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 “저기…”[철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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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 “저기…”[철학자의 서재]

마투라나·바렐라의 <앎의 나무>

김광식(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 소리 없이 내 맘 말해 볼까 / 울어보지 못한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 때론 느껴 서러워지는데 / 비 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 주오 나즈막히 / 말없이 그대를 보며 소리 없이 걸었던 날처럼….

김광석이 부른 노래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이다. 이 노래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랑을 안고 비 맞은 채로 서성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여학생을 사랑했지만 ‘그저 그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가’ 없었던 남자, 광식이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어느덧 중간 시험 때가 다가왔다. 그때는 민주화 시위 때문에 수업을 빠지는 경우가 많아 시험 때 노트를 빌려 복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에게 노트를 빌리기로 결심을 했다. 드디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노트를 빌렸고 돌려주며 데이트를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저기…” 그녀는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고 나는 안절부절 못하다 결국 고맙다는 말만 하고 다시 돌아섰다. 또 다시 멀리서 바라보는 일이 이어졌고 기말 시험 때가 되었다. 다시 용기를 내서 노트를 빌렸고 고맙다며 초콜릿을 건넸다.

“저기…” 머뭇거리며 다음 말을 차마 못 잇던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저, 다음 학기에 고급 과정을 들을 건데, 같이 들을래요?” 나는 뜻밖의 제안에 고마워하며 돌아섰다. 고대하던 다음 학기가 시작되었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 수업은 고급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지만 우리들의 진도는 제자리에 맴돌기만 했다. 멀리서 바라보고 노트를 빌리고 돌려주고, 또 멀리서 바라보고 노트를 빌리고 돌려주고.

“저기…” 나는 끝내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와 사랑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그녀도 다음 학기에 수업을 같이 듣자는 제안을 할 수가 없었다. 최고급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로 남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몸이다

 

현실 속 광식이와 같은 사랑을 하는 남자가 또 있다. <광식이 동생 광태>(2005년)라는 영화 속 광식이다. 그 또한 7년 동안이나 “저기…”만 되뇔 뿐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현실 속 광식이든 영화 속 광식이든 광식이가 자신의 삶을, 아니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는 영화를 보면서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을 많이 했을 거다. 그녀와의 사랑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그 어리석은 생각만 딱 한 번 고쳐먹으면 그 사랑이 이루어졌을 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광식이 어느 날 아침 내 연애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그날부터 당장 365일 수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나눌 수 있을까? 아니 적어도 “고맙습니다. 저기 커피 한 잔 어때요?” 라고 차마 잇지 못한 뒷말을 이어 사랑을 이룰 수 있었을까?

어느 날 아침 단 한 번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광식이가 카사노바 광태가 될 수 없다. 삶이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단 한 번 고쳐먹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삶이나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생각이 아니라 사는 방식이, 달리 말하면 머리가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사는 것이 몸에 밴 몸의 성향이 우리의 삶이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흔히들 머리로 행동을 선택하여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람은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행동을 선택하여 세상을 살아간다. “커피 한 잔 어때요?”라고 뒷말을 이어야 한다고 머리로 생각은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몸이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 거다. 그렇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아직 몸에 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다고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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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쓴 <앎의 나무>(최호영 옮김, 갈무리 펴냄)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설명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앎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을 안다’고 할 때의 앎과 ‘~을 할 줄 안다’고 할 때의 앎이 있다.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을 안다’고 할 때의 앎이 앞의 것이고,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할 때의 앎이 뒤의 것이다. 앞의 것이 정보 지식이고 뒤의 것이 행동 지식이다. 하지만 정보 지식은 그것을 찾거나 만들거나 저장하거나 되찾을 줄 아는 행동 지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앎은 행동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 지식에 초점을 맞춘 행동 이론은, 행동이란 머릿속 정보 지식을 실현하거나 표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행동 지식에 초점을 맞춘 행동 이론은 행동을 몸에 밴 행동 지식이 실현되거나 표현되는 것이라고 본다. 정치 행동을 포함한 문화 행동도 마찬가지다. 정보 지식에 초점을 맞춘 문화 이론은 문화 행동을 머리 밖으로 표현된 정보 지식, 곧 텍스트라고 본다. 하지만 행동 지식에 초점을 맞춘 문화 이론은 문화 행동을 몸에 밴 행동 지식, 곧 행동 방식이 밖으로 드러난 것으로 본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정보 지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식 이론을 행동 지식으로 방향을 돌리고자 한다. 그들은 행동 지식으로 문자 그대로 지식과 행동의 일치, 즉 ‘지행합일’을 이루고자 한다. 옛말에, 제대로 알면 그대로 행한다고 했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단지 머릿속 정보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몸에 밴 행동 지식으로 알고 있다는 걸 뜻한다. 그것은 지혜라고도 하고, 덕이라고도 한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인간의 문화 행동이 정보 지식의 표현이 아니라 몸에 밴 행동 지식의 표현인지를 그 생물학적 뿌리로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그들은 신기한 두 가지 앎의 현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첫 번째 현상을 직접 체험해보자. “왼쪽 눈을 감은 채 (아래 그림)의 십자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 약 40센티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얼굴을 앞뒤로) 움직여보라. 그러면 꼭 작다고는 할 수 없는 검은 점이 그림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26쪽)

두 번째 현상도 몇 가지 장치만 준비하면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붉은색과 흰색의 두 광원을 가지고 (오른쪽 그림)과 같이 꾸며보자. (…) 전구에다 지름이 같은 마분지관을 씌우고 (…) 얇고 비치는 붉은색 종이를 필터로 쓰면 된다. 그런 다음 손 같은 것을 원뿔꼴의 빛 속에 넣고 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살펴보자. 그림의 세 개 상황 가운데 (위의 손 그림자와 중간의 오른쪽 손 그림자)는 청록색으로 나타난다.” (28쪽)

외부 세계에는 분명히 ‘있는’ 점을 우리는 어떻게 ‘없는’ 것으로 보며, 외부 세계에는 ‘없는’ 청록색을 우리는 어떻게 ‘있는’ 것으로 보는 걸까? 도대체 외부 세계에 대한 앎이란 무엇일까? 그들은 이 현상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우리의 특수한 인식 ‘행동’의 구조나 방식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우리의 앎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행동 (방식)이다. ‘그곳에 아무 것도 없다’는 앎은 곧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인식 행동 방식(행동 지식)의 산물이며, ‘그곳에 청록색이 있다’는 앎은 곧 청록색이 있는 것으로 ‘볼 줄 아는’ 인식 행동 방식(행동 지식)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앎이란 우리의 인식 행동 방식, 곧 행동 지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36쪽) 행동 지식이 곧 앎이며, 앎은 곧 행동 지식이란 말이다.

우리의 인식 행동 방식 또는 구조가 우리의 앎을, 또는 우리가 아는 세계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들의 앎의 이론을 구성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20세기의 칸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나아간다. 우리의 앎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앎 또한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생명체의 앎과 우리의 앎은 근본에서 같다. 생명체든 우리든 어떤 세상(환경) 속에서 자신의 행동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행동’할 줄 알면’ 그 세상’을 안다’고 말한다. 신경계나 뇌의 발달은 그 행동 방식의 신축성과 다양성을 늘렸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장한다. “앎이란 곧 효과 있는 행위다.”(39쪽)

머릿속 앎이 아니라 몸에 밴 앎으로 행동을 한다

 

“생물을 특징짓는 것은 말 그대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52쪽) 생명체의 효과적인 행동은 자신의 세상(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생산하는 일이다.

자신의 환경과 상호 작용하며 스스로를 생산하는 그 일은 몸에 밴 고유한 행동 방식이나 구조(행동 지식)에 따른다. 단세포 생명체조차도 몸에 밴 자신의 행동 구조에 따라 환경으로부터 나트륨이나 칼슘은 받아들이고 세슘이나 리튬은 받아들이지 않을 줄 안다.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도 몸에 밴 자신의 행동 방식에 따라 먹이가 다가오면 가짜 발로 감싸서 잡아먹을 줄 안다.

그들에 따르면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물뿐만 아니라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특정한 방식의 행동을 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오랜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몸에 배고 태어나서 살아오면서 몸에 밴 특정한 행동 방식(행동 지식) 때문이라고 한다.

아메바가 먹이를 감싸자는 생각을 해서 먹이를 잡아먹지 않듯이, 사람도 팔자 모양으로 걷자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걷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팔자 모양으로 걷지 말자고 생각을 해도, 그때만은 어찌어찌 되는 듯해도 똑바로 걷는 방식이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팔자 모양으로 돌아와 있다. 자전거 타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는 행동 방식이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타는 방법을 머리로 아무리 외운다고 탈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 아메바와 사람의 행동이 같을 수 있을까? 사람의 행동 가운데 걸음걸이나 자전거 타기와 같이 습관에 의해 형성된 무의식적인 단순한 행동만 그렇고 고도로 발달된 복잡한 문화적인 의식적 행동은 주인인 머리가 내린 명령을, 즉 머리가 복잡한 정보를 의식적으로 처리하여 만든 생각을 하인인 몸이 단순히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의 단순한 행동으로부터 다세포 생명체를 거쳐 인간의 복잡한 행동에 이르기까지 진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그 신축성과 다양성만 늘어났을 뿐, ‘머릿속 앎이 아니라 몸에 밴 앎에 의해 행동을 한다’는 생명체 행동의 기본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과정이 책의 전부다. 여기서는 그들의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한 가지 과학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지금 왼손을 들어보라. 왼손을 들겠다는 의식적인 생각을 몸이 단순히 수행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신이 왼손을 든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스스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왼손을 들겠다는 의식적인 생각은 몸이 스스로 내린 명령이 의식이라는 스크린에 비쳐진 것에 지나지 않다.

미국의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독일의 생리학자 한스 코른후버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실험 대상자에게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무 때나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했다. 실험 대상자들이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생각한 순간과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인 순간은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뇌파 측정기로 측정한 결과,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이기 0.8초 전에 이미 특정한 뇌파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냈다.

의식적인 뇌가 생각하기 전에 이미 무의식적인 뇌가, 즉 몸이 스스로 명령을 내린 것이다. 무의식적인 뇌가, 즉 몸이 스스로 내린 명령을 손가락이, 즉 다른 몸이 수행한 것이다. 의식적인 생각은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주인인 몸이 스스로 내린 명령을 의식이라는 스크린에 비쳐 알리는 앵무새 대변인의 역할을 할 뿐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화적인 의식적 행동의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는 무의식적인 몸이고, 그 시나리오를 생각이라는 영화로 만들어 보여주는 영화감독이 바로 의식적인 뇌인 거다.

그러므로 이야기 흐름을 바꾸려면, 스크린에 비쳐진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영화가 아니라 먼저 시나리오를 바꿔야 하는 거다. 아무리 착하게 살자고 의식적으로 생각을 고쳐먹어도 착하게 사는 방식이 몸에 배어, 다시 말해 덕이 쌓여 무의식적인 몸이 스스로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착하게 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애 근육을 단련시켜라

 

얼마 전에 투표가 있었다. 착하게 사는 방식이 몸에 배지 않은 사람은 투표를 안 하고 놀러 가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도 투표장에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투표장에 갔다고 하더라도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사람을 찍는 게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기에게만 이익이 되는 다른 사람을 찍었을 가능성이 많다. 생각 따로 행동 따로다.

투표 근육을 단련시키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을 한 번 고쳐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아예 생각이 몸에 배도록 몸을 만들자는 거다.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이 그렇게 강조했던,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인지 철학으로 정당화했던 ‘덕의 철학’을 역설하는 거다.

아직도 말하지 못하는 사랑을 안고 비 맞은 채로 서성이고 있는가? 아직도 사랑했지만 그저 그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 설 수가 없는가? 당신의 인생을, 아니 세상을 바꾸고 싶은가? 그렇다면 인생이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그러한 행동 방식이 몸에 배도록 몸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저런 생각들만 잔뜩 늘어놓은 연애 지침서만 읽고 있지 말고 “저기…커피 한 잔 어때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연애 근육을 단련시켜야 한다. 당신의 연애 근육은 튼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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