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거라투스트라, 새해 달력을 사러 시장에 가다.[자거라투스투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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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거라투스트라는 신성한 새해를 맞이하면서 기이하게도 옛날에 쑥스러웠던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였다. “너는 어째 그 흔한 선물하나 받아오지 못하느냐?” 어머니가 명절날이 되면 이렇게 늘 안스러워 하시기에 언젠가 명절을 앞두고 자거라투스트라가 꾀를 하나 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자거라투스트라는 주변의 친구들을 불러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았다. 다들 처지가 비슷한 지라 자거라투스트라의 제안에 흔쾌히 동조하였다. 다음날 각자 자기 돈으로 자기 집에서 제일 필요한 물건을 사서 선물로 포장하였다.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그 선물을 자기 집에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보냈다. 선물이 도착한 날 자거라투스트라는 놀란 어머니 앞에서 짐짓 “아, 이 친구가 뭘 이런 걸 다 보냈지”라고 중얼거리면서, “거 참 하는 일도 바쁠 텐데…” 하고 한마디 슬쩍 밀어 넣었던 것이다. 마치 그 사람이 정부나 학교에서 제법 높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가 대견해 하시는 모습과 만족스러워 하는 웃음을 보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쳐진 것을 기뻐했다.
남들은 흑룡이 솟는다고 웅성대는 새해가 되자 자거라투스트라에게 이런 쑥스러운 옛날 일이 떠 오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도대체 새해가 되었는데도 달력을 하나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새해가 되면 세상에 흔한 게 달력이 아니었던가? 무슨 회사나 어느 기관이다 해서, 약간이라도 떵떵거리는 직장이라면 새해가 되기 전에 달력 하나는 꼭 찍어서 돌리곤 했다. 자거라투스트라가 선물은 하나도 못 받아도 그래도 달력만큼은 이리 저리 많이 얻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지천으로 방안에 굴러다니는 달력을 발로 차면서, 어디서 보냈는지도 굳이 확인하지 않은 채 이런 달력들이 너무 귀찮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심지어 달력을 보내주었던 친지들이 약간 시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저가 아직 그런 떵떵거리는 직장에서 안 떨려 나고 잘 다닌다는 그 말이지? 그래 잘났다.” 이렇게 자거라투스트라는 속으로 악다구니를 쓰면서 보낸 사람의 정성을 애써 무시하곤 했다. 그만큼 발로 차였던 것이 달력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자거라투스트라는 새해가 되면 이렇게 받은 달력 가운데 몇 개를 골라, 방방이 새 달력을 걸어놓는 것이 마치 한 해를 새로 맞이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 여겼다. 이렇게 새 달력을 걸어놓으면 그때는 마치 방마다 지난 해 쌓였던 먼지들과 액운 그리고 업보들이 모두 다 사라지고 새방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 달력의 깨끗한 빛은 방마다 환하게 빛났다. 불교 용어에 ‘정구업진언’이라는 말이 있는데 업을 씻어내는 주문이라는 뜻이다. 달력이야 말로 그런 진언이 아니었을까? 때로 달력 속에 자거라투스트라가 좋아하는 그림이라도 찍혀 있으면 날자 부분을 잘라 버리고 그림 부분만 따로 스크랩해서 벽이나 책장에 걸어놓아 두기도 했다. 달력에 찍힌 그림들은 원본보다야 훨씬 못하겠지만 색상이나 정밀도에 있어서 그림책으로 인쇄된 것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았으니, 그런 그림이 실린 달력을 보면 탐내면서 이미 얻은 다른 달력과 바꾸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도대체 올해는 걸어놓을 달력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리고 어디서도 새해 달력을 보내 주지 않은 것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주소를 잘못 아는 것인가? 여전히 학교 쪽으로 달력을 보낸 것일까? 아니면 이제 자거라투스트라가 더 이상 별 볼일 없으니 그까짓 달력 하나라도 굳이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달력에 관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달력이 없으니 갑자기 온갖 망상들이 머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새해 벽두부터 마치 스핑크스 앞에 부딪힌 것처럼 ‘달력 실종 사건’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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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달력 없이 지내는가 아니면 달력을 시장에 가서 사기라도 해야 하는가 하는 양자 결단의 문제였다. 물론 또 하나의 선택지가 있기는 하다. 새해 달력을 누군가 보내오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아직도 달력을 얻을 수 있는 데 부탁을 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자거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아는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을 세어볼 필요도 없이 이런 선택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과거에 달력을 기꺼이 보내주었던 친지들이 거의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하고 말았다는 것은 새해가 지나도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까지 달력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 냉엄한 현실이 거꾸로 잘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제 새로운 세대들이 달력을 찍어 돌리는 직장을 얻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아직도 자거라투스트라 주변에는 달력을 찍는다는 그 떵떵거리는 직장을 지닌 젊은 세대들이 없었다. 더구나 달력을 찍는 직장은 사실 이제 한국에서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과거에는 달력을 찍어 돌리곤 했던 직장들도 올해는 경기가 경기인 만큼 쓰임새를 줄이니 아마도 달력을 찍어 돌리는 것이 제일 먼저 줄여야 할 일인 모양이다.
달력을 걸어놓은 것이 자기 직장의 광고로서 효과가 많을 텐데, 그래 아낄게 따로 있지 달력을 안 찍다니. 아무리 경기가 좋지 않아도 달력만큼은 국민의 수대로 찍어서 여기 저기 보시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건 단순히 광고 때문만은 아니지 않는가? 그건 한국에서 잘나간다는 직장의 사회적 의무가 아닐까? 그럼 가난한 국민이 새해의 달력까지 시장에서 사야한다는 말이냐? 자거라투스트라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아가 났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명박 정부가 고환율 정책을 취하면서 죽어나간 것은 서민이요, 온갖 혜택을 다 본 것은 소위 대기업 아닌가? 그런데도 그래 달력하나 못 찍겠다는 말이지!
속으로 부아는 나지만 어쩔 수 없이 자거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달력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포기하고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달력을 돈 주고 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심리적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거라투스트라에게 또 하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한때 김치를 사기 위해서 시장 바닥을 돌았던 기억이다. 지금처럼 마트가 발달하기 전이다. 그때는 시장에 가면 김치를 쌓아놓고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들로부터 김치를 구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남자가 김치를 사러 간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하는 수 없어서 시장에 가서 김치 파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때면 번번이 다른 손님(대개 젊은 여성이거나 젊은 주부들이다)들이 김치 아주머니를 둘러싸고 김치를 사려는 것을 발견하고, 자거라투스트라는 발걸음을 돌려 시장을 한 바퀴 다시 돌았다. 그리고 멀찌기 곁눈으로 김치 아주머니에게서 손님이 없는 것을 보고 또 다가가면 어느새 또 어떤 손님이 나타나서 자거라투스트라의 발걸음을 돌리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김치 하나를 사기 위해 그렇게 몇 번이나 시장을 돌았던 씁쓸한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일 자거라투스트라가 시장에(아직은 달력 파는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가서 달력을 사기 위해 이리 저리 쌓인 달력을 뒤적거리면 누군가가 분명 자거라투스트라를 보지 않을까? 그러면 그 중 어떤 사람은 “저 놈은 틀림없이 그런 달력을 찾는 중일 꺼야. 왜 있잖아? 그런 거 말이야. 소주 회사나 내의 회사 같은 데서 나오는 달력 말이야. 틀림없어, 생긴 거를 보니…”라고 생각할 것이 아닐까? 또 다른 사람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거다. “아이구, 저런, 오죽하면 달력을 사러 나왔을까? 그래 사돈의 팔촌, 초등 중증 고등 대학 동창 중에 한국에서 대기업이나 주요 기관에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지? 그런 사람 하나만 있어도 달력 사러 나오는 일은 없을 거다. 입고 있는 꼬라지 보니 집안이 안돼 보이기는 하네.” 뭐 이렇게 사람들이 자거라투스트라를 비웃을 것을 생각하니 굳이 비싼 돈(아직 얼마인지 정말 모른다)을 들여서 달력을 사러 가야할지 자거라투스트라로서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달력 없이 지내면 어떨까? 대체 달력을 방방이 걸어 놓는 게 무슨 악취미인가? 무슨 그림을 걸어놓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입춘방문도 아니고, 무슨 부적도 아닌데 그걸 왜 방방이 걸어놓는가 말이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시계도 안 차고 다니더라. 혹 결혼한 사람이 ‘이 사람은 결혼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결코 넘보지 마시오’를 표시하기 위해 남자는 시계를 차고 여자는 반지를 차고 다니기는 하지만, 요새 시계가 어디에 쓰일 데가 어디 있을까? 핸드폰에 시계가 너무나도 편리하고 정확하지 않느냐. 마찬가지이다. 핸드폰에 달력이 있고 다이어리도 일정표도 있으니, 굳이 방안에 걸린 달력을 쳐다볼 이유가 없지 않을까?
솔직히 자거라투스트라도 지난 일 년 동안 달력을 쳐다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유독 달력을 볼 때는 일 년에 몇 번 되는 제삿날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새해 달력을 걸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달력에 제삿날을 표시하는 것이다. 제삿날이 모두 음력으로 되어 있어 표시해 놓지 않으면 금방 까먹고 지나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제삿날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제삿날을 평소에는 결코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달력에 빨간 줄로 여러 번 동그라미를 쳐놓기만 하면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여튼 그런 일이 없다며 정말 달력 쳐다 볼 일은 없으니, 제삿날도 핸드폰에 입력시켜 놓고 올해부터는 달력 없이 한 해를 지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렇게 자거라투스트라는 곰곰이 달력이 없는 삶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 시계를 찾고 다니라고 강요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내게 노동시간을 빼앗기 위해 자본가가 강요하는 것이다. 시계를 찬다는 것은 그러므로 노동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 때는 시계를 찬다는 것이 성공의 징표이기도 했다.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달력을 걸어 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회이다. 이 사회는 수많은 기념일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그 기념일이 사회적 시간을 조직하는 매듭 점들이다. 삼일절과 육이오, 개천절과 유엔 데이, 그리고 크리스마스 등. 그러니 달력이 없다면 우리는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된다. 나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자연 그대로의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달력을 이제 우리의 공간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필요가 있다.
3.
이렇게 한참이나 생각하던 자거라투스트라는 결국 달력을 사러 나가기로 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오직 달력을 거는 것이 지금까지 한 해를 맞이하는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무슨 의식처럼 해돋이를 보러 간다. 자거라투스트라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새해 첫날 부산 해운대 앞바다로 떠오르는 해를 보러 갔던 것이 기억났다. 지금까지 구름에 가려 구름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기는 했지만 정말 바다에서 황금빛 꼬리를 끌면서 떠오르는 해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번 그렇게 의식처럼 해를 보러 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달력을 거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나의 의식을 지킨다는 것은 아마도 인간만의 일일 것이다. 인간만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풍습을 갖듯이 인간만이 그 자체로서는 의미 없는 자연적인 시간에 일 년을 만들고 다시 달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달력 만드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소멸해가는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달력은 어디서 사는 것인가? 적어도 마트에 달력이 없다는 것은 자거라투스트라도 알고 있다. 매주 한 두 번은 마트에 들리면서 어디에 어느 물품이 있다는 것을 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달력은 문방구점에서 파는 것일까? 그것도 신년카드처럼 책방에서 파는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달력을 파는 가게가 따로 있지 않을까? 언젠가 명동 거리에 벽에 펼쳐진 좌판대에서 달력을 본 듯도 하다. 도대체 달력은 범주적으로 어디에 분류되는가? 언젠가 바늘을 구하기 위해서 고민했던 분류의 문제가 희망찬 흑룡의 해, 새해 벽두에 자거라투스트라의 두통을 발생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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