반해 식민지와 전쟁, 유신 독재와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로 이어지는 격동의 세기를 산 한국의 어떤 철학자들도 자신들의 시대와 현실을 제대로 반성한 적도 없고, 또 그것을 자신의 언어와 사유로 표현한 적도 없다. 그저 열심히 독일 철학과 프랑스 철학을 이야기하고, 영국 철학과 미국 철학을 이야기할 뿐이다. 서양철학을 예로 들었지만, 사정은 동양철학이나 한국 철학의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시대와 우리 삶을 반성하지 못하고 개념적으로 포착하지도 못하다 보니 과연 한국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공허한 물음만 던질 뿐이다. 에세이 철학은 이런 딜레마적 상황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에세이 철학 이란 무엇인가? 나는 아주 단순화시켜 이 물음에 대해 답변해 보고자 한다. 내가 말하는 에세이 철학 은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우리의 삶과 현실을 우리의 생각과 언어로 기술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이런 답변에 대해 누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철학 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물어보자. 과연 한국의 철학자들이 하는 일상적인 철학 속에 지금 여기의 우리 시대와 삶이 들어있는가? 한국의 철학자들이 하는 철학은 엄밀히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언어를 걸러서 나온 것인가? 왜 한국의 철학자들은 자기가 하는 철학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가? 과연 지금 시대 이 땅에 한국 철학이라 할만한 것이 있는가? 이런 원론적인 물음은 이제는 너무나 흔해서 진부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철학 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 문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에세이 철학의 정체성과 관련해 분명히 정리해 둘 부분이 있다. 하나는 수필도 에세이 철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무엇보다 나의 에세이 철학 은 기존의 에세이 철학과 다르고 철학적 에세이와도 다르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다. 과거 60-70년 대 안병욱, 김형석, 김태길이 장안의 지가를 높인 에세이 책들이 있었다. 이들은 맛깔스러운 문장으로 신변잡기를 대상으로 에세이를 썼다. 이 세 사람 모두 대학의 현직 철학 교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의 에세이를 철학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철학교수가 썼다 하더라도 신변잡기에 관한 에세이를 철학에 포함 시킨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음으로 철학적 에세이를 표방하는 글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에세이 글은 대부분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고민들, 이를테면 갈등과 고통 슬픔과 기쁨 등을 대상으로 정서적인 공감이나 역지사지 등의 에세이를 쓴 글이다. 이런 에세이는 철학보다는 심리학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정대현 선생과 나눈 이야기를 잠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일전에 정대현 선생님이 개인 카톡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수필 철학’과 ‘ 에세이 철학 ‘의 두 용어는 일상 언어철학의 정체성의 문맥에서 대립이나 경쟁을 발생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 에세이 철학 ‘ 은 ‘논문 철학’과도 경쟁적일 필요가 없이, 그 외연을 확장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호성과 개방성이 보다 일상 언어적이 아닐까요? ‘수필 철학’도 마찬가지로 ‘에세이 철학’의 외연을 확장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일상 언어의 글은 철학적이다]라는 지향을 보다 선명하게 함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적은 피천득 선생 같은 ‘반 철학론’입니다. 선생은 [수필은 난삽한 개념으로 무장할 필요가 없다]라는 단순한 명제로 해도 될 말을 구태여 ‘반 철학론’으로 깃발을 잘 못 드신 것입니다. 당신이 만난 철학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셨을지를 묻게 하는 대목입니다. 시중의 많은 두 필 반들이 (저의 누이들을 통해 들은 바로는) <피천득 수필론>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상황이 대세가 되기 전에, 더 악화되기 전에, 올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상 언어의 아름다움과 힘이 왜곡되지 않도록 선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1. 먼저 피천득 선생의 번 철학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선생님이 제시하는 “글은 철학이다”라는 명제의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글은 철학이다”라는 명제는 너무나 외연이 넓어 모호하다는 생각입니다. 주역의 계사 전도 글은 생각보다 정확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선생님 말씀처럼 “글은 반성적이고, 비판적이며, 대안적 해석을 제안한다”라고 해도 모든 글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이 글들에는 다양한 편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철학에도 그런 편차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철학의 외연을 확장해 놓으면 어떤 실익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모든 것을 ‘철학’의 테두리 안으로 포괄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폭력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각기 그 기능과 역할 존재 방식에 따라 다르게 지칭되듯, 언어로 표현하는 다양한 활동들도 대상 영역에 따라 달리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수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시와 소설, 시나리오 등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뭉텅 걸려서 ‘철학’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지요. 오히려 각기 고유한 존재 방식과 표현 방식에 따라 영역과 기능의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다르게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차이를 끌어들이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논리로 이용되는 것에는 문제가 있고, 또 모더니즘과의 차이를 절대화한다면 그것 자체가 모더니즘적 사고에 갇힐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뉴턴의 역학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요. 각자의 대상 영역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수필은 철학이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모든 철학은 수필이다.”라는 명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수필은 철학적”이고, 또 “어떤 철학은 수필이다”라는 할 수 있지만요.
2. 김형석 선생이나 김태길 선생 그리고 안병욱 선생 등의 수필 철학을 제가 말하는 ‘에세이 철학’과 구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에세이 철학’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에세이’와 ‘철학’을 붙여서 ‘에세이 철학’이라고 하고, 그것을 철학 에세이나 기존의 에세이 철학 혹은 수필 철학과 의도적으로 차별 짓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분들의 철학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유의 에세이 혹은 수필 철학의 역할이 지녔던 시대적 의의는 인정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 철학과 사무 조교를 할 때 김형석 선생의 에세이집을 읽고서 너무나 감동을 받아 철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하는 학생들을 여럿 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그분들이 정서적으로 독자들에게 공감과 영향을 준 바가 크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부류의 철학의 역할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합니다. 에세이나 수필의 일차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의미화’라고 생각합니다. 널리 암송되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저 그렇게 존재하던 것, 나와 무관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던 것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 존재의 의미가 살아나는 경험이지요. 수필은 이런 ‘의미화’에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하고, 그 점에서 앞서 말한 세분들의 수필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수필에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분들의 수필 철학은 그것을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론과 사상’의 차원에까지 끌어올리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보편성의 차원을 무시한다면 철학은 비트겐슈타인도 비판했던 ‘사적 언어’의 수준을 벗어나 기 힘들지 않을까요? 물론 선생님은 앞 서의 글에서 이론의 기반이 일상 언어이고 일상 언어가 이론을 규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지만, 그것이 반드시 일방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양자의 관계는 프로이트 식으로 표현하면 중층적이고, 차이와 다양성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 사실 제가 그분들의 수필 철학과 차별하고자 하는 보다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철학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을 ‘의미화'(signification)와 이론 외에도 ‘비판'(critic)에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은 피천득 선생의 반철학론을 비판하시면서 수필을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다 보니 사회와 역사를 담지 못한 채 기껏해야 ‘솔직함’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앞서 말한 세분들의 수필 철학에서도 사회와 역사가 들어오지 못하고, 기존 이론이나 사상에 대한 냉정한 비판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기껏해야 포괄적 수준에서 이야기는 해도 이론적 형태로 정형화되기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양철학의 역사는 칼만 들지 않았지’ 언어로 이루어진 ‘살부(殺父)의 역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런 치열한 논쟁을 통해 자신들만의 고유한 철학사를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철학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쓰는 ‘「에세이 철학」’의 기본 정신은 “우리 사회와 우리 삶, 그리고 시대에 관한 우리 생각을 우리 언어로 표현하자!”는 데 있습니다. 저는 결코 배타적인 쇼비니스트도 아니고, 막무가내식 회의주의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의 기준에서 본다면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철학적 활동은 자기 언어, 자기 생각, 자기 시대가 없이 남의 생각과 남의 언어, 남의 시대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철학들과 부단히 싸우고 있고, 우리 언어를 우리 삶 속에서 찾으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판’은 철학의 다른 어떤 속성보다 제가 중요하는 요소입니다.”
Ⅲ. 다음으로 「에세이 철학」의 뿌리 혹은 정신과 관련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비판’(critic)은 「에세이 철학」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비판’의 의미를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에서 찾지 않고 8세기 당나라 선(禪)의 정신에서 찾고 있다. 물론 「에세이 철학」은 우리가 사는 현재의 일상을 중요시하고 불교는 마음 심(心) 자를 중요시한다거나, 「에세이철학」은 철저히 문자에 기반한 철학을 전개하는 반면 선은 불립문자나 교외별전처럼 이 문자를 넘어서려 하기 때문에 양자의 친화성에 대해 쉽게 수긍하기 어려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낸다)는 금강경의 한 구절처럼 이 마음 심이 무심의 단계에 이르는 것은 일상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일상에서 밥 짓고 물깆는 일 자체를 불법의 연장으로 간주한다. 그만큼 일상은 선에서도 중요하다. 선이나 「에세이 철학」이나 똑같이 이 일상 바깥의 초월적인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당나라의 선불교는 잘 알다시피 스님들이 염불하는 법당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죽은 경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언어에서 불법을 찾는 중국 불교의 새로운 정신이다. 일자 무식인 6조 혜능은 홍인 선사의 금강경 강론을 듣고 홀연히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깨달음에는 번거로운 절차도 없고, 온갖 언어 수식도 필요 없다. 오로지 행주좌와 일심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홀연히 얻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부닥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자 하는 창조적 정신만이 중요하다. 임제 선사가 말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살 불사조(殺佛殺祖)의 정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가 칼을 든 사무라이의 정신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에세이 철학」’은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할 때 그 어떤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들, 동과 서, 옛날과 지금의 수많은 철학자들에 올라타거나 그들의 사상을 빌려 오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지금 이 순간'(hic et nunc)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일상에서 부닥치는 모든 대상들과 경험들을 철학적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비판하고 성찰하면서 철학적 통찰의 깊이를 드러내준다. 때문에 ‘「에세이 철학」’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선의 정신처럼 모든 권위와 우상의 파괴를 시도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한 4대 우상, 즉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언어의 우상’ 외에도 ‘권력과 국가의 우상’ 등 일체의 권위와 우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모든 가치를 부정한 니체의 ‘망치의 철학’을 구현하고자 할 뿐 실체화되고 화석화된 이론에 집착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저 너머의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추상개념들의 몰 주체성도 비판한다.
물론 문자에 기초한 「에세이 철학」과 참선과 문자 너머의 세계를 추구하는 선의 내용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선은 부처의 생전에 가섭의 염화시중의 미소가 시사하는 것처럼 참다운 진리는 언어를 넘어서 있고, 언어를 통해 전수되지 않는다는 전제가 강하다. 불립문자(不立文字)나 교외별전(敎外別傳) 같은 말은 언어를 넘어서려는 선의 정신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때문에 한국불교에서는 화두(話頭)를 참구(參究) 하는 간화선(看話禪)이 일찍부터 전통을 이루고 있다. 동양의 학문은 순수 이론(theoria)만 추구하는 서양의 학문과 달리 실천적인 자각과 깨달음을 중시하고 그것을 위한 방편으로 수행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화두 참구를 깨달음의 중요한 방편으로 생각하는 선도 동양의 일반적 전통과 궤를 같이 하는 셈이다. 알음알이로 얻는 이론은 원숭이가 흉내를 내는 것처럼 주변을 맴돌 뿐 그 핵심과 본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선의 주장이다. 지극한 깨달음은 이 언어와 이론을 넘어서 진정 마음 심(心)에서 전율을 느끼듯 대오각성한다는 의미다. 사실 서양철학을 하는 이들 대부분은 이처럼 강렬한 정신적 체험(體驗)을 쉽게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칸트가 말한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나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한 “나의 세계의 한계는 나의 언어의 한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를 초월한 세계는 무어라고 할 수 없는 X의 세계에 다름없다. 이 세계는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세계이고, 칸트의 이율배반(Antinomie) 이론에서 보듯, 그것을 언어적으로 기술하려 할 경우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인 모순율이 깨질 수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세계는 말할 수 없는 침묵의 대상이지 그것이 적극적으로 무엇인지 기술할 수가 없다. 노자(老子)가 『도덕경』 첫머리에서 적었듯, 도를 도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이런 의미의 세계나 도는 긍정적 기술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적 의미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화두를 참 구한다는 선은 언어가 끊어진 이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깨달음이란 면에서 다른 철학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불립문자를 추구하는 선은 언어의 끝, 문자의 종언을 주장하는 데 반해, ‘「에세이 철학」’은 모든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에세이 철학」’을 굳이 선으로 표현한다면 ‘문자 썬’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선불교의 정신을 21세기에 새롭게 각색하고 변형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문자는 어떤 경우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문자를 버린다면 문자가 부재하는 그 세계는 이 세계가 아니고 이 세계와 무관한 세계이다. 이 세계를 초월한 깨달음이 소수에게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은 이 세계의 다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깨달음의 궁극 목적(상구보리)은 이 세상과 나누기 위함이고(하화중생),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함(마르크스)이다. 이러한 정신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깨달은 이, 모든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밖으로 나가 빛을 본 계몽된 인간은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동굴 속으로 귀환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철학」’은 선의 문자화, 선의 일상화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진리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가장 현실적인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의 현실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의 의미에서 이성에 의해 걸러진 현실에 가깝다.
Ⅳ. 마지막으로 「에세이 철학」에는 진입 장벽이 없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에세이 철학」은 누구누구의 철학처럼 특화되거나 어떠어떠한 철학처럼 독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철학」은 누구나 쓸 수가 있다. 한 마디로 「에세이 철학」을 쓰는 데는 특별한 조건이나 요건이 없다는 것이다. 「에세이 철학」은 기본적으로 삶과 시대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의 이론이나 철학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언어로 쉽게 표현하는 데 있다. 어떤 전문화된 철학을 하는 데는 그에 따른 형식이나 조건이 있다. 예를 들어 칸트 전공자는 칸트 철학의 문제들을 정리하고 그에 따른 원전을 분석적으로 이해를 하고, 관련 연구나 논문들을 숙지해야 하고, 자신이 쓰는 논문이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단순히 기존의 해석들을 정리만 할 경우 그것은 학술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전문 칸트 연구자로서의 기본적인 요건이 필요하다. 이런 요건들을 갖춘 후에 비로소 그는 칸트에 관한 논문을 쓸 수가 있다. 하지만 「에세이 철학」의 경우는 이런 형태의 진입장벽이 없다. 때문에 「에세이 철학」은 누구나 쓸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언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면 된다. 하지만 누구든지라고 했을 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세이 철학」은 특정한 철학자의 사상이나 특정한 철학적 주제에 관한 전문적 지식은 요구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요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의 사상을 올라타지 않으려면 자기 사상의 깊이와 통찰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철학」은 글쓰기에서 요구되는 기본 요건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에세이 철학」을 쓰는 데는 다음의 몇 가지가 필요할 수 있다. 첫째는 글이 중언부언하지 않는 명확성(Clearity)이고, 둘째는 글이 피상적이지 않아야 하는 깊이(Depth)이고, 세 번째는 글이 남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생각과 언어라는 점에서 독창성(Originality)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글은 시류에 부화뇌동하지 않는 글쓴이의 독립성(Independence)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본적 요건들이 갖추어질 때 그 글을 다른 글과 분명하게 차별 지을 수 있으며, 읽는 이들의 생각을 일깨워 줄 수 있다. 이런 정도의 깊이 있고, 통찰력 있는 글을 누구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쓸 수 있으려면, 속된 말로 내공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결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에세이 철학」은 누구든지 쓸 수 있지만, 또한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세이 철학」은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에세이 철학」의 지향점은 지금 여기(hic et nunc)이고, 나의 생각과 나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에세이 철학」을 통해 자신의 삶과 세계를 반성하고, 자신의 생각을 일깨우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에세이 철학」의 이러한 정신은 누구든 공유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 철학」은 철학 운동이 자 문화운동이고 글쓰기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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