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 57-척도와 양상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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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 57-척도와 양상

1)

헤겔 논리학 1부 존재론 1편이 질[그 제목은 ‘존재’지만 실질적으로 질을 다룬다], 2편이 양, 그리고 3편은 척도를 다룬다. 감각적 성질은 각기 독립적이며 서로 무차별하다. 양은 동일한 일자들의 서로 무차별한 관계다.

양을 다루면서 양들의 연속성과 불연속성(분산성)이라는 이중적 관계를 살펴보고, 이어서 이런 양들의 관계가 외연량의 관계와 내포량의 관계로 나누어질 수 있음을 보았다. 외연량은 예를 들어 어떤 것의 길이를 다른 것의 길이를 통해 측정한 것이다. 이는 수학적으로 기수를 통해 표현된다. 내포량은 어떤 사물의 경도를 잴 때, 단순히 다른 사물과 비교하여 측정한 것이다. 이는 수학적으로 서수를 통해 표현된다.

“존재 그 자체는 규정성이 직접 자기와 동일하게 된 것[질적인 것]을 말한다. 이 직접적 규정성은 지양된다. 양은 존재가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어서 규정성에 무차별한 것으로서 단순한 자기 동일성[대자 존재적 일자]이다. 그러나 이 무차별성은 외면성일 뿐이며, 자기 자신에서가 아니라 타자에서 규정성을 갖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3)

외연량과 내포량은 한 사물이 지닌 하나의 정량이 다른 사물이 지닌 동일한 정량을 통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아직 하나의 정량과 다른 정량의 관계가 출현한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두 정량의 관계는 수학적으로는 비례를 통해 또는 분수를 통해(왜냐하면, 비례는 다시 분수화 될 수 있으므로) 표현된다.

처음 직접 비례는 두 정량의 서로 무차별한 관계다. 이는 정수비의 관계다. 역 비례에 이르면 두 정량의 관계는 어떤 한계 내에 묶이지만(서로 곱하면 동일한 수이므로), 여전히 서로 외면적인 관계 아래 있다. 마침내 정량이 제곱 비례의 관계, 통약 불가능한 무리수적인 분수의 관계에 있게 되면 서로 다른 두 정량 사이에 내적인 관계가 출현한다. 예를 들어 거리는 시간의 제곱이다.

이런 제곱 관계조차 사실 여전히 외면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리는 시간의 제곱이라 할 때, 사실 시간은 거리의 일종으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서로 다른 두 정량이 내적인 관계를 지니는 단계에 이르면, 그것이 곧 특수 량이다. 예를 들면, 비중은 무게와 부피의 내적 관계다. 이때 무게 없는 부피가 없으며, 부피 없는 무게는 없지만, 무게와 부피는 서로 다른 것이다.

2)

이 특수 량이 곧 사물의 척도다. 여기서 척도라면 어떤 사물의 고유한 크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사물의 무게나 부피 각자로는 사물의 고유성을 표현할 수 없다. 어떤 사물의 고유성은 그 사물의 비중을 통해 규정될 수 있다.

“제삼의 것[척도]은 이제 외면성이 자기 관계하게 된 것이다. 자기 관계하면서 동시에 외면성이 지양되니 자기 관계 자체에서 자기와의 구별[두 정량의 내적 관계]을 갖는다. 그래서 이 구별은 외면성으로서는 양적인 계기이며 자기 내로 복귀한 것으로서는 질적인 계기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3)

물론, 이 비중은 아직 진정한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을 다만 주관적으로만 규정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수한 일반성이다. 이것은 마치 질을 다룰 때 감각적 질이 일반적인 질 즉 성질[Eigenschaft]로 발전한 것과 같다. 일반적 성질은 아직 객관적으로 일반적인 것 즉 이데아적인 성질(이것이 헤겔에서는 곧 대자 존재다)이 되지 못하며 다만 주관적으로 일반적인 것 즉 특수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주관적 일반성이 사물의 양적인 관계에서 출현할 때 척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앞에서 질 범주의 논리적 발전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 척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척도는 주관적 척도에서 객관적 척도로 이행할 것이다. 그것이 본질인데, 마치 주관적 일반성 즉 성질 가운데 진정으로 일반적인 성질 즉 이데아를 찾는 것이 지난 한 작업이듯이, 주관적 척도에서 마침내 본질에 이르는 길은 지난한 길이다.

앞의 길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개념을 참조로 했는데, 주관적 척도에서 객관적 척도 즉 본질로의 이행에도 유사한 철학적 논의가 전개될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3)

척도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서두에서 곧바로 헤겔은 양상 범주에 대한 논의를 던진다. 헤겔은 이 특수 량 즉 척도가 질 범주와 양 범주에 이어지는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고 본다. 사실 양상 범주는 우연성, 현실성, 필연성 범주를 말하는데 논리학에서 1권 2부 본질로 마지막에 다루어진다. 그것은 본질론에 들어가 관계의 범주를 다룬 끝에 등장한다.

논리학이 1권에서 1부 존재론에서 질 범주와 양 범주를 다루고 2부 본질론에서 관계 범주와 양상 범주를 다룬 것은 칸트의 판단론의 12 범주의 체계에 따른 것이다. (다만, 칸트의 경우 양 범주가 먼저 나오고 질 범주가 나오는데, 헤겔은 질 범주를 먼저 다룬다) 칸트는 이런 범주들 사이에 어떤 발전이 존재한다고 보지는 않았으며, 각 범주는 마치 좌표 체계처럼 경험과 관계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범주들 사이에도 논리적 발전이 존재한다고 보면서, 그런 논리적 발전에 따라 논리학을 구성했다.

이런 논리적 발전의 배후에는 다시 정신현상학에서 보는 것과 같은 시간적 발전이 깔려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논리학 서문을 다룰 때 이미 언급했으니, 그 부분을 다시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여기서 헤겔은 1부 존재론에서 1편 질 범주와 2편 양 범주에 이어서 등장하는 3편 척도 범주 사이에도 어떤 범주적 연관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 범주들의 범주적 관계를 실체와 속성 그리고 양상이라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범주 체계(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체계 구성을 생각해 보라)를 통해 이해하려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척도는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질 범주는 실체 범주에, 양 범주는 속성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데, 헤겔은 그 점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우리의 추측에 맡길 뿐이다. 우리도 굳이 여기서 그 점을 고민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헤겔이 여기서 양상 범주를 끌어들인 것은 이 3편 척도가 다루는 내용의 독특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양상 범주는 문법적으로는 부사에 해당한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주어인 실체에 비해보면 중요하지 않은 우연적이고 개별적이고 유한한 것이다. 양상은[Modus] 사물의 양식[Art]과 방식[Weise]이다. 그러므로 양상에 해당하는 것은 제거되고 부정되고 만다. 헤겔은 이런 점을 지적하기 위해 범신론(구체적으로는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인도의 범신론)에 양상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소개한다.

“스피노자주의에서 바로 양상 자체가 비 진리이며 다만 실체가 진정한 것이듯이 모든 것은 이 실체로 환원되어야 하며 그래서 이 모든 것은 모든 내용을 다시 공허에 빠뜨려야 하며 다시 말해 다만 형식적이고 내용이 없는 통일성 속으로 빠뜨려야 하니, 시바[인도 형이상학 체계-브라만, 크리슈나, 시바-에서 시바] 역시 위대한 전체이며 브라만으로부터 구별되지 않은 것 즉 브라만 자체다. … 생성과 소멸 즉 양상 일반의 영역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서 최고의 목표는 의식이 없는 것 속에 침잠하는 것이며 브라만과 통일하고 무화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5)

4)

헤겔은 이런 전통 형이상학 체계에서 양상 범주는 그 본래 진정한 의미에서 다루어지지 못했다고 본다. 헤겔은 양상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이며 유한한 것이지만, 그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즉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오히려 진리인 실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기독교 신학에서 양상 범주의 중요성을 주목하는데 그리스도는 개별적이고 유한한 존재로 출현했다. 그런 점에서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 하지만, 자기를 부정하면서 마침내 신이 되니, 양상 범주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헤겔은 질과 양에 이어서 등장하는 척도는 이런 자기 부정적인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고 말하면서, 이 척도에서 본질로의 이행이 이런 자기 부정성의 운동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말하려 한다. 척도에서 본질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척도가 없는 것 즉 무-척도[Masslose]에서 본질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리학적 자연은 척도를 지닌다. 자연을 수학화 하는 것은 이런 척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척도는 어디까지나 양적 관계다. 이 양적 관계는 아무리 수학적으로 복잡한 체계를 통해서도 그것은 척도에 머무르며 진정한 본질에는 이를 수 없다. 물리학적 자연 속에서는 본질은 찾을 수 없다. 본질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제2 실체가 그렇듯이 물리학적 자연을 넘어선 생물의 영역에서 찾아진다.

그 과정에서 헤겔은 우선 화학의 영역에서 등장하는 친화성 개념을 검토한 후 마침내 생물의 영역에 이른다. 이 생물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척도를 상실해 버린다. 생물은 척도나 수를 통해서 규정될 수 없다. 이 영역에서 마침내 본질이 출현한다.

척도가 본질로 이행하는 과정이 이제 앞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그 관계에 대해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척도 속에는 이미 본질의 이념이 들어 있으니 즉 규정되어 있음의 직접성 속에서 자기 동일적이라는 이념이 들어 있다. 그와 같은 직접적 본질[즉 척도]은 자기 동일성을 통해 매개된 것으로 격하되고 마찬가지로 이런 매개된 것은 다만 외면성을 통해서 매개된 것이지만, 자기 매개이다. 그것은 반성이로되 그 규정성들이 존재하며 그러나 반성은 이런 존재 속에서 단적으로 그 부정적 통일의 한 계기가 되는 것일 뿐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6)

이 구절에서 척도의 이중성을 설명한다. 척도는 자기 매개, 자기 동일성과 타자 즉 외면성을 통해 매개된 것이 합일하면서 생겨난 것의 통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과 내적으로 관계 맺고 있다는 의미다. 내적인 관계이므로 자기 관계이며, 타자와 관계하므로 외면성을 통해 매개된 것이다. 이런 척도는 앞으로 본질로 발전하니, 척도 개념 내에 이미 본질이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질은 자기 내 반성과 직접성의 합일이니, 생물의 종이 개체 속에서[직접성] 자기를 재생산하는[본질] 관계를 통해 본질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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