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살고 있다. [맹자와의 대화 2]
전호근 / 김시천 대담
지금의 승자독식사회가 ‘전국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김시천: 세 번째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졌네요. 가만히 들어보면 국내에서 맹자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 듯합니다. 오히려 최근 서구학계에서 맹자와 순자의 ‘심성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 현실에서 맹자가 그다지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정치적 민주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요즘에는 경제 민주화와 복지에 관한 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와 관련하여 전통 사회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맹자의 사상이 우리 사회에서 별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전호근: 지금 우리 시대에 각광받는 책이 자기계발서나 경영서, <손자병법> 경영서 같은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손자병법>은 간단하게 말하면 바로 “강자에게는 약하고, 자에게는 강하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그런 식의 자기계발과 경영, 처세술이 확산되는 사회에서는 맹자 식의 자기계발과 경영이 설 자리가 없어지겠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맹자가 가치 있다고 봐야겠죠.
김시천: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전국시대’(戰國時代) 즉 전쟁이 판치는 세상에서 널리 인기를 얻었던 책을 지금도 널리 읽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 또한 전국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해요. 당시는 국가간의 전쟁이라면, 우리는 개인간의 살벌한 군비 경쟁, 스펙 경쟁이지요. ‘승자독식사회’라는 말은 ‘전국시대’라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와 비교할 만한 사례의 하나로, 20세기 중국 역사에서 ‘한비자’를 들 수 있습니다. 한비자는 역대 중국에서 내내 환영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 ‘비림비공’운동이 일어나면서 재평가되어 비로소 철학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4, 5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만한 점은, 오늘날 우리가 고대 중국철학사를 서술할 때 한비자가 대등한 ‘제자백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른바 ‘객관적으로’ 서술합니다. 저는 이러한 서술 방식과 달리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백가’는 모두 좋은 책인가?
김시천: 아마도 이런 생각은, 전호근 선생님을 만나 ‘맹자’를 재발견하게 된 이후였던 것 같습니다. ‘맹자’가 민주주의 사회에 가장 적합한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천대받고 있는 상황이 통탄스러운데, 왜 현실에 접목시키기에 가장 좋은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학문적 관심이 적고 홀대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호근: 맹자가 살았던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맹가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당시 천하의 모든 군왕들이 다른 나라를 쳐서 빼앗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여겼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생각에 부합하는 인물들이 존중받았겠죠. 그런 사람을 바라고 양나라 혜왕(惠王)도 맹자를 초빙했던 것인데, 맹자와 같은 사람이 와서 혜왕도 상당히 당황했을 겁니다.
맹자는 자신이 살았던 당시에도 물론 공동체의 이익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끝없이 ‘이익’(利)을 부정하고 ‘인의’(仁義)를 강조했던 사람입니다. 지금의 시대도 바로 맹자가 살았던 시대와 같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김시천: 선생님의 이야기는 저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제자백가가 모두 ‘고전’이므로 모두 의미가 있다는 식의 해석과 평가는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책이 팔리는 것을 보면, <손자병법>과 <맹자>가 팔려나가는 숫자는 비교가 안 됩니다. 손자병법이 처세서로 몇 십만 부씩 팔리고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논어> <맹자>를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일종의 ‘투쟁’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전호근: 사실 <손자병법>과 같은 책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부하들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사랑의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만 하고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쓸 데 없는 사랑이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인간관을 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이것이 판매를 늘리는 데 직결되죠.
김시천: 우리 사회에서 얼마 전에 화제가 되었던 마이클 샌델의 이야기와 같은 것 같습니다. 저는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첫 장을 읽다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리케인이 휩쓴 마을에서 상인들이, 물건의 예전 가격을 너무 올려 폭리를 취하는 상황을 두고서, 어떤 가격이 적정하고 바람직한가에 대한 도덕과 정의의 문제를 토론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요. 내가 살던 동네에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려 당장 급한 것들을 사러 수퍼에 갔더니, 수퍼마켓의 주인이 가격을 몇 배씩 올려 폭리를 취하려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이 상황은 가격과 공정거래를 논하기 전에 이미 삶의 극한 상황이고, 그것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비인간적인 행위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상황을 논의하는 것이 대단히 심각하고 중요한 학문적 논제가 될 만 할까요? 그것은 이성의 후퇴이고, 도덕성의 상실이며, 인간성 파괴의 상황입니다.
제가 볼 때 <정의란 무엇인가>의 그 이야기는, 얼어붙은 지성이자 병든 지성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소설가 장정일 선생님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런 통렬한 비평을 하기도 했지요! 무엇이 정말 논의할 만한 문제인지를 판단해내는 것이 지성이고, 그것을 기르기 위해 읽는 것이 고전이라는 입장에서 저는 전호근 선생님이 정상적인 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 철학과 정치의 사이에서
김시천: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맹자’의 일화는 ‘맹모삼천지교’입니다. 심지어 ‘맹부삼천지교’라는 영화까지 나올 정도로. 그렇지만 근대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맹자>는 일반적으로 철학책, ‘맹자’는 철학자로, 혹은 세밀하게 ‘윤리이론가’로 말합니다. 저는 이런 방식의 평가에 대해 불만이 많은데, 이런 분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호근: 우리가 철학자라고 할 때 철학자의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맹자’를 철학자라고 하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윤리이론가라는 측면에서만 철학자를 바라본다면 저도 똑같이 맹자를 그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을 반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장자(莊子)가 공자나 맹자의 유가사상을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내면의 덕이 훌륭한 사람이 성인이고, 덕이 있는 사람이 밖으로 천하를 다스려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성외왕을 실현했던 사람은 공자 이전 사람으로서, 요임금, 순임금, 탕임금, 우임금, 문왕, 무왕과 같은 이들은 자기가 왕이었기 때문에 직접 다스리기만 하면 되었죠.
그러나 공자부터는 임금이 아니므로, 어떻게 해서든 현실에 있는 임금을 교화시켜서 자기가 바라는 정치를 구현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그냥 철학자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죠. 그럴 경우에는 ‘정치가’라고 해야 합니다.
반면 철학의 영역 속에 정치를 포함시킬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성선설’을 기본적으로 정치담론으로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철학의 폭이 넓어지겠죠. 그렇지만 만약 철학의 폭이 넓어지지 않고 윤리에 국한시킨다면 맹자를 철학자라고 분류하는 것 자체가 맹자를 너무 협소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산 정약용도 맹자의 평생 목적이 ‘백리흥왕지도’라고 표현했습니다. 백 리의 영토만으로 ‘왕도’를 일으킨다는 것이죠. 천 리 이상이 되어야 ‘패도’로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지, 백 리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백리흥왕지도라는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 과제였다면 그런 경우에 맹자는 ‘정치인’으로 분류해야 하겠죠.
저는 철학이라는 개념에서 ‘정치’를 배제하고 나아갈 수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 사회철학 영역에서 바라볼 때에는 정치는 곧 철학이고, 철학이 곧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모두 근대인이 아니었다
김시천: 기존의 유학에 대한 평가는, 정치는 윤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규정 방식은, 유학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폐쇄하는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의 우선성이 있을 때 윤리는 당연히 정치가 지도받아야 될 원리가 되고, 거꾸로 읽는 것이 오히려 맹자를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포함하여 전통적인 ‘주석’과 오늘날의 철학 및 다양한 담론들을 다루는 ‘학술적 연구’ 사이에 괴리감이 형성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고전 연구를 하시면서 맹자에 대한 다양한 주석들을 접하며 느낀 점과, 현대학자들이 근대적 방식으로 맹자를 연구하는 것에서 어떤 차이점을 느끼시나요?
전호근: 전통적 주석이라는 것은 우연히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명저’가 전해집니다. 그런 주석가들을 통해 맹자를 바라보면 이들은 자기 앞사람들의 견해를 철저하게 연구하고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전통 주석가들의 탁월성이 있다고 봅니다. 최근의 경향을 보면 오히려 그런 철저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앞선 시대의 결과물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그런 논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또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문헌의 섭렵 범위라든지, 텍스트를 장악하는 수준이 그렇게 높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이 안타깝습니다. 다만 전통 주석가들의 경우에는 우리가 말하는 ‘근대’라는 초유의 시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좀 이상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다산도, 연암도 ‘근대’라는 표현은 썼지만 ‘근대인’은 아니었거든요. 그들의 글쓰기나 주장 속에 근대를 지향하고 중세를 깨뜨리는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이 결코 근대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전혀 엉뚱하게 보기도 하고, 시대를 잘못 읽기도 하고 역사성이 취약하기도 했습니다. 중세적인 학문 관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 꽤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제도권에서 학문을 하게 되면 역사나 연대의 전후, 시간의 흐름과 같은 제도권의 훈련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 방식은 전통 시대의 학자들이 지금 시대의 학자들을 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일장일단이 있기는 한데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전통 주석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일본이나 중국의 권위 있는 학자가 얘기하면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한 분위가 있는데 이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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