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를 부추기는 정치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시대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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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를 부추기는 정치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시대와 철학]

 

박영균(한철연 기조부장)

 

증오를 부추기는 세상

 

2012년 여름과 초가을, 한국 사회는 온통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대외적으로 한국 사회는 이명박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기점으로 하여 반일감정에 휩싸여 있으며 대내적으로는 ‘묻지마 살인’과 ‘성폭행’이라는 흉악범들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여기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사건에는 사람들에게 공분을 자아낼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분’이 ‘증오의 정치’를 생산할 때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보존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를 해치는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때, 그것에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분노가 특정 범죄자들, 특정 인물에 대한 ‘제거 또는 살해의 욕망’으로 전화할 때, 그것은 ‘위험’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 ‘위험’은 결코 ‘작은 위험’이 아니다. 그것은 흉악범죄가 지닌 위험보다 훨씬 위험한, 근본적인 위험이다. 이런 위험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된 박근혜의원은 “흉악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을 저지른 사람도 ‘죽을 수 있다’는 경고 차원에서 사형제는 필요하다”고 출입기자 오찬에서 밝혔을 뿐만 아니라 이어 새누리당 박인숙의원은 재범 가능성이 큰 상습적 성범죄자에 대해서 물리적 거세를 실시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그리하여 흉악범들에 대한 분노는 그들에 대한 제거의 욕망으로 이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합리적인 토론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 나주 초등학생 납치 성폭행 사건 피의자 고아무개 씨가 2일 고개를 떨군 채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그러나 이런 선의 절대성에 근거한 ‘제거의 욕망’은 본질적인 물음을 감추고 있다. 그것은 이런 흉악범들을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면 범죄는 사라질 수 있는가이다. 그들은 모든 죄의 원인을 몇몇 흉악범들에게 돌린다. 그들이 보기에 범죄는 범죄를 저지른 자 안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애초 인간이 아닌 ‘괴물들’만을 제거하면 사회는 마치 깨끗해질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암세포를 돌려내면 암은 사라지기도 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암세포를 돌려낸다고 암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암세포를 이겨낼 수 있는 우리의 신체, 사회적 환경이다. 사회가 흉악범들을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와 같은 암세포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으며 눈에 즉자적으로 주어진 감각적 즉물성에 빠져 ‘혐오’를 증오로 바꾸어 놓고 있다.

‘악’에 대한 정당한 ‘분노’는 정의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는 ‘혐오의 감정’을 근거한 ‘분노’가 되어 버릴 때, 그것은 오히려 더 거대한 악이 되어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복수’는 정의의 감정에서 나온다. 하지만 악을 제거하고자 했던 복수의 감정이 오히려 자신을 더 흉측한 괴물로 만들어버리면서 ‘복수의 악순환’을 낳는 것처럼 그것은 ‘악’을 먹고 자라는 더 근본적인 ‘악’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증오의 정치학과 노예의 도덕

 

정념의 철학자이기도 했던 스피노자는 이미 이와 같은 ‘악’의 악순환을 사유했었다. 그는 ‘원인에 대한 무지’가 부정적 정서에 근거한 악을 생산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문제는 이 악의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정념에 붙잡혀, 이 ‘악’의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으며 현재의 정념에 충실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형제’와 같은 더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며 그것을 처벌할 수 있는 더 강력한 권력을 요구한다.

최근 한 연예인(배우, 김규리)은 자신의 트위터에 “신체절단형 난 반댈세~ 유신이 부활하면 아무나 멍에 씌워 절단해버릴 수 있을 것 같음. 무서워~~”라는 글을 남겼다. 민주통합당도 박근혜의 사형제 옹호 발언에 대해서 유신정권 시절 ‘인혁당’으로 몰아 사형을 집행했던 과거의 역사에 들추어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이에 대해 ‘웬 뜬금없는 이야기냐’는 식으로 민주통합당을 몰아붙였다. 사실, 이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있다. 하나는 흉악범에 대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정치범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전쟁’, ‘범죄에 대한 전쟁’ 등, ‘?에 대한 전쟁’이라는 모토로 표현되는, 어떤 특정 악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 없는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식이었다. 박정희 구데타 정권은 ‘북의 위협과 이에 대한 전쟁’을, 전두환 구데타 정권은 ‘범죄의 위협과 이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면서 이에 대한 청산 작업을 벌였다. 유신독재시절에 정적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것도, 사회정화를 내세우며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던 것도 바로 이런 ‘악에 대한 전쟁’이었다.

만일 독재를 만들어낸 것이 대중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악의 제거’라는 ‘선(정의)에 대한 열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바디우가 정확히 지적하듯이 사이비 선에 대한 열정일 뿐이다. 그것은 실상, 선을 추구하는 정의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확히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나온 것일 뿐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를 보라. 그들이 선교하는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신을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옥’이라는 형벌의 참혹성에 대한 공포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폭력범죄자’들에 대한 공분 또한 정확히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물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포를 통해서 생산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보다 거대한, 근본적인 악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나를 지배하는 권력’에 나를 위탁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보았듯이 폭군은 이와 같은 슬픔의 정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슬픈 정념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들은 그것을 권력에 위탁시킴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노예로 전락시켜버린다. 따라서 김규리의 이야기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권력은 ‘악’을 먹고 자라난다. 그들은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강화하며 법을 신성화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군주제의 커다란 비밀과 그것의 근본적인 관심은 인간들을 속박할 때 이용하는 공포를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하면서 인간들을 속이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예속이 마치 자신들의 안녕이기라도 하듯이 예속을 위해서 투쟁한다.”

 

지배의 정치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분단 문제가 곧 이데올로기적 적대와 대립으로, 지역 간의 갈등과 분열로 비화하는 것 또한, 바로 이와 같은 ‘증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북’을 악으로 불러내며 그것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파시스트적 권력을 만들어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의 거대한 권력이 되어버린 기독교는 ‘예수 믿어. 안 그러면 지옥 가!’라는 공포를 통해서 교회 내에서의 유일권력을 만들어냈으며 그 권력을 만들어준 대중은 스스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부정적 정서’와 ‘정념’의 포로가 되어 주인을 위해 싸운다. 따라서 문제는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해방과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투쟁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투쟁은 단순히 부정의와 싸우는 것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아차’ 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그 스스로를 속이면서 빠져드는 ‘정념들’과의 투쟁 또한 요구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선’으로 포장하는 ‘정의’가 아니라 ‘정의’ 그 자체, ‘선’ 그 자체에 대한 성찰과 사유를 필요로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나(대중) 자신의 성찰이자 권력에 대해 ‘거리를 두고’ 삐딱하게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은 나의 슬픈 영혼을 부추겨 그들의 지배적인 힘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고해의 삶에서 얻는 상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지배의 정치학은 우리의 고통을 파먹고 살며 우리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며 그 잔혹한 삶의 고통이 유발하는 분노의 정념을 파먹고 자라난다. 따라서 지배의 정치학은 나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나 자신의 밖을 향해, 타자에 대한 공격과 원한으로부터 출발한다. 민주주의가 가진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때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는, 5년 전에 그랬듯이 한편으로, ‘민생이니 사회통합이니’하면서 노무현-김대중-전태일기념사업회를 방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의 강력한 권력을 환기시키는 이중의 행보가 지닌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을 배신하고 또 다시 대중들 스스로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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