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처럼 붉은 울음 [치유시학]
?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세상이 참말로 험하다
이사는 수 없이 다녔다. 아니 이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살다가 떠나가라면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을 만나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울
▲ 에비슨이 촬영한 나병 환자(1900년대 초). ⓒ동은의학박물관산의 집단촌은 초가집이었지만 방이 있었고, 비도 피할 수 있었다. 거친 식량이었지만, 관청에서 나오는 배급품도 있었기에 굶주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웃 동네 사람들의 원성에 못 견뎌 한센인들은 흩어져 다른 지방으로 옮겨졌다.
할머니는 여기저기 옮겨 다녔던 지명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순서는 정확하지 않은 듯했다. 같은 지명을 다시 말하고, 서로 다른 지역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이 옮겼다. 60년, 50년 전에 다니던 데는 가물가물한다. 험하대이. 세상이 참말로 험하다.”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서러움을 세상이 험하다는 말로 표현했다.
할머니는 울산 집단촌을 나와 부산으로 온 것은 기억하지만, 부산의 첫 지명은 기억하지 못했다. 입안에서 계속 맴도는 듯 말을 할듯할듯 하다가 결국 기억하지 못했다. 부산에 와서 처음 살게 된 곳은 그리 큰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센인들이 모여 산다는 말이 돌자 여기저기서 한두 명씩 때로는 가족이 들어와 함께 살면서 마을의 규모는 커져 갔다. 울산에서도 그러했지만, 마을이 커지고 한센인들이 늘어나면 주변 사람들의 핍박은 거세진다.
구걸도 힘들었고, 마치 한센병이 공기를 타고 전파되는 것처럼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비한센인들의 이기적인 행동은 한센인들의 삶을 더욱 더 힘들게 했다. 그들은 주거 공간이 다르고, 주거지가 많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도 같은 지명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비한센인들에게 한센인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를 넘어 없어야 할 존재들이었다.
“거기서 용호동으로 갔제. 그래도 거(용호동)가 괜찮았다. 좀 살았던 것 같네.” ‘좀 살았던 것 같네’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순간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사셨어요?” “아매 2~3년 살았제. 하모. 그때는 마이 살았던 거제.” 용호동에서는 양계를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밤낮없이 일만 했다. 바닷가 바람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한센인들의 삶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2. 세상이 그런 기라
2004년도에 우연히 용호동 한센인 집단촌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45도에 가까운 경사로에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산을 뒤에 두고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던 그 판잣집들은 철거 중이었다. 지금은 부산 용호동을 대표하는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기 위하여 한센인들의 집이 무너지고 있는 광경을 그날 나는 보았다.
창문 대신 비닐이 쳐져 있는 집들의 대부분이 반쯤 무너지고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오륙도가 보이는 그 곳 바닷가에서 노인 대여섯 명이 무표정하게 우리 일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산과 집단촌 사이에 나 있던 도로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미처 챙겨가지 못한 옷가지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방문들이 부서져 널브러져 있는 광경은 참으로 처참했다.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그때 용호동 바닷가에서 보았던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갈 곳이 없어 떠나지 못하고 있던 그 노인들은 전기도 수도도 끊어진 그 곳에서 바다만 보고 있었다. 노인들 곁에 남아 있는 것은 햇살뿐이었다. 할머니의 젊은 날이 그러했으리라.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을 벗어나고 싶었으리라. 바다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비켜서지 않고 바다를 보고 지은 집들에는 한센인들의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사람이 살 수 없던 척박한 환경이어서 한센인들은 집단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산 밑에 천막을 치기 시작했고, 한센인들이 늘어나면서 천막을 하나씩 지어 내려 간 것이 바닷가에까지 닿았을 게다. 세상이 바뀌어 그 곳이 천혜의 자연을 지닌 산책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은 오래 전에 강제로 쫓겨 와 살기 위해 구걸하고 한편으로는 닭을 키우고 비탈을 개간하여 천막을 판자로, 다시 판자의 일부가 스레트로 바뀌었지만,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았다. 그 덕분에 자연은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곳은 이제 부자들이 도시의 오염을 벗어나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적지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자연을 보존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한센인들은 그 곳을 떠나 다시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용호동은 왜 떠나셨어요?” “휴우, 거기는 살기가 괜찮았다. 바람이 마이 불고 추워도, 산나물 있제, 계란 팔제. 계란은 파는데 남는 기 너무 없는 기라. 그래 사람들 사이에 말이 많았제. 그기 그렇다. 처음에는 그렇다가 좀 있으모 꼭 말썽이 생기는 기라.” “처음부터 있었던 사람, 나중에 들어 온 사람, 일 안 하고 잘 묵는 사람, 세상이 그런 기라.”
3. 아픈 줄 모른께 그리 살았제
할머니는 최초의 정착인이 아니었다. 이미 한센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에 할머니가 들어갔으므로 내부의 갈등으로 떠나야 할 사람도 할머니와 함께 들어갔던 사람들이었다. 닭을 키워 계란을 팔았으나, 직접 시장에 가서 팔 수는 없었다. 자연히 외부에서 계란을 가지러 오는 사람이 필요했고, 마을 내부에서 그 중개인을 상대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오해와 의혹에 의한 갈등이 자주 발생했다.
공동체 내의 누군가가 좀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은 누군가가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을 불러왔다. 이러한 갈등 끝에 시시비비가 붙었고, 일의 잘잘못을 떠나 공동체는 분열되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용호동을 떠나야 하는 쪽이었다. 같은 한센인이지만 그 갈등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이 마을과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은 용호동에서 서로 반목하던 사람들끼리 나뉘어져 정착한 곳으로 현재도 실제 거리보다 심리적인 거리가 더 멀어 보였다. 할머니를 만나기 이전에 먼저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을 방문했었다. 그 곳에서는 개인적인 접촉이 불가능했다. 나와의 만남을 가져보겠다는 사람도 마을 대표의 한 마디에 연락처도 없이 뒤돌아섰고, 나는 마을 안으로 아예 들어서지 못했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부산의 또 다른 지명은 신암이었다. 신암이라는 지명은 기억하지만, 그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없었다. 단지 많이 힘들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신암에서 강제로 이주 당해 간 곳이 을숙도였다. 할머니는 을숙도에서의 생활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을숙도에서의 생활은 몸은 고단했지만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한센인들이 이주하기 전부터 섬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원주민들과 한센인들은 서로의 생활 영역을 존중하며 생업에 열중했기 때문에 마주 칠 일이 거의 없었다. 섬이었지만 누군가의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다.
한센인들은 어떤 일이든 했다. 원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집중한 반면, 한센인들은 섬에 지천으로 널린 갈대와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었다. 갈대와 싸리나무는 젊은 남자들도 맨 손으로 꺾어 다듬기 어려운 식물이다. 그럼에도 한센인들은 불편한 손으로 갈대와 싸리나무를 꺾어서 구부리고 다듬어 빗자루로 엮었다.
그 빗자루는 뭍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사 갔다. 함께 사는 것은 거부했지만, 한센인들이 만드는 빗자루는 다른 빗자루보다 견고하고 성능이 좋았기 때문이다. 빗자루도 한센인들이 뭍으로 직접 나가서 팔 수는 없었다. 작은 나룻배에 싣고 강 가운데로 가면 뭍에서 나룻배를 타고 온 사람에게 넘겼다. 그 길만이 당시 을숙도에 살고 있던 한센인들의 생계수단이었다.
“김선생, 말도 마라. 온 손은 상처투성이고 피도 마이 났다. 피 나는 줄도 모르고 했다. 한참 하다 보면 그것들(갈대와 싸리나무) 군데 군데 피가 묻어 있는 기라. 그래 보모 온 손에 피라. 아픈 줄 모른께 그리 했제. 아팠으면 그리 했겄나” 한센인들이 돈을 벌어 삶의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것이 빗자루를 만드는 것이기에 그들은 그 일에 최선을 다 했다.
4. 한센 환자들, 그가 그리 역사가 깊다
?
▲ 광주의 나환자촌. ⓒ동은의학박물관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그 어디에서도 정착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쓸쓸한 얼굴을 보며,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김정한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래톱 이야기>는 중학교 교사인 화자가 낙동강 하구 명지의 조마이섬에 사는 건우네 집을 가정방문하여 알게 된 조마이섬의 내력과 그 섬을 지키려다 감옥으로 가는 건우 할아버지인 갈밭새 영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마이섬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지배했고, 지금은 유력 인사가 사유지로 하려는 곳이다. 갈밭새 영감은 정부에 의해 이주해 온 한센인들을 몽둥이, 쇠스랑 등으로 쫓아내다가 팔을 다쳐 흉터도 지니고 있다. 오래 전부터 살았으나 아무도 자기 땅을 가지지 못한 몇 안 되는 조마이섬 사람들을 대신하여 갈밭새 영감이 유력 인사와 싸웠으나 결국은 감옥으로 가고, 건우는 학교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내가 들려주는 소설을 집중하며 듣던 할머니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무릎을 탁 치며 “그긴 갑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할머니는 <모래톱 이야기>의 무대인 조마이 마을은 처음 듣지만,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고 반색을 하며 오래된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자신의 이야기를 떠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건과 유사한 내용의 소설을 들은 할머니의 얼굴에는 강한 호기심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긴 갑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가. 요쯤(여기쯤)은 바다고 또 한 쪽은 땅인디, 한센 환자들이 거기 살려고 했제. 그런데 주민들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너거가 왜 오노 하고 막았다. 살라고 하는 한센 환자들하고 못 들어오게 하는 사람들 하고 크게 싸웠제.” 할머니가 사는 을숙도에서 벌어진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 사건은 한센인들 사이에 회자되었기에 할머니는 <모래톱 이야기>를 그 사건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듯 했다.
할머니가 회상하는 그 강변에서 한센인들과 주민들과의 투쟁은 처절했다. “환자들이 거서로 천막을 쳐놓고 살았던 모양이라. 천막을 쳐 놓고 집에 대창을 해가지고 싸우다가 안 되가 저거가(원주민이)…….그래가 술로 받아가지고……. (한센인들에게)술로 얼마나 먹여 놨던가, 한센 환자들이 술 먹고 그 마 잤삤어. 자는 여개(사이에) 그 사람들(원주민)이 와가지고 (천막에)불로 붙였어. (한센인들을)다 죽여 삘라고 불로 붙였는데 그서 튀나오는 사람 창 갖고 찔러 죽이고, 온 가족들하고 그 식구들하고 저쪽에 있고, 요쯤을 점령하면 (한센인)가족들도 욜로 올 수 있는 기라.”
할머니는 그 사건을 설명할 때, 두 팔을 벌려 한쪽팔로는 “요쯤은 바다고”, 다른 팔로는 “한쪽은 땅이고”라는 몸짓으로 그 강변의 지형이 길쭉했음을 온 몸으로 나타냈다. “그래 갖고 젊은 청년들 마이 죽었다. 그때 그래 많이 죽고 그래 갖고 요새 겉으면 한센 환자들 얼마나 많은 줄 아나 그냥 안 있다. 데모를 하든가 무슨 수를 내도 몇 만 명 되는데 그때만 해도 옛날이 되논께네……말도 못하고, 그리 되니까네 군수도 말로 못 하겠다 쿠고.”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어도단의 절벽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온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며 바라본 할머니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는 “한센 환자들 그가 그리 역사가 깊다.”하면서 긴 한숨을 쉬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많은 한센인들이 죽었고 다쳤지만, 어떤 보상도 없었다.
요산 김정한은 <모래톱 이야기>의 조마이섬이 가상의 공간이라고 말했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다와 인접한 실제 낙동강변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산은 곳곳을 직접 다니며 알게 된 사실들을 사회 비판적인 안목으로 소설화한 작가이다. 어쩌면 낙동강 주변을 탐색하다 한센인들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있었던 참혹한 사건을 듣고 <모래톱 이야기>을 집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모래톱 이야기>가 발표된 1960년대의 사회적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실제 사건을 그대로 소설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조마이섬에서의 한센인들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소설적 장치로 남긴 것이 아닐까 한다. 할머니는 그 강변의 정확한 지명을 묻는 나에게 “생각이 날락말락 한다. 하도 오래된 이야기고. 하기사 나도 쫓기는 건 매 한가진데”라며 기억을 애써 더듬었지만, 그 당시의 사건만 정확하게 되풀이 했다.
5. 해와 하늘빛이 서러워
젊은 한센인들이 살기 위하여 투쟁하다 목숨을 잃었지만, 그 사건은 그대로 시간 속으로 묻혀 갔다. 할머니는 끝내 그 곳이 낙동강 어디쯤인지 아니면 부근 다른 지역인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으나, 사건의 정황은 기억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던 사실이 많은 시간이 지나 다시 현실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
시인 서정주는 오래 전 항간에 떠도는 말들을 그대로 시에 옮겨 놓아 세간의 오해와 편견으로 인한 한센인들의 고통과 설움을 묘사했다. 비한센인들은 그들의 관념에 사로잡혀 한센인들을 배척했다. 두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알아야 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세인의 어리석음은 ‘오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구분지어 나누어 버린다. ‘나’아니면 ‘너’가 되는 것이다. ‘우리’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면서도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됨을 애써 모른 척 한다. ‘나’와 ‘너’ 사이에 절대로 넘어 설 수 없는 선을 그어 관용과 이해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나는 오만과 편견에 가득 찬 세상 속에서 병든 몸으로 시간을 헤쳐 나온 생명의 강인함을 마주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상념에 잠긴 옆모습에서 이름도 없이 살다 간 수 많은 한센인들의 슬픔을 만나고 있었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살고 싶다는 그들의 작은 소망을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달빛 아래에서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었던 그들이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소생하고 있었다.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