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찾아 온 이별[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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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딸을 보내다
세월은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아도 잰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시 오기를 몇 번 되풀이하자 험하고 삭막하기만 하던 산이 사람들을 품어 주었다. 그들이 사는 산속 마을에도 햇살이 찾아와 주었고 바람도 놀러 와 주었다. 다람쥐들은 도토리를 나누어 주었고, 새들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폭풍 같은 시간들이 지나고 생활이 안정되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사람이 사는 곳에 문제가 없을 리 없겠지만, 할머니에게 다가온 문제는 깊이 묻어 두었던 상처를 꺼내는 것이기도 했다. 죽음의 길을 가는 엄마를 끝없는 울음소리로 돌려 세웠던 그 딸을 이제는 할머니 스스로 떠나보내야 했다.
살리기 위해 아들을 떠나보냈는데, 이제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딸을 보내야 했다. 딸이 자라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걱정은 시작되었다. 딸은 소위 말하는 ‘미감아’였다. 예쁘고 영리했지만 아이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자라면서 말이 없어지고 침울해지는 아이를 보면서 할머니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밤이 오면 마당을 나와 밤이 새도록 서성거렸다. 달빛에 마음이 아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까닭모를 설움이 올라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했다. 그때마다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지만, 그 희망을 모질게 끊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울산에 있는 저거 큰 아부지한테 보내기로 했다. 큰 엄마도 보내라 카대. 데리고 있으모 안 된다고…” 딸아이는 큰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말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알았던 게지. 지가 여기 있으모 어떤 소리를 듣는지.” 단순하게 거주지를 옮기고 학교를 옮긴다고 ‘미감아’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몇날 며칠을 서로 말없이 얼굴을 외면했다.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아이를 영원히 보내야 한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곧 4학년이 될 것이다.
2. 그림자로 남은 엄마의 자리
“4학년 올라가기 직전에 갔다.” 할머니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툭 내던지듯이 말했다. 아이는 울지도 않고 큰 아버지 손을 잡고 갔다. “호적도 파 줬다.” 딸은 그날 이후 법적으로는 할머니의 딸이 아니라 조카가 되었다. 아이를 보내고 난 후 할머니는 덧나는 상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센병이 찾아 온 이후로 할머니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았지만, 자식을 보내야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이제는 만나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승팔이에 대한 그리움과 먹고 살 수 있는데도 보내야 하는 딸에 대한 애잔함이 할머니를 깊은 절망의 늪으로 끌고 갔다.
분명히 나의 일인데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할머니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우짤기고. 내가 뭐를 할 수 있겄노. 그냥 숨만 쉬었제.” 그런 할머니를 할아버지는 위로하고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가까이 있으니 만날 수 있다고, 여기서 사는 것보다 훨씬 잘 되었다고, 그렇게 도닥거려 주었다.
할머니도 이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깊이 묻어 둔 그리움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립다 말이라도 하면 좀 나아지겠지만, 그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골목길을 뛰어 나올 때 등 뒤에 들리던 승팔이의 울음소리만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 울음소리를 떨쳐내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다. 닭모이를 주고 똥을 널어 말리고, 계란을 모았다. 돼지우리를 밤낮 없이 치우고 또 치웠다.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면 새파랗게 날이 선 서러움이 밀려와 눈물이 흘렀다. 그 옛날처럼 말도 못하고 우는 게 아니라 아이가 보고 싶어 운다고 말할 수 있어서 울고 또 울었다.
딸은 방학이 되면 엄마를 찾아와 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뜸해졌지만, 엄마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끈을 놓은 적은 없었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할 때, 이제는 딸이 울었다. 딸의 부모는 더 이상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었다. 딸이 엄마의 품을 떠나던 초등학교 4학년부터 지금까지 할머니는 그림자가 된 엄마였다.
딸이 떠난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작은 딸이었다. 우연히 마을에 들어온 작은 여자 아이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할머니는 작은 딸로 받아들였다. 작은 딸은 할머니 곁에서 성장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작은 사위와 함께 수시로 찾아와 할머니를 돌보아 드린다. 가슴으로 낳은 딸이기에 때로는 더 측은하고 애틋하다.
작은 딸과 달리 마음대로 올 수 없는 딸은 전화로 자주 안부를 묻는다. “거의 매일 전화가 온다. 엄마 밥은 묵었나, 몸은 어떻노. 맨날 묻는다.” 딸은 오더라도 머물지 못하고 오전에 왔다가 오후에 돌아가지만,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홀로 계신 할머니를 틈틈이 돌보고 있었다. “우리 큰 사위는 나 모른다. 알모 안 되제.” 손자와 손녀가 장성하자 딸은 자신의 어머니를 알렸다. 성인이 되어 비로소 알게 된 외할머니를 손자 손녀는 방학 때마다 찾아와 주었다. 그리고 옆에서 자고 가기도 한다.
3. 가을을 앞에 두고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크고 무거운 삶의 고통일지라도 시간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할머니 곁에서 손을 잡아주던 할아버지도 떠나고 없다. 나란히 붙어서 문으로 연결되는 작은 방 두 개와 부엌, 그리고 옆으로 연결해 만든 목욕탕이 할머니의 공간이다. 마당 끝에 서 있는 간이용 화장실을 볼 때마다 할머니의 외로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이 없는 집의 마당 끝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마당에 서면 많은 차들이 고속도로 위를 끝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그 어디쯤에서 할머니는 닭과 돼지를 길렀다. “저 고속도로가 난다고 팔아라 하는데, 팔아야지. 그때 다 보상을 잘 받았다.” 땅을 보상받고 국가에 내어준 뒤 처음으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이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지나 겨울로 다가가고 있었다. 무성한 풀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 쓴 시에 “풀에 벌레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을 토로했었다. 방문을 열어 놓으니 제법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지만, 할머니와 나는 이불 밑에 몸을 반쯤 숨기고 저 멀리에서 달리는 차를 바라보았다.
“차가 많제?” “네, 참 많이 다니네요. 밤에 안 시끄러우세요?” “왜~~~, 아이고 큰 차가 지나가모 멀리서도 시끄럽제. 차가 저리 마이 다닐 끼라고 누가 알았겄노.” “하늘이 맑제? 파랗나?” “네, 진짜 가을이네요. 나가보실래요?” 백내장으로 흐릿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할머니는 처음으로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 대해 말해 주었다.
소록도의 풍경/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threagi74가을 하늘은 푸르고 맑기만 하더라.
산천초목에는 붉은 물 든 단풍들이
장관이더라.
한 고개 내려와 보니
은행나무 잎에는
노리고도 노란 색깔 위에
황금빛을 나타내며,
흐르는 잎마다 주워서 책 속에 넣던
옛 추억이 떠오르네.
뒤돌아보니 금수화꽃은
우리 한반도 지도처럼
차분하게도 피어 있더라.
온 들에서는 코스모스가 피었고
길에도 피어 색색가지로
자기를 나타내며
뽐을 내고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교만해 보이더라.
뒷동산에 올라가서 보니
고목나무에서는 주먹만한 밤송이가
이 구석에서 쿵 저 구석에서 쿵
떨어지는 알밤이
우리 맘의 욕심을 나타내더라.
시골길을 내려오니
돌담 사이사이마다
감나무 나란히 서서 가을 햇빛에
무르익은 붉은 색을 나타내고
감홍시 주렁주렁 매달려
보는 이로 하여금
탐스럽기도 하고 먹음직하기도 하고
우리의 맘을 끌고 있네.
고적지 담장 위로 돌아오니
벌써 시간은 황혼이었고
해는 서산으로 기울이며
오동나무에서는 오동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서 뒹굴 때마다
내 마음이 슬퍼지고 외로워져
옛 추억이 떠오르네.
눈에 고인 눈물이 볼 위에
주렁주렁 흐르면
이것이 가을의 계절인가
으악새도 슬피 울고 있네.
-전문-
4. 고통의 강을 건너
기억 속의 가을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고향은 어디를 가도 꽃이 피어 있었고, 가을이 되면 밤송이가 툭툭 떨어지고 감이 붉게 익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곳이었다. 마쓰시타를 만나고 한센병이 찾아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곳도 고향이었다. 승팔이를 낳아 떠나보내고 돌아왔던 곳도, 어머니를 한스럽게 묻었던 곳도 고향이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그 많은 시간의 강을 건너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도 고향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 고향은 더 이상 가슴 아프고 참담하던 곳이 아니다. 시을 한 행 한 행 들려주는 할머니의 얼굴은 평화롭고 따뜻했다. 생각에 잠긴 채 엷은 미소를 띠고 천천히 들려주었다.
“니도 감꽃 갖고 목걸이 만든 적 있나?” “그럼요. 제가 그 목걸이를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하얗고 향기도 좋고, 혼자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녔죠.” “나도 그랬다. 바늘에 실 꿰갖고 꽃잎을 연결한다. 그렇제? 하고 나모 손끝에서 감꽃 향기가 안 없어진다. 니도 그렇더나?” 할머니와 나는 시공을 뛰어 넘어 어린 시절의 공통된 기억을 찾아냈다.
그것은 감꽃 목걸이다. 여름을 앞둔 어느 날, 할머니와 나는 커다란 감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감꽃을 줍거나, 장독대 위를 하얗게 덮고 있는 감꽃을 한 손 가득 쥐고 와서 그늘에 앉아 감꽃 목걸이를 만들었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느 사이엔가 할머니의 기억은 고통의 강을 건너 유년의 행복으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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