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50-양적 무한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0-양적 무한성
1)
앞에서 셈법과 수의 종류를 다룰 때 정수에서 분수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양이 출현한다고 했다. 정수는 외연 량을 표현한다. 그것은 길이나 무게와 같은 추상적인 개별 량이다. 분수는 비례 량을 표현한다. 이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무게와 부피의 비례인 비중, 거리나 시간의 비례인 속도와 같은 것이다. 이런 관계를 통해 성립하는 구체적인 양을 비례 량이라고 이름 붙였다.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내포 량 또는 정도다. 내포 량은 타자와 비교에서만 성립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인 양이다.
외연 량(정수)에서 비례 량(분수)으로 나가는 과정은 경험적으로는 경험이 더 풍부해져서 개별적 정량을 넘어선 다른 정량들 사이의 관계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이행을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개념의 실현 운동으로 설명한다.
이 운동 과정에 대한 헤겔의 설명은 모호하다. 이는 c절 양적 무한성 절에서 설명되는데, 표면적으로 보면, ‘악 무한’에서 ‘진 무한’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무한 진행이다. 무한 진행이 악 무한(예를 들어 무한대나 무한소)으로 표현됐다가, 이것이 무한 진행임이 밝혀지고 나아가서 그 본질은 진 무한 또는 내적인 무한성 개념이라는 사실이 자각된다.
처은 악 무한을 다룰 때는 헤겔의 설명은 동일한 정량에서 정량의 운동(예를 들어 길이의 확장)을 설명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진 무한 개념이 등장하면서 이 진 무한이 곧 비례 량 즉 다른 정량의 내적 관계임을 천명하면서 끝난다. 이 과정은 약간 어리둥절하게 보이며 이 과정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헤겔이 논의를 전개하는 독특한 방법이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헤겔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2)
먼저 헤겔에서 양적 무한성에 관한 개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출발점은 하나의 정량과 다른 하나의 정량이 관계다. 이 관계는 길이나 무게와 같은 개별 정량에서 두 정량의 관계로 볼 수도 있고 비중같이 두 다른 정량 사이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차라리 헤겔의 개념 규정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두 차원을 넘나든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개별 량와 비례 량이라는 구체적 내용의 차이를 무시하고 두 정량의 일반적 형식적 관계를 보자.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인 일자에서 동일한 대자 존재인 다른 일자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서로 같은 대자 존재가 관계한다는 점에서 연속적이며 각 대자 존재는 고유한 일자라는 점에서 서로 구별되고 무차별하므로 이 관계는 분산적이다.
양적 관계가 이와 같은 이중성을 지니므로, 어떤 정량의 부정은 정량의 타자지만 또 하나의 정량이 된다. 그러므로 그 부정은 새로운 정량에 머무르지 못하며, 그 새로운 정량조차 자기를 부정하게 하니, 이 과정은 끝없이 계속된다. 새로운 정량은 기존 정량의 부정이면서 동시에 자기가 부정되니, 이중 부정 또는 자기 부정이며 이런 점에서 무한 정량, 즉 양적인 무한성이 된다.(이런 자기 부정성 개념은 길이나 무게 등 개별 정량의 무한 진행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앞에서 질적 무한성 개념을 다룰 때도 양적 무한성에서와 마찬가지의 자기 부정성이 출현했다. 그러나 같은 자기 부정성이더라도, 질적 무한성과 양적 무한성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다. 이제 현존 절에서 다루었던 질적 무한성과 양 절에서 나타나는 양적 무한성을 비교해 보자.
3)
질적 존재에서 규정성은 어떤 것이 지닌 속성이다. 예를 들어 소금은 짜거[p]나 입방체[-p]다. 모든 소금은 짜며, 동시에 입방체다. 양자의 통일은 p가 아니고 -p도 아니며 동시에 p이면서 -p인 것이다. 이것은 서로 대립하는 p와 -p를 매개하고 자기를 p와 -p로 출현하게 하는 동시에 양자를 초월하는 일반성 즉 대자 존재다.
이 질적 무한성 즉 대자 존재는 자기를 때에 따라 p나 -p와 같은 대립하는 성질로 나타내는 운동을 의미하지만, 그 자신은 질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양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왜냐하면, 대자 존재와 대자 존재는 일자와 일자의 관계이며 양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질적 무한성은 양으로 이행한다.
일반적으로 질적 규정성은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타자의 부정을 통해(반성적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짠맛은 입방체에 대립해서 짠맛으로 규정된다. 즉 p는 -(-p)이다. 양적인 것에서는 이런 타자에 대한 대립 관계가 사라진다. 그 때문에 질적 성격도 사라진다. 여기서는 동일한 대자 존재 그러나 서로 무차별한 존재 즉 일자와 일자 사이의 관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적 존재에서 두 대자 존재, 즉 일자와 일자는 서로 동일한 것이면서도 서로 무차별한 것이다. 두 개의 나뭇잎, 두 개의 물방울은 서로 무차별하면서도 서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양적인 무한성 즉 p가 아닌 것은 그 자체가 p이므로 자기 자신도 부정할 수밖에 없으니 어떤 부정은 자기 부정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끝없는 자기 부정성이 곧 양에서 나타나는 양적 무한성이다. 이런 양적 무한성은 하나의 정량 내에서 이 정량이 자기를 부정해서 자기를 넘어서게 만드는 것 그러므로 내적인 무한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정량에서 나타나는 자기 부정성이 독특하다는 사실이다. 정량의 자기 부정성은 어떤 정량의 타자가 곧 자기 즉 자기와 같은 대자 존재이므로 나타나는 자기 부정성이다. 그러므로 이 부정성은 타자를 부정해서 다시 자기가 되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는 타자로 미끌어지는 것(무한 진행)이며 후자의 측면에서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미끌어진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무한성이다. 그러나 타자를 부정해 자기로 돌아온다는 측면에서는 규정성이다. 질적 규정성이란 타자에 대립해서 나타나는 부정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무한성을 통해 양에서 질적인 것이 회복된다.
4)
예를 들어(이런 의미에서 양적 무한성은 개별 량에서보다 오히려 비례 량에서 더 잘 드러난다) 무게는 독자적인 정량일 수도 있고 부피에 비례하는 정량일 수도 있다. 후자가 비례 량이다. 전자일 때는 정량의 규정성(예를 들어 삼 미터)은 자기(길이)에 대해 외면적이다. 그 규정성은 자기에 무차별하다.
그러나 부피에 비례하는 무게 즉 밀도 또는 비중은 같은 타자에 대해 관계하는 정량이다. 비중이 크다는 것은 그저 무게와 무차별한 부피에 대해 무게가 외면적으로(사유를 통해) 비교된 것이 아니다. 비중은 부피라는 자기의 타자에 대해 관계하며 그것도 대립적으로 관계하니 즉 비중이 크다는 것은 자기의 부피를 축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중은 부피에 대립하고 부피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립해서 규정되므로 질적인 규정성이 다시 회복된다. 비례 량을 이루는 구성 요소인 개별 양은 추상적이고 그 각각은 양적 관계를 갖지만, 비례 량에 이르면, 그 자체는 한편으로는 여전히 양적 관계에 머무르면서도 이제 질적 차이를 발생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양적 무한성 즉 이중적 부정은 “어떤 정량으로서뿐만 아니라 정량 자체로서 지양된 정량이다.”(논리학 초판, GW12, S. 140)라고 한다. 즉 단순히 하나의 정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량 자체를 부정하는 것 즉 질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정량은 자기의 비 존재 무한자를 매개로 하여 다른 정량 속에서 자기 규정을 갖는다. 즉 질적인 차원에서 정량의 본성으로 된다. 그러나 정량의 개념과 그 현존을 비교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반성에 속하며 즉 여기서 아직 출현하지 않은 비례에 속한다. … 이제 외면성 속[정량의 타자]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것, 외면성 속에 자기 관계하며 자신과 단순한 통일성 속에 있고 질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235)
“이 비례 속에서 정량은 자기에 외면적이며 자기 자신과 상이하다. 그러나 이 자기의 외면성, 다른 정량에 관계하는 것이 동시에 그의 규정성을 이룬다. 이 속에서 무차별한 규정성이 아니라 질적 규정을 갖는다. 정량은 자기의 외면성 속에서 자기 내로 복귀한다.”(논리학 초판, GW12, S. 153)
5)
양적 무한성의 개념은 이처럼 자기를 자기가 부정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헤겔은 양적 무한성 개념을 통해서 무한대나 무한소, 무한 진행, 진정한 무한성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한다.
무한대, 무한소는 무한히 크고 무한히 작은 것을 실체화하여 실제로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할 때다. 그것은 마치 피안이 존재한다고 할 때와 같은 의미다. 반면 무한 진행은 정량이 극한에 도달한 순간 다시 그것을 넘어가는 것을 말하니, 비유하자면 수평선을 끝까지 가면 다시 더 멀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과 같다.
그러나 헤겔은 무한대나 무한소는 잘못된 이미지라고 보며 이를 일단 무한 진행이라는 개념으로 환원한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무한대나 무한소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무한 진행의 왜곡된 표현이며 이 무한 진행을 일정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대나 무한소로서 무한량은 본래 무한 진행이다. 그것은 크거나 작은 것으로서 정량이면서 정량의 비존재다. 따라서 무한대나 무한소는 표상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그 표상은 좀더 가까이 다가가 고찰해 보면, 무실한 그림자와 안개처럼 나타난다.”(논리학 재판, GW21, S. 233)
“정량을 넘어서는 것은 정량의 부정 즉 무한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량이 정립되면서 이것은 무한의 부정이다. 이 악 무한은 표상에서 절대자로 여겨지며 다시 지양되지 않는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을 더는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논리학 초판, GW12, S. 151)
헤겔은 이런 무한 진행 역시 넘어서면서 이 무한 진행은 진 무한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한 진행은 끝없이 자기를 부정해서 앞으로 나가는 운동인데, 진 무한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넘어서는 탈자화의 운동 자체를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한 진행와 진 무한은 다를 바가 없다. 둘 다 자기를 넘어서는 운동이다. 진 무한이라 할 때는 어떤 정량 속에 그것이 자기를 넘어서는 운동을 말한다. 무한 진행이라 할 때는 그런 진 무한의 운동한 결과 도달한 결과가 다시 넘어서서 끝없이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진 무한이 내적 운동이라면 무한 진행은 그런 내적 운동의 표현이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질적 무한성에서도 출현한다. 이때는 질적 무한성은 대립하는 성질을 넘어서는 포괄적 일반화로 즉 대자 존재로 나간다. 그러나 양적인 것의 평면에서는 자기 부정성은 즉 양적 무한성은 일반화가 아니라 옆으로 미끌어지는 무한 진행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무한 진행의 진정한 모습이 내적 부정성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외면적으로 끝없이 앞으로 나가는 모습만을 취해서 본다면 그것이 헤겔이 비판하는 무한 진행이다. 무한 진행은 아직 내적 부정성의 운동임을 모르고 있는 내적 부정성의 운동일 뿐이다. 거꾸로 무한 진행이 지닌 본래적 모습을 자각한다면, 그것이 곧 진 무한이다. 헤겔은 이 진 무한을 ‘정량의 개념’, ‘개념에 따라서 규정된 정량’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무한자는 다만 최초의 부정으로 규정되고 무한 진행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무한 진행 속에서 그 이상의 것이 출현한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 즉 부정의 부정 또는 본래적으로 무한자인 것이 말이다. 이런 사실은 정량의 개념이 이를 통해 회복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논리학 재판, GW21, S. 234)
5)
위에서 악 무한이나 무한 진행은 진 무한을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헤겔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사실 이런 무한의 여러 종류는 자연의 운동 또는 수 운동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헤겔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헤겔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보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적 무한성은 정량에 내재하는 운동이며 이는 곧 자기를 부정하는 또는 자기를 넘어가는[Hinaus] 운동이며, 자기를 벗어나는 운동 즉 탈자화[Aussersich]로 규정된다. 그런데 이런 양적 무한성은 정량의 종류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출현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한 운동을 보자. 이 자연의 운동은 수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등속 운동 S=at a ; 1, 1, 1 (정수): 속도가 고정된 운동
등가속 운동 S=vt v=S/t : 1/2, 2/4, 3/6 (유리수적 분수)…. : 일정한 양으로 속도가 증가하는 운동
가속 운동 S=1/2at² a=2S/t² : 1/2, 1/4, 1/9(무리수적 분수) … : 속도가 가속적으로 증가하는 운동
여기서 세 가지 운동은 전혀 다른 운동으로 보이지만, 사실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 즉 가속 운동이 단순화된 형태가 등가속운동이고 이 등가속 운동이 단순화된 형태 등속 운동이라는 것이다.
세 가지 운동을 이렇게 본다면, 이 관계를 다시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양적인 영역에서 운동의 개념은 탈자화하는 운동이다. 즉 자기를 부정해서 또 다른 자기로 이행하는 운동이다. 그런 운동의 개념이 등속 운동에서는 가능성으로만 나타나고 비로소 가속 운동에 이르러 그 개념이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등속 운동에서 운동의 개념이 가능성에 머무르고 감추어져 있다. 무한 진행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 운동에서 운동의 개념인 운동의 기울기가 곧 0라는 것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운동은 외면적으로만 나타나고 그 결과 운동은 악 무한이나 무한 진행이라는 외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면 기울기가 일정수인 경우나 기울기가 증폭하는 경우에서도 그 운동은 무한히 확산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무한 진행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운동의 개념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운동이 확산하거나 증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있는 운동의 기울기가 내적 부정성, 진 무한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6)
자연의 운동이란 본래 두 가지 정량 사이의 관계다. 이는 등가속 운동이나 가속 운동이 분수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런 운동의 개념은 이미 개별 양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등속 운동에서도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등속 운동도 비례 량이다. 이미 거기서도 두 다른 정량이 관계하고 있다.
등속 운동에서는 비례 량이라는 사실도 드러나지 않기에 여기서는 마치 개별적 정량이 자기 내에서 서로 관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등가속, 가속 운동에 이르러 운동의 개념이 드러나면서 두 다른 정량의 비례 량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존재론 현존 절은 판단 형식에서 질적 범주에 해당한다. 존재론 양적인 것은 판단 형식에서 양의 범주를 다룬다. 이때 1절 양적인 것은 양의 운동 일반을 다룬다. 2절 정량은 양의 판단 형식에서 최초의 판단인 단칭 판단의 형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단칭 판단이 부정되는 가운데 양적 무한성 개념이 출현하고, 그 결과 등장하는 진 무한은 곧 특칭 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진 무한은 곧 비례 량이니 비례 량이 특칭 즉 양적인 어떤 것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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