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하는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 (357a~36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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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하는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 (357a~367e)

이한빈

 

*진도표에는 ‘글라우콘의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 비판’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해당 부분에는 글라우콘의 정의관만이 나타나 있었을 뿐이지, 거기에 대한 비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판’이라는 글자를 뺐습니다. 또 엄밀히 말해서 이건 글라우콘 자신의 정의관은 아니고, (트라시마코스를 포함한)당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의관의 입장을 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한 것이기에, “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하는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이라고 제목을 썼습니다.

 

1.제2권의 논의 도입부 (357a, 2권 처음 ~ 358e)

: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의 중에서, 올바른 것이 올바르지 못한 것보다 모든 측면에서 낫다(좋다)는 것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올바른 것은, 어떤 점에 있어서 ‘좋다’는 것일까? 글라우콘은 거기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좋은 것’에 세 가지가 있다는 점을 도출한다. “올바름이 그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올바름이 그것 자체로도 좋다고 여긴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글라우콘은 가상으로 다수의 사람들의 입장에 서고, 소크라테스는 그와 반대로 올바름이 그 자체로 좋다는 입장을 취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1의 세부 내용―

 

글라우콘은 ‘좋은 것’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 묻는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좋은 것이 있음을 소크라테스가 동의한다.

첫째, “그 결과를 바라서가 아니라 오직 그 자체 때문에 반기며 갖고자 하는 그런 것)”이 있다. 여기에는 기쁨, 해롭지 않은 즐거움 등이 있다. 기쁨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로 인하여 생기지 않는다. (357b)

둘째, “그 자체 때문에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들 때문에도 좋아하는 그런 것”이 있다. 슬기로운 것이나 보는 것 또는 건강한 것 등이 있다. (357c)

셋째, “그것들 자체 때문이 아니라, 보수라던가 그 밖에 그것들에게서 생기는 결과(평판을 통한 명성 등) 때문”에 수용하려 하는 것이 있다. 이것들은 수고스럽긴 하지만 우리를 이롭게 한다. 그것 자체 때문이라면 기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신체 단련, 치료받음, 돈벌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357c)

소크라테스는 이 세 종류 중 두 번째 종류에 올바름이 속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트라시마코스를 포함하여)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고 글라우콘은 말한다. 그는 다수의 생각(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과는 달리 올바름은 그 자체로서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상으로 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에 선다. 그가 가상으로 취하는 입장에 반대하는, 소크라테스의 올바름이 그 자체로서 가치 있다고 옹호하는 주장을 듣고자 한다.

글라우콘은 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특히 트라시마코스)들의 주장을 크게 세 단계로 전개하기로 한다. 첫째, 올바름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 둘째,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서가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라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셋째, 사람들이 둘째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온당하다. (358e)

 

2.올바름의 기원에 대한 글라우콘의 말 (358e~362b)

: 1.에서 말했듯이 글라우콘은 우선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올바름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 올바르지 않는 일과 관해서 최상의 경우는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 것이며, 최악의 경우는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지 못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의 나쁨이 그런 일을 했을 때의 좋음보다 크기 때문에 법과 계약이 생기게 되었고, 그런 것을 따르는 것이 올바름이다. 올바름이란 단지 그러한 최선의 경우와 최악의 경우 사이에 있는 것이며,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름은 그것 자체로 좋아서가 아니라, 그만한 힘이 없기에 대접받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예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올바른 사람이라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면 올바르지 못한 자와 같이 행동할 것이다. (기게스의 반지, 투명해지는 반지의 예) 둘째, 올바르게 보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자와, 올바르지만 올바르게 보이지는 않는 자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하게 살겠는가? 분명 전자가 더 행복할 것이다. 특히 올바르지 못하지만 올바르게 보이는 자는, 부유하고, 강력해져서 친구들은 잘되게 해주고, 적들에게는 해롭게 할 수 있다. 또한 제물을 많이 바칠 수 있게 되어 인간뿐만 아니라 신들에게도 사랑받는다.

 

―2의 세부 내용―

 

(1) 글라우콘은 첫째로 올바름이 어떤 성질의 것이며 그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말한다.

본래는 올바르지 못한 것을 저지르는 것이 좋은 것이며, 그걸 당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것을 당함으로서 입는 나쁨이 그것을 행해서 얻는 좋음보다 월등히 크다.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 또 당해 보면서, 그런 일을 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 일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행할 수도, 당할 수도 없도록 계약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로 인해 법률과 계약을 제정하게 된다. 그렇게 제정된 법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이며 올바르다고 한다. 올바름이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 처벌받지 않는 최선의 경우와, 그러고도 보복할 수 없는 최악의 경우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358e~359c)

 

[2.(1)의 결론 주장] 올바른 것이 대접받는 까닭은 그것이 그 자체로 좋아서가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하고, 또 그러면서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 대한 근거1] 올바른 사람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상정해보면, 분명 탐욕으로 인해 올바르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할 것이다. (359c~359d)

[근거 1의 구체화] “기게스의 반지(투명해지는 반지)”를 생각해보자. 올바른 사람이 그 반지를 갖게 되면,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가졌을 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359d~360d)

[위에 대한 근거2] 가장 올바르지 않은 이와 가장 올바른 이를 대비해 보자. ‘가장’ 올바르지 못한 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올바른 자로 보인다. 그는 올바름에 있어 최상의 평판을 받는다. ‘가장’ 올바른 자는 올바르게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가장 올바른 사람이며, 그러기를 바란다. (만약 그가 올바르게 ‘보이기’까지 한다면, 그가 올바른 사람인 것이 올바르게 보이는 것으로 인한 결과 때문인지 아니면 올바름 그 자체로 인한 것인지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앞의 가장 올바르지 않은 이와는 반대로, 올바르지 못하다는 악명을 갖고 있으며, 최악의 평판을 갖는다. 이들 중 누가 더 행복하겠는가? (360e~361e)

이 사례에서의 가장 올바른 자는 온갖 나쁜 일을 당하게 된다. 그는 그런 일을 당한 후에, 실제로 올바르게 될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깨닫게 된다. (362a~362b)

반면 올바르지 못하지만 올바르게 보이는 자는 여러 이득을 얻는다. 첫째, 나라를 통치하고, 둘째, 가문과도 혼인하고, 혼인 시킬 수 있으며, 누구와도 거래 할 수 있다. 셋째, 올바르지 못한 일을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어서 모든 면에서 이득을 얻는다. 적을 압도하고 능가하며, 부유하게 된다. 그로 인해 친구들은 잘 되게 해주고, 적들은 해롭게 할 수 있다. 신들에게도 많은 제물을 바칠 수 있어 인간들뿐만 아니라 신들에게도 사랑을 받게 된다. (362b~362d)

 

3.글라우콘의 말에 대한 아데이만토스의 보충

: 올바르지 못함의 입장을 가상으로 취하여 한 글라우콘의 주장을 그의 형 아데이만토스가 보충한다. 그건 신이 올바른 자에게는 상을 주고, 올바르지 못한 자에게는 벌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올바르지 못하지만, 부유한 자들이 주술이나 마법의 힘, 혹은 제사를 통해 그들이 받아야 할 벌을 피해가며, 오히려 올바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올바르게 산다면 단지 신의 벌을 받지 않고 올바르지 못한 일을 통해 얻는 이익을 얻을 수 없지만, 올바르지 못하게 산다면 그런 행위를 통한 이득을 얻을 수 있고, 제사를 통해 신으로부터의 징벌을 피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올바름을 추구하기 보다는 올바르지 못함을 추구한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단지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만한 힘과 용기가 없어서 그럴 뿐이지, 그럴 능력만 된다면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것이다. 이는 올바름을 그것으로 인해 얻는 것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찬양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분명하다. 아데이만토스는 올바름을, 그것으로 얻게 되는 것과 무관하게 그것 자체로서 찬양할 것을 소크라테스에게 부탁한다.

 

―3의 세부 내용―

 

2의 글라우콘에 말에 대하여, 그의 형 아데이만토스가 (그가 보기에) 마땅히 언급되었어야 했을 것에 대해 보충한다. (362d~362e)

그는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무사이오스와 그 아들들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그것들의 공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올바른 자는 내세에 신들로부터 상을 받으며, 올바르지 못한 자들은 신들로부터 징벌을 받는다. (363b~364a)

하지만 그 외에도,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시인들이) 하는 언급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올바르지 못한 것이 올바른 것보다 득이 된다고 말한다. 올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력하고 가난하다면 업신여겨지며 얕보아진다. 게다가 신들도 올바른 이에게는 불행이 있게 하고, 올바르지 않은 이에게는 행운이 있게 한다. 부유한 사람은 탁발승이나 예언자들의 제사나 마법을 통해 신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보상할 수 있으며, 올바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64a~365a)

그렇다면, 이런 것을 알고, 어떤 식으로 살아야 인생을 훌륭하게 마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는 영리한 젊은이는 무엇을 택하겠는가? 그는 실제로는 올바르지 않지만, 올바른 듯이 ‘보이도록’ 살아야겠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어떻게 올바르지 않으면서도 남의 눈을 피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잖은가? 그러나 정치적 결사, 당파나 대중 연설, 법정 변론을 통해 남의 눈을 피할 수 있으며, 제물을 바쳐서 신들로부터의 벌을 피할 수 있기에 문제없다. (365a~366a)

올바른 사람은 신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올바르지 않은 일을 통해 얻는 이득은 얻을 수 없다. 반면 올바르지 못한 이는 그런 일을 통해 이득을 얻으며, 만일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제물을 바쳐서 신들의 징벌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올바르고자 하겠는가? 아무도 자발적으로 올바르게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올바르게 하려는 사람들은 단지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용기나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들도 만일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힘만 갖는다면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것이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올바르지 못함을 비난하거나 올바름을 찬양하는 데 있어, 그로 인해 얻는 것과 무관하게 그 자체의 가치를 근거로 찬양한 적은 없다.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방식으로, 즉 올바름을 그로인해 얻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찬양할 것을 부탁한다. (366a~36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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