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45-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5-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
1)
헤겔 논리학을 다루면서 논리학의 구조가 판단 형식 즉 범주가 전개되는 방식과 상응한다고 말했다. 그런 상응에 비추어 보면, 정량은 양적 판단 형식 가운데 첫 번째 단칭 판단 형식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겔을 질을 다룰 때도, 존재와 무의 상관관계를 통해 현존을 끌어냈다. 존재와 무는 현존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관계 즉 ‘관계있음(존재)’과 ‘관계없음(무)’를 말한 것일 뿐이고, 실제 질적 판단 형식은 현존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현존이 질적 긍정 판단에 해당한다.
이런 전개 방식은 양을 다루는 때도 마찬가지다. 바로 앞에서 다루었던 양적인 것 즉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정량의 일반적인 상호 관계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양적 판단 형식이 처음 시작하는 것은 정량에서부터다. 질적 판단 형식에서 현존에 해당하는 것이 양적 판단 형식에서는 정량이다.
2)
정량과 수의 관계는 앞에서 말했다. 정량 속에 이미 수적 관계가 들어있다. 수는 나름대로 하나의 정량이며, 다만 다른 정량을 표현하는 기호로 사용될 뿐이다. 즉 이 정량에서 이미 존재하는 수적 관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정량과 수의 관계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설명한 상품과 화폐의 관계와 같다. 상품 속에 이미 교환가치의 관계가 들어있다. 화폐도 하나의 상품이지만, 다른 상품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즉 화폐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수에 관한 심리주의자는 수를 인간의 셈이라는 주관적 활동으로부터 끌어내려 했다. 그것에 대해 논리주의자는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수는 알다시피 초월성 또는 객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플라톤은 수를 이데아로 여겼다. 양적인 존재 즉 정량은 이런 이데아가 분유 되어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러나 헤겔의 관점에서 본다면 수의 객관성은 마치 화폐가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마르크스는 금의 자연적 속성에서부터 화폐의 본성이 나오는 것을 일종의 물신화로 여겼는데, 마찬가지다. 수의 객관성을 수가 지닌 고유한 속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면 이는 물신화에 해당한다. 상품에서 화폐가 나오듯이 수의 객관성은 정량에서 나온다.
3)
정량은 수로 대변되므로 헤겔은 정량을 논하면서 자주 수를 끌어들인다. 정량을 다루는 2편 2장 A 절은 아예 ‘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A 절에서 헤겔은 수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것이 바로 외연량과 내포량이다.
흔히 수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연속적 수와 불연속적 수다. 연속적 수 또는 크기(정량)¹를 다루는 학문이 기하학이다. 불연속적 수 또는 크기(정량)를 다루는 것이 산술학이다. 고대에 기하학과 산술학은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기하학은 주로 이집트 그리스에서 측량술로부터 발전했다. 산술학은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에서 발전했다. 인도가 수 0을 발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주1: 헤겔은 양적인 것[Quantität]을 크기[Größe]와 구분한다. 크기는 규정성을 지니므로 정량[Quantum]에 해당한다.
그런데 수가 자연수에서나 분수에서처럼 불연속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일찍 발견됐다. 피타고라스학파에서 비밀로 여긴 무리수의 발견이 여기에 속한다. 무리수는 수이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연속적 수다. 이 수가 서로 분리된 유리수 사이에 끼어들면서 수는 단순히 불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임이 알려졌다. 수를 불연속적인 것으로만 여겼던 피타고라스학파가 무리수를 숨기려 했던 것은 이 발견이 고대에 얼마나 충격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기하학은 공간적 크기를 다루고, 여기서는 수가 개입하지 않는다. 기하학은 변이나 각, 길이의 같음과 다름을 다룰 뿐이다. 물론 기하학에서도 삼각형이라든가, 사각형 등에서 보듯이 수가 부분적으로 개입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다루는 대상에 관한 것이지, 기하학이 다루는 것은 여전히 같음과 다름일 뿐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피타고라스 정리는 기하학적 방식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 대수학이 발전하면서 피타고라스 정리가 대수학적으로 증명됐고 나아가서 근대 해석기하학에서 대수학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면서, 기하학적 크기 역시 불연속적 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인정되기에 이른다.
대수학의 발전은 기하학적 연속적 크기가 불연속적 크기를 가지마, 거꾸로 산수적 불연속적 크기가 연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수를 이렇게 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로 나누는 것은 의미 없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량을 다루면서 당시 흔히 다루었던 방식대로 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로 나누지 않고, 외연량과 내포량으로 나누었다.
4)
이제 외연량과 내포량, 외연적 크기와 내포적 크기의 관계를 다루기 전에, 이 두 가지 크기의 공동 지반이 되는 정량을 살펴보자. 정량은 개념적으로는 양적인 것이 규정성 또는 한계를 지니면서 출현한다.
이런 정량은 구성하는 요소는 우선 일자다. 이 일자[Eins]는 정량의 수를 셀 때 출발점이 되는 것 즉 기본 단위다. 이 단위를 무엇으로 하는가는 자의적이다. 물의 양을 재기 위해 우리는 부엌에서처럼 바가지로 잴 수도 있고 실험실에서처럼 비커로 잴 수도 있다. 전통적 단위인 ‘냥’으로 잴 수도 있고 국제 표준 단위인 그램을 사용할 수도 있다. 어느 단위를 사용하든 자의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여기에 고유한 객관적 단위는 없다. 헤겔은 어떤 정량을 재기 위한 단위를 그저 ‘일자’라고 한다.
정량을 단위로 재면, 두 가지 계기가 출현한다. 헤겔은 이를 개수[Anzahl]와 총수[Einheit]라고 한다. 이 두 계기가 수를 설명하는데 아마도 헤겔만이 제시한 독특한 개념이다. 우선 개수는 어떤 단위가 얼마나 여러 번 반복됐는가를 말한다. 20의 크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1이 스무 번 반복돼야 한다. 즉 20에는 1이 스무 개 들어있다.
20개 속에 들어있는 1 즉 일자는 서로 동일하다. 그 중 어느 것도 1일뿐이다. 또한, 이들은 서로 동등하다. 세 번째 1과 네 번째 1은 세기 나름이지, 달리 세어서 세 번째를 네 번째로 세고 네 번째를 세 번째로 세더라도 무방하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20개 속에 있는 일자는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자는 아무리 빨리 세더라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어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총수[Einheit]를 보자. 이것은 1을 스무 번 반복해서 나온 ‘20’이라는 수가 다른 수 예컨대 ‘9’라든가 ‘21’과 같은 수와 비교해서 가지는 의미다. 이 20은 개수로 보면 스무 번 반복한 것이지만, 총수로 보면, 다른 수처럼 고유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엄지와 검지는 개수로 보면 1과 2지만, 총수로 보면 각자 고유한 것 즉 엄지와 검지다. 엄지는 머리를 누르는 것이고 검지는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다. 스무 개라는 개수가 고유한 스물이 되는 게 바로 수다.
20이 스무 개라는 점에서는 불연속적인 것의 집합이다. 그러나 20을 총수로서 고유한 크기로 보면, 그 속에 모여 있는 20개라는 분리된 것들은 의미가 사라지고 전체는 하나의 통일성을 지닌 것 즉 연속적인 것이 된다. 그러기에 이름이 총수[Einheit: 통일성]이다.
“수는 그 계기로 총수와 개수를 가지며 그 자체에서 양자의 통일이다. 총수는 연속성의 계기며, 개수는 분리의 계기를 이룬다. 양자는 정량 속에서 수로서 존재한다.”(논리학 초판, GW11, S. 126)
5)
정량에서 개수와 총수가 이처럼 두 계기를 이루므로, 헤겔은 정량의 규정성과 질적 현존의 규정성을 비교한다. 질적 현존에서 규정성 즉 감각적 성질은 우연적이고 개별적이고 외면적일 뿐이다. 그것은 타자에 대립해서 규정된 것이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파란색에 대해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정량에서 규정성 즉 한계는 다른 규정성과 구별되는 것만은 아니다. 동시에 다른 규정성과 연결되고 있으니, 4는 3과 5와 다른 것이지만, 동시에 단위인 일자를 셋에서 한 번 더 더한 것이며 한 번 더 더하면 다섯이 되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타자에 대립해서 규정되지만, 후자의 측면에서는 자기 관계해서 규정된 것이다.
어떤 사물의 정량이 20이라고 할 때, 이 개수로서 20이든 총수로서 20이든, 그 기본 단위가 자의적이므로, 그 정량은 자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나이가 스무 살 된 대학생보고 팔십 먹은 노인네라 해도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이를 셀 때 1년을 단위로 하지 않고 계절별로 세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량이라는 크기는 어떤 사물에 대해 외면적이고 그 사물의 본성과 무관한 무차별성을 지닌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일정한 단위가 전제된다면, 그때 정량은 그 사물을 규정하는 고유한 한계, 규정성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군에 가는 나이는 20살이다. 누구도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스무 살에는 군에 가야 한다.
정량을 재는 단위가 이처럼 자의적이라는 점에서 정량은 타자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정량을 재는 단위가 일단 정해진다면, 정량은 그 단위의 반복을 통해 규정되는데, 그런 점에서 정량은 자기 자신을 통해 규정된 것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헤겔은 정량은 “타자를 통해 규정되는 가운데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머무른다”라고 말한다.
6)
정량의 규정성이 자의적인 규정성이라는 점에서 이 정량의 규정성은 질적 현존에서 현존의 규정성과 유사하다. 현존의 규정성 즉 감각적 성질은 주관이 파악한 우연성이며, 그 사물에 대해 외면적이다. 질적 범주에서 운동은 인식하는 주관이 이 외면성을 극복해서 사물에 고유한 성질을 찾아 나가는 운동이었다. 그 운동 끝에 마침내 대자 존재 즉 그 사물의 형상에 이르렀다.
정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정량은 외면적인 규정성이다. 어떤 사물에 고유한 정량을 발견하는 것이 양적 판단 형식에서 운동의 기본 목표다. 예를 들어 도라는 음은 현의 길이를 통해 그 본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현의 길이는 도라는 음의 본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단순한 우연적 정량이 아니다. 헤겔은 척도라는 개념에 이르면 비로소 고유한 정량이 출현한다고 본다.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가 지양된 것이므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리고 대자적으로 그 한계에 대해 무차별하다. 그러나 동시에 양적인 것에서 그 한계 또는 정량이라는 사실은 무차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양적인 것은 일자를 즉 절대적으로 규정된 존재를 자체 내에 그 자신의 고유한 계기로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일자는 그 자신의 연속성 또는 총수에 이르러 정립되면 양적인 것의 한계가 된다. 이 한계는 양적인 것이 자기를 생성해 마침내 도달한 하나의 독자적 존재[Eins]로서 머무른다.”(논리학, 재판, GW21, S.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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