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7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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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76)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영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2) 본 교과목 : 철학적 문답법 – 변증술(531d-535a)

 

[531d-535a]

* 소크라테스는 앞서 다룬 배울 거리들이 본 곡το νόμος을 배우기 위한 서곡το προοίμιον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다. 아무리 그것들에 대단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은 ‘변증술에 능한 자들’οἱ διαλεκτικοὶ이 아니기 때문이다.(531d)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바로 변증술적 대화’τὸ διαλέγεσθαι가 연주하는 바로 그 본 곡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그것은 마치 시각 능력이 마침내 동물들 자체와 별들 자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양 자체 보기를 시도하듯이 누군가가 변증술적 대화에 착수해서 모든 감각을 배제하고 논변을 통해 “각각의 있는 것 자체’αὐτὸ ὃ ἔστιν ἕκαστον를 향해 나아가ὁρμᾶν, 있는 것인 ‘좋음 자체’αὐτὸ ὃ ἔστιν ἀγαθὸν를 지성적 이해νόησις 자체에 의해 파악λαβή하는 것”이다. 즉 그 수감자가 가시적인 것의 끝점τέλος에 도달하듯이, 가지적인 것의 바로 그 끝점에 도달하는 그 여정πορεία이 곧 ‘변증술’διαλεκτική이라 불리는 것이다.(532a-b)

* 그리고 그 여정의 과정들 즉 결박δεσμός으로부터 풀려나기, 그림자σκιά들 쪽에서 영상εἴδωλον들과 빛 쪽τὸ φῶς을 향해 방향을 바꾸기μεταστροφή, 동굴κατάγειος에서 나와 태양ἥλιος까지 올라가기ἐπάνοδος,(532b) 그리고 거기에서 아직은 동식물들τὰ ζῷά τε καὶ φυτὰ과 태양의 빛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있는 것들의 그림자와 물ὕδωρ에 비친 ‘신적인 상들’φαντάσματα θεῖα을 보기 등 앞서 우리가 설명한 ‘기술들이 수행하는 이 모든 작업’ἡ πραγματεία τῶν τεχνῶν은 영혼 안의 가장 훌륭한βέλτιστος 것을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좋은ἄριστος 것을 구경θέ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올리는 힘δύναμις을 가지고 있다.(532c)

* 이와 같이 소크라테스가 본 곡에 대한 운을 떼자 글라우콘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도 받아들이지 않기도 쉽지 않은 일이어서 앞서 서곡에 대해 설명 했던 것처럼 본 곡도 설명해주기를 요청한다. 우선 그는 변증술적 대화τὸ διαλέγεσθαι의 힘δύναμις은 어떤 성격τρόπος의 것이며, 어떤 식으로 분류되고διέστηκεν, 또 어떤 길들ὁδοί을 따라가는지를 묻는다.(532d). 이 길들이 드디어 바로 그곳, 거기에 도달한 사람들οἷ ἀφικομένῳ에게는 길로부터의 휴식ἀνάπαυλα이자 ‘여정의 종착지’τέλος τῆς πορείας와 같은 것이 되는 그곳으로 인도하는ἄγουσαι 길들이기 때문이다.(532e)

*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열의προθυμία야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테고, 이제부터 비유εἰκών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게 보이는 대로 참된 것 자체’αὐτὸ τὸ ἀληθές,ὅ γε δή μοι φαίνεται를 보게 될 테지만 그리고 그것이 진짜 그런지 아닌지는 더 이상 자신 있게 주장할 만한 일이 아니지만, 더 이상은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533a) 그리고 그는 각각의 것 자체 모두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별도의 연구 즉 ’ἡ τοῦ διαλέγεσθαι δύναμις변증술적 대화τὸ διαλέγεσθαι의 힘δύναμις뿐이고 다른 모든 기술들은 사람들의 믿음δόξα들과 욕구ἐπιθυμία들과 관련되어 있거나, 생성γένεσις 또는 조립σύνθεσις된 것들과 관련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러한 것들을 보살피는 쪽πρὸς θεραπεία으로 모두 방향이 맞춰져 있다τετράφαται고 말한다.(533b) 그리고 ‘있는 것’τὸ ὄν에 어느 정도 관여한다고 우리가 주장한 나머지 것들, 즉 기하학과 그에 뒤따르는 것들도, ‘있는 것’을 깨어 있는 상태로 볼ὕπαρ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가정ὑπόθεσις들을 사용하되 그 가정들에 대한 설명λόγον διδόναι은 제공할 수 없어서 그것들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기ἐῶσι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첫 원리ἀρχὴ는 물론 결론τελευτή과 그 중간의 것들τὰ μεταξὺ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짜여진 경우’ἐξ οὗ μὴ οἶδεν συμπέπλεκται 설사 정합성ὁμολογία을 이룬다 해도 결코 앎ἐπιστήμη이 될 수 없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변증술적 연구ἡ διαλεκτικὴ μέθοδος만이 스스로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가정들을 제거하면서ἀναιροῦσα 첫 원리 자체로 나아가며πορεύεται,(533c) 우리가 설명한 기술들τέχναι을 ‘영혼의 전환을 함께 돕는 조력자’συνερίθος καὶ συμπεριαγωγός로 삼고서 그야말로 ‘야만의 늪에’ 묻혀 있는 영혼의 눈ἐν βορβόρῳ βαρβαρικῷ τινι τὸ τῆς ψυχῆς ὄμμα κατορωρυγμένον’을 ‘조용히 이끌어 위로 인도한다.’ἠρέμα ἕλκει καὶ ἀνάγει ἄνω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앞서 설명한 기술들을 우리는 습관ἔθος 때문에 종종 앎ἐπιστήμη이라고 불렀지만, 이것들에게는 믿음δόξα보다는 밝고 앎보다는 어두운 다른 이름이 필요하여 앞에 어딘가에서 우리는 이것을 사고διάνοια라고 불렀지만, 내가 보기에, 살펴볼 것이 우리 앞에 이토록 많이 놓여 있으므로 이름ὄνομα을 가지고 왈가왈부ἀμφισβήτησις할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533d) 그런 연후 앞에서 그랬듯이, 첫 번째 부분은 앎ἐπιστήμη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는 사고διάνοια, 세 번째는 확신πίστις, 네 번째는 짐작εἰκασία이라고 부르고 뒤의 둘은 합쳐서 믿음δόξα으로, 앞의 둘은 합쳐서 지성적 이해νόησις라고 부르면 충분하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믿음은 생성γένεσις과 관련되고 지성적 이해는 있음οὐσία과 관련되며, 있음과 생성의 관계는 지성적 이해와 믿음의 관계와 같으며 지성적 이해와 믿음의 관계는 앎과 확신의 관계, 그리고 사고와 짐작의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다만 이것들이 대상으로 하는 것들 사이에 어떤 비례ἀναλογία가 성립하는지와, ‘믿음의 대상과 지성적 이해의 대상 각각을 둘로 나누는 것’διαίρεσιν διχῇ ἑκατέρου, δοξαστοῦ τε καὶ νοητοῦ은 우리가 해온 논의의 몇 배나 되는 논의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내버려 두자고 말한다.(534a)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각각의 것의 있음οὐσία에 대해 설명λόγος을 할 수 있는 자를 ‘변증술에 밝은 자’διαλεκτικός로 그리고 그럴 수 없는 자는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제시’λόγον διδόναι할 수 없는 자로서 지성νόος을 갖추지 못한 자로 부르고 좋음τὸ ἀγαθός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즉 ‘좋음의 형상’τὸ ἀγαθοῦ ἰδέα을 설명을 통해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해서 규정할 수 없는 사람,(534b) 그래서 마치 전투에서처럼 모든 논박ἔλεγχος을 헤쳐 나가면서 믿음이 아니라 있음에 의거해서 검토하고자ἐλέγχειν 애를 쓰며 그 설명λόγος을 유지한 채로ἀπτωτί 이 모든 상황을 뚫고 나가지διαπορεύηται 못하는 사람은 좋음 자체αὐτὸ τὸ ἀγαθὸν도 그리고 다른 어떤 좋은 것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사람은 행여 어떤 영상을 포착한다고 하더라도 앎이 아니라 믿음으로 포착하는 것이며, 현재의 생에서 꿈꾸고ὀνειροπολοῦντα 졸면서ὑπνώττοντα 지내다가 여기서 깨어나기ἐξεγρέσθα 전에 하데스에 먼저 도착해서 완전히 잠들 것이라고 말한다.(534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아이들을 논의가 아니라 언젠가 실제로 양육하게 될 경우, 그들이 마치 무리수ἄλογος 길이의 선분들과 같은 상태로 나라의 통치자ἄρχων가 되어 가장 중요한 일들을 주재하는κυρίους 것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질문하고 대답하기를 가능한 한 가장 잘할 줄 아는 자가 되게 만드는’ἐξ ἧς ἐρωτᾶν τε καὶ ἀποκρίνεσθαι ἐπιστημονέστατα οἷοί τ᾽ ἔσονται 교육παιδεία에 그들이 참여하도록 법을 제정할 것을 제안한다.(534d)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자신의 설명이 변증술ἡ διαλεκτικὴ이 마치 갓돌θριγκός처럼 배울 거리들τὰ μαθήματα 위에 놓이고, 이것보다 위에 놓여 마땅한 다른 배울 거리μάθημα는 이제 더 없는 것으로 보이게 했는지를 확인한 후(534e) 배울 거리들에 대한 문제가 드디어 마무리τέλος되었다고 말하고 이제 배울 거리들을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방식τρόπος으로 부여할지를 배정διανομή하는 일이 남아있다고 말한다.(53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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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3c ‘첫 원리archē는 물론 결론teleutē과 그 중간의 것ta metaksy들’ : 변증술적 앎의 총체성은 철학의 총체성이 그러하듯 비록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구체적 개별자들을 하나로 관통하여 존재 세계에 대한 총체적 견지를 가져다주고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개별 존재들 각각의 본질에 대한 원리적인 포착을 가능하게 해준다. 플라톤의 형상은 위계상 최상의 실재 세계를 구성하지만, 철학자 왕에게 그 형상적 앎이 요구되는 근원적인 이유와 목표는 오히려 형상과 무(mē on) 사이에 존재하는, 끝없이 차이를 노정하는 중간의 것들 즉 현실 세계의 인식과 구원에 있다. 즉 형상의 인식은 실천적으로는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변증술을 통해 좋음의 형상을 아는 사람은 마치 전투에서처럼 모든 논박을 헤쳐 나가면서 믿음이 아니라 있음에 의거해서 검토하고자 애를 쓰면서 그 설명을 유지한 채로 현실의 모든 상황을 뚫고 나가는 사람이다.(534c) 변증술이 철학자 왕이 배우고 알아야 할 궁극의 교과인 이유이다.

* 533d ‘이름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 플라톤은 epistēmē와 관련하여 앞서 제5권(474c-480a)과 선분의 비유(509c-513c) 그리고 이곳에서 다소 그 범위를 유연하게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그것을 의식하고 한 말로 보인다. 그런데 본 강해 64에서 살폈듯이 그의 그러한 용어 사용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플라톤 자신 최소한 기하학, 천문학 등 일반 학술technai이 포함하는 dianoia의 학적 수준을 앎이자 지성적 이해로서 일정 부분 평가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해온 논의의 몇 배나 되는 논의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534a)도 인지적 상태들 사이에 성립하는 비례관계가 그 대상들 사이에 성립하는 비례관계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해석을 낳는 부분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이 역시 사고의 대상에 대한 학적인 성격을 일정 부분 인정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강해 64 해당부분 참고)

* 534b 설명을 제시하는 것logon didonai : logon didonai는 플라톤 철학을 설명할 때 핵심적으로 제시되는 용어의 하나이다. 플라톤에게 지성nous을 갖춘다는 것은 특정 입장의 강요나 압박, 선전·선동이 아니라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대화의 방식으로 충분히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 534d ‘무리수 길이의 선분들과 같은 상태로’ : ‘무리수’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alogos’이다. 그것은 logos(정수들의 비율)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비이성적’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일종의 말 유희를 포함하고 있다. 플라톤은 좋음에 대한 설명 또한 이성적 설명을 넘어선 것으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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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증술의 원어 dialektikē는 어원상 ‘대화하다’, ‘토론하다’, ‘끄집어내다’를 의미하는 dialegō에서 파생된 형용사 dialektikos(문답에 능한)의 여성형이다. 그래서 그 말은 명사형으로는 그리스어 사전상 표제어로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이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문답의 기술 즉 he dialektikē technē를 나타내는 하나의 명사 ‘dialektikē’로 사용된 곳은 이곳(532b)이 처음이다. 물론 제논(Zeno of Elea)도 이 말을 문답술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하고 있지만(<단편집> 단편 65) 전거상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고도의 철학적 문답기술로 제시한 것은 플라톤이 처음이다. 이후 철학사를 통해 수많은 철학자들이 쓰고 있는 이른바 ‘변증법’dialetics이라는 이름은 바로 플라톤이 <국가>에서 명명한 이 dialektikē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말 역본에서 dialektikē를 ‘문답법’이 아닌 ‘변증술’로 번역하고 있는 것도 플라톤 고유의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그러한 철학사적 연관도 함께 고려한 것이리라.

* 그러나 dialektikē라는 말이 <국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해서 플라톤의 변증술이 <국가>에 와서야 제시된 철학적 방법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국가>에서 그 변증술을 ‘변증술적 대화dialegesthai에 착수해서 모든 감각을 배제하고 논변을 통해 각각의 있는 것 자체를 향해 나아가, ‘있는 것’인 ‘좋음 자체’를 지성적 이해 자체에 의해 파악하는 것 즉 그 수감자가 가시적인 것의 끝점에 도달하듯이, 가지적인 것의 바로 그 끝점에 도달하는 여정poreia’(532a-b)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증술이 문답의 방법으로 있는 것 자체를 탐구하기 시작해서 지성적 이해를 통해 좋음 자체 즉 좋음의 형상이라는 끝점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 전체임을 말해준다. 이렇게 보면 플라톤의 변증술은 끝점 도달이 핵심이기는 하지만 대화편을 통해 플라톤이 수행하는 진리 탐구의 전 과정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플라톤은 <국가>에서 처음 변증술을 명시적으로 그와 같이 규정한 후 이후의 대화편들 이를테면 <파이드로스>, <소피스트>, <필레보스>, <정치가>에 이르면 이른바 모음(종합)synagē과 나눔(분할)diairesis의 방법을 끌어들여 형상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면서 그 탐문의 과정을 또 ‘변증술’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대화편들에서 거론되는 변증술을 따로 구분하여 ‘후기 변증술’이라고 부른다. 본 강해 중반에서 후기 변증술을 간략히 살펴보겠지만 나눔과 모음을 변증술의 방법으로 처음 제시하고 있는 <파이드로스>는 그 모음을 ‘흩어져 있는 여럿을 이들 모두를 함께 보면서 단일한 형상으로 이끄는 것’으로, 그리고 나눔을 ‘서투른 푸주한처럼 부분 부분을 부숴트리지 않고 형상에 따라 자연적인 마디 그대로 자를 줄 아는 것’으로 정의한다.(265d-266c) 그러나 모음과 나눔의 방법으로서 새롭게 제시된 이른바 후기 변증술이라고 해서 진리 탐구의 전 과정으로서 <국가>의 변증술과 무관하거나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용상 모음과 나눔이라는 표현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 <국가>에서도 형상들의 관계와 위계 그리고 최상의 형상이 다루어지고 있고 내림의 과정에서도 형상들 각각의 진상과 관계가 다시 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동굴의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수감자는 동굴 바깥으로 나와 동굴 바깥 어떤 단일 사물만을 보는 게 아니라 여러 사물들 즉 여러 실재 내지 형상들을 보고 나아가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해와 햇빛을 그 자체로서 본다.(<국가> 516a) 요컨대 동굴 바깥으로 나온 자는 단일 형상으로서 실물을 본 것을 넘어서서 각각의 실물들과 실물들의 복합물로 가득한 지상의 세계 즉 형상들이 결합한 세계는 물론 그 결합의 궁극 원리로서 좋음 자체도 인식한다. 그뿐만 아니라 선분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그러한 과정을 아래와 같이 보다 명시적인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변증술을 통해 “이성 자체가 첫 원리를 포착한 다음 이번에는 이 원리에 의존하고 있는 것들을 고수하면서 다시 결론 쪽으로 내려가되 그 어떤 감각적인 것도 전혀 이용하지 않고 형상들 자체만을 이용하여 이것들을 통해 이것들 속으로 들어가서 형상들에서 또한 끝을 맺는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511b-c) 이 언급은 모음의 방법으로 하나의 유(類)genos를 포착한 다음 나눔의 방법으로 그 유를 종(種)들eidē로 나누되 정의할 부류의 본질적 성질이 드러날 수 있도록 최하종atoma eidē에 이르기까지 나누는 후기 대화편에서의 변증술의 절차와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

* 이렇게 볼 때 플라톤의 변증술은 넓은 의미에서 좋음의 형상에 이르기까지의 참된 앎에 이르는 철학적 문답법으로 규정할 수 있되 그 철학적 문답법이 논의하는 주제와 구체적인 방식에 따라 내용적으로 세 단계의 형태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세 단계는 대체로 플라톤 대화편의 저술 순서에 상응해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플라톤의 대화편은 우연과 편견이 가득한 일상에서 참을 찾기 위한 dialogs 즉 대화에서 출발한다. 그에 따라 특히 <메논>을 비롯한 초기 대화편들은 우선 일상적 믿음과 편견에 대해 비판적 물음을 던지는 방식으로 ti esti 즉 사물과 사태에 대한 ‘정의(定義)’를 근본 주제로 다루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때 그러한 정의를 다루는 과정에서 문답의 방식으로 사용된 것이 이른바 소크라테스의 논박(elenchos)의 방법과 산파술(maieutikē)이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방법들 또한 넒은 의미의 변증술의 하나로서 앞에서 언급한 변증술의 단계별 형태를 기준으로 가장 첫 번째 것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답 끝에 제시되고 있는 마지막 결론은 늘 유보된 상태에서 ‘무지의 지’를 깨닫는 데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점차 이러한 무지의 지에 대한 깨달음은 참된 실재에 대한 앎의 욕구를 다시 촉발시키고 그에 따라 물음은 ‘정의’의 문제를 넘어서서 즉 실재에 대한 탐문으로 이어져 믿음doxa와 구분되는 ‘있는 것 그 자체’to on kath’ hauto‘ 즉 ’형상‘에 대한 앎epistēmē이 보다 진전된 철학적 문답법의 주제로서 탐색되기에 이른다. <국가>의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를 보면 일상의 대화에서 시작한 이러한 탐문의 과정이 앎을 향한 오름길anodos의 모습으로 잘 그려져 있다. 그래서 그 단계의 오름길에서는 어떤 한 부류의 사물들과 하나의 어떤 이데아 내지 형상이 맺고 있는 관계가 논의의 주제를 이루면서 이른바 methesis, parousia, koinōnia라는 용어가 그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것은 초기대화편에서 제기된 ti esti의 물음이 ’무지의 지‘에 대한 깨달음을 넘어서 사물들에 분유된 실재의 흔적을 추적하여 종국에는 그 실재 자체를 적극적으로 발견하려는 탐문으로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파이돈>, <국가> 등 중기 대화편의 주제가 그에 해당하는데 우선 <국가>만 보더라도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를 통해 그러한 실재 내지 참된 앎의 조건과 성격 그리고 그 대상을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특히 <파이돈>에서는 거짓을 폭로하는 논박을 뛰어넘어 참된 앎과 실재로 육박하려는 플라톤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방법으로서 이른바 ‘가정hypothesis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99c-100a) 플라톤은 그곳에서 영혼 불멸을 증명하는 차선의 방법으로 가장 강하다고 판단되는 명제를 가정한 다음 그야말로 정립과 반정립의 방식으로 참에 가까운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보다 상위의 가정에로 끊임없이 고양시켜 그렇게 이른 최선의 원리를 가정하여 그것을 근거로 답을 제시한다. 이것은 <국가>에서 가정들을 끊임없이 제거하면서 첫 원리로 다가가려는 이성 자체의 문답법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점에서 가정의 방법 또한 변증술의 한 형태로 앞서 언급한 단계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변증술의 이 두 번째 형태를 동굴의 비유를 빌려 끝점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언급한다. 즉 플라톤은 그것을 동굴 속 결박으로부터 풀려나기, 그림자들 쪽에서 영상들과 빛 쪽을 향해 방향을 바꾸기, 동굴에서 나와 태양까지 올라가기, 있는 것들의 그림자와 물에 비친 신적인 상들을 보기 등으로 요약한 후 그것을 ‘수학과 기하학 등 예비 기술들technai이 영혼의 전환을 함께 돕는 조력자(533d)로서 수행한 작업’he pragmateia이자 바로 그 끝점 즉 있는 것 중 가장 훌륭한 좋음의 형상에로 끌어 올리는 힘dynamis을 가진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532c).

* 그러나 플라톤은 개별 실재들에 대한 앎에 도달한 것을 넘어 그 실재들 즉 형상들의 결합과 그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영혼의 힘을 더욱 고양시켜 마침내 그러한 관계를 지배하는 종국의 원리를 포착한 후 그것을 통해 그러한 형상들의 결합 즉 존재 세계를 해명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앞서 간략하게 언급한 후기 대화편들에서 제시되고 있는 모음과 나눔의 방법으로서 후기 변증술 즉 변증술의 단계별 형태상 세 번째 것이다. 이 단계에서도 methesis, parousia, koinōnia란 말이 나오는데 이때 그 말은 사물과 형상 간의 관계가 아닌 형상들 상호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이러한 후기 변증술이 비록 후기 대화편들에 와서 구체적인 형태로 제기되었다고 해도 그 변증술의 기본 목표와 전체구도 및 지향은 그 이전 대화편에서도 일정 부분 이미 제기되어 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앞서도 간략히 살폈지만 <국가>의 동굴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는 비록 후기 변증술의 모음과 나눔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을지라도 내용적으로 형상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 세계 해명을 위해 변증술이 수행하는 오름과 내림의 과정을 큰 그림을 그리는 차원에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 이러한 사실은 플라톤이 변증술을 다루면서 사용하는 용어들만 추적해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이 변증술을 규정하면서 그 말을 dialektikē라는 명사형으로 표현하고 있는 곳은 이곳 <국가>가 처음이다. 그러나 <국가>에서 조차 그 말은 532b, 536d 두 군데 정도에서 사용할 뿐, 변증술을 거론할 때면 주로 상용어인 dialektikos(변증술에 능한)와 dialegesthai(변증술적 대화, dialegō의 중간태 현재 부정사. 중간태는 동사가 의미하는 행동이 자신에게 미치는 경우 쓰이는 그리스어 특유의 변화형)을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국가>에서는 변증술을 나타내는 말로 dialegesthai가 훨씬 많이 사용되고 있고(511b, 511c, 525d, 532a, 532d, 533a, 537d, 537e, 539c) 같은 용도로 dialektikos란 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에우튀데모스> 290c, <국가> 531d, 534b, <정치가> 285d). 그에 따라 그 말들은 이른바 후기 변증술을 본격적인 주제로 포함하고 있는 대화편들 즉 <파이드로스>, <소피스트>, <필레보스>, <정치가>에서도 변증술을 거론할 때마다 그 말들은 너무나 당연하듯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말들은 그곳에서만이 아니라 쟁론술과 대비되는 철학적 문답법을 나타내는 말로 이미 <국가> 이전부터 사용되어왔다는 점이다. 물론 그 말들은 상용어라는 점에서 꼭 변증술적 문답의 의미로만 쓰인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메논>에서도 dilektikos가 ‘진리를 답하는 것뿐만 아니라 묻는 사람이 안다고 인정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답하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고(75d) <크라튈로스>에서도 변증술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크라튈로스>에서는 입법가의 일을 잘 감시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dialektikos’변증술에 능한 사람’이 언급되고 있고(389d) <프로타고라스>에서도 소크라테스와 대화자들 사이에서 dialegesthai가 철학적 문답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335a, 336c) 그리고 중기 대화편이기는 하지만 <테아이테토스>에서도 <필레보스>(17a)에서처럼 dialegesthai가 쟁론술eristikē와 구분되는 진정한 철학의 방법임이 강조되고 있다.(167e) 하물며 <필레보스>에는 분명 변증술을 다루는 국면임이 분명함에도 변증술 관련 용어로는 부사형 dialektikōs만 발견되는 곳(17a)도 있다. 서양 역본은 물론 우리말 역본에서 ‘dialectics’, ‘변증술’이란 단어가 수없이 등장함에도 정작 그것의 원어가 꼭 dialektikē가 아닌 이유도, 그리고 변증술 관련 원어 색인에 dialektikē만이 아니라 dialektikos, dialegesthai가 병기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변증술을 해명할 때 최소한 dialektikē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국가> 이후의 논의에 한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 그럼에도 변증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경우 초기나 중기 대화편에서의 문답법보다는 변증술이 명시적으로 명명된 <국가>와 그 이후의 대화편들 즉 모음과 나눔의 방법으로서 후기 변증술을 다루고 있는 <파이드로스>, <소피스트>, <필레보스>, <정치가> 등의 논의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파이드로스>(266b), <필레보스>(16b)에선 ‘변증술이 가장 바람직한 철학적 방법’임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언명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국가> 이후 대화편들 모두에서도 이른바 후기 변증술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논의 주제의 하나로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그 대화편들 모두 변증술과 관련하여 주제적으로 변증술을 나눔(diairesis)과 모음(종합, synagogē)의 방법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국가>에서 언급된 변증술을 다루는 것이 본 강해의 초점이기는 하지만 플라톤의 변증술 일반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위해서 <국가> 이후에 제시된 이른바 후기 변증술을 살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그 기본 개요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 우선 <파이드로스>의 경우는 ‘변증술에 능한 자’dialektikos’를 ‘하나를 그리고 여럿을 볼 수 있는 자’라고 부르고 광기(mania)를 예로 들어 바로 나눔과 모음에 의해 그 구분이 가능함을 설명한다. 즉 모음이란 앞서 인용한 대로 ‘흩어져 있는 여럿을 이들 모두를 함께 보면서 단일한 형상으로 이끄는 것’이되 그 목적은 각각을 규정하면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항상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눔이란 형상들의 결합 관계를 하나로 꿰뚫은 다음 그것에 따라 개별 형상들을 본래의 자연적인 마디 그대로 자를 줄 아는 것으로 정의된다.(265d-266c) 그리고 <소피스트>는 변증술적 앎을 ‘유에 따라서 분리하고 동일한 형상을 다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다른 형상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이 앎을 행할 수 있는 자는 하나의 형상이 많은 – 각각 하나가 따로 떨어져 놓여 있는 – 것들을 관통하여 모든 곳에 퍼져 있음을 그리고 서로 다른 많은 형상들이 하나의 형상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둘러싸여 있음을 분명하게 지각한다. 또 그는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형상이 다른 많은 전체들을 관통하여 하나 속에서 합쳐 있음을 그리고 많은 형상들이 전적으로 분리되어 구별돼 있음을 분명하게 지각한다. 즉 이것이, 그것들 각각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고 또 그럴 수 없는지를 유에 따라서 분리할 줄 안다’고 말한다.(253d-e) 그리고 <필레보스>에서도 모음과 나눔의 방법으로서 이를테면 에로스, 소피스트. 정치가 등을 정의하는 데 변증술이 활용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 변증술은 무엇보다도 어떤 하나의 유genos와 무수한 것들의 중간에 있는 종들eidē이 얼마나 되는지를 밝혀내는 방법임도 새삼 강조된다.(16d-17a) 즉 중간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아는 것 또한 그 분야에 밝은 사람이라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다. 이곳 <국가> 533c에서 첫 원리, 결론과 더불어 변증술적 앎의 대상의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 ‘중간의 것들ta metaksy도 위에서 언급한 중간에 있는 것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게 보면 변증술은 인간의 정신이 실재를 파악하고자 할 때 이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밟을 수밖에 없는 사유의 통로로서 제안된 것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변증술은 플라톤의 실재에 관한 탐문과정에서 부분들로부터 그 부분이 속해 있는 전체에 관한 관심으로 또는 전체 속에서의 부분들의 위치로 관심이 이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볼 수 있다.

* 그러나 이와 관련한 주제들과 논의들은 이미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세부적인 분석은 물론 그것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전개되어 왔다는 점에서 본 강해에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본 강해는 철학적 문답법으로서 <국가>가 다루고 있는 dialektikē의 기본적인 의미와 후기 변증술에 관한 논의들을 최대한 간명하게 살펴보고 추가적인 관심이 있는 독자들을 위하여 해당 대화편들에서 변증술이 다루어진 주요 부분과, 그것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관련 논문들 몇 개를 소개하는 것에 머물고자 한다. 논문들의 경우 국회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에서 제목들을 검색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텍스트의 경우는 원문 역본을 참고해야만 기본적인 학술적 이해가 가능하다.

* <국가> 이후 변증술이 다루어진 주요 전거들 : <파이드로스> 265a-266d, 276e-277c, <소피스트> 252c-259d, 264c-268d, <필레보스> 16a-18d, 55c-59d, <정치가> 260a-263b, 285a-287c, 303d.

* 변증술 관련 우리나라 학자들의 주요 논문들 : 플라톤의 dialektikē와 측정술(박종현), 플라톤의 전기 변증론 연구(김남두), 플라톤의 <필레보스>편을 통해 본 변증술의 성격과 쓰임새(이기백), 플라톤의 후기 변증술 연구(김대오), <소피스트>를 중심으로 한 플라톤 존재론과 변증법 개념(김혜경), 플라톤의 <소피스태스>편에서 변증술과 존재론(김태경), 플라톤의 후기 변증술(김태경), 플라톤의 <정치가>에서 정치술과 변증술의 관계(이성훈) 등.

* 위의 모든 논의들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1) 플라톤은 <국가>에서 변증술을 ‘가정들을 제거하고 모든 앎의 궁극의 기초이자 첫 원리로서 좋음의 형상을 인식하는 기술’로 명시적으로 처음 규정하고 있다. 2) 그러나 문답을 통한 참된 앎의 탐문과정 일반으로서 넓은 의미의 변증술은 이미 대화편 초기부터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방법으로 제시되어왔다. 3) <국가>는 사물과 실재 관계 차원에서 실재에 대한 앎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것을 넘어 형상들의 결합 관계에 대한 견해 또한 큰 그림 차원에서 표명하고 있다. 4) 이른바 <국가> 이후 후기 변증술이란 이러한 <국가>의 변증술의 큰 그림을 토대로 유와 종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현실 존재 세계에 대한 앎에 점진적으로 접근하려는 실제적인 목표를 갖고 제시된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변증술은 여럿을 꿰뚫고 있는 하나로서 최종적 진실인 ‘좋음의 형상’을 포착하고 그것을 토대로 현실 세계 여럿의 본질을 규명해내는 즉 존재 세계 전체에 대한 진실을 최대한 명백하게 밝혀내는 철학 방법이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국가>에서 표명된 ‘좋음의 형상’은 존재 세계를 구성하는 여럿들 각각의 저다움과 그것들의 선하고 조화로운 하나됨을 담보하는 궁극의 원리로서 변증술의 궁극의 목표가 된다.

* 그러나 전체 개별과학에 통달한 신적 존재나 만물 박사라면 모를까 존재 세계 전체에 대한 진실을 하나하나에서부터 원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플라톤의 변증술을 근대 이후 철학과 개별과학의 관계와 관련하여 제시된 철학에 관한 정의들과 연관지어 음미한다면 철학적 방법론의 고전적 시원으로서 플라톤의 변증술이 갖고 있는 의미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철학의 정의로서 두 가지 정도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철학은 여러 개별과학의 기본 개념을 명확하게 하며 서로 다른 개별과학들의 성과를 종합하여 존재 세계에 대한 하나의 종합적인 관점을 갖게 하는 원리적 지식이다”(B. Russell). “철학은 특수과학에서 얻은 인식을 모순 없는 체계로 통일하여 과학에서 사용되는 인식의 방법과 전제들을 그 통일된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보편학”(W. Wundt)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변증술은 세계에 대한 총체적 앎을 추구하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철학적 방법론의 이상적 푯대이자 끝없는 질문을 통해 명명백백한 앎을 추구하는 철학 정신의 토대이다. 그리고 좁은 의미의 변증술의 기본 방법으로서 모음(여럿에서 그것을 꿰뚫고 있는 하나를 포착하는 것)과 나눔(하나로부터 그것이 꿰뚫고 있는 여럿을 구분해내는 것)의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형식논리적 귀납법과 연역법을 넘어 치열한 문답 과정을 통해, 추상적 개념들이 아닌 존재 세계의 실상으로서 형상들의 결합 관계를 해명하는 실질적인 연역과 귀납 능력으로서 철학적 분석과 종합의 토대가 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정치가로서 철학자왕에게 요구되는 측정술metrētikē과 직조술hypanitiē 또한 지행합일의 관점에서 이러한 변증술적 앎을 포착한 후 그것을 토대로 온갖 양상으로 뒤섞여 있는 이른바 현실세계 중간의 것들을 적도(to metron)에 따라 분별 있게 헤아리고 상호 반대적인 것조차 하나로 묶어내는 고도의 실천기술이자 이상적 정치술이라 할 것이다. 이곳에서 철학자왕이 배워야 할 지고의 배울 거리로 변증술이 제시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정치를 바로하기 위함이다.

* 한편 흥미롭게도 크세노폰(Xenophon)의 <소크라테스의 회상>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dialegesthai란 말은 모여서 종에 따라 사물들을 분류하고 의논하는 것에서 나왔다고 말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4권 5장 12절) 이때 dialegesthai의 의미를 단순히 ‘대화하다’로 옮길 경우 뭔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오히려 앞의 논의와 연관하여 생각하면 그 말은 ‘변증술적 문답’으로 옮기는 것이 딱 맞아 보인다. 크세노폰이 인용한 내용이 정말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라면 이것은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후기의 플라톤 사이에 최소한 dialegesthai의 의미와 관련해선 별다른 견해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지엽적이나마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무지의 지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흥미를 끈다.

* 끝으로 플라톤 철학에서 대화와 문답의 방법으로서 변증술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것으로 논의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dialektikē와 dialegesthai, dialektikos는 모두 동사 dialegō에서 나온 말로서 각기 어원상 ‘문답을 나누다’, ‘토론하다’, ‘끄집어내다’, ‘문답에 능하다’ 등을 나타내는 일상적 상용구로 쓰이다가 플라톤에 이르러 명실 공히 플라톤 철학의 방법론 즉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며 진리 내지 해결책을 구해가는 절차 또는 과정’으로 확립된 말이다. 물론 이러한 말들은 점차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방법론으로 구체화되어 가지만, 나중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플라톤 철학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dialektikē의 근본정신 즉 그것이 원천적으로 dialegein, dialogos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갖는 철학적 의미와 가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근본정신을 풀어서 말하자면 곧 1) 대화dialogos라는 가장 기초적이고 일상적인 상황에서 시작하여 일단의 의문을 제시한 후 그 답을 끌어내고 2) 다시 한 발짝 더 나가 그 답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다시 또 그에 대한 답을 내놓으면서 3) 갈수록 고도화되는 추상적 논변까지도 감내해가며 4) 끝내 ‘모두가 진리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답이 나올 때까지 치열하게 질문을 던지고 끝내 설명이 가능한 대답을 내놓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dialektikē가 철학 정신의 빛나는 토대이자 이념적 시원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훗날 테제와 반테제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모순 극복의 논변을 상호지양의 형식으로 끝까지 끌어올려 존재 세계의 기초를 해명하려는 일련의 세계관 철학을 왜 ‘변증법’(dialectics)라 부르는지, 그리고 인간이 다가설 수 있는 지적 궁리의 궁극적인 정점에서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불현 듯eksaiphnēs’(<일곱번째 편지> 341c-d) 직관으로 마주하는 진리의 빛이 왜 불가불 형이상학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도 그리고 그럼에도 왜 설명력을 갖는지도 이미 플라톤의 dialektikē가 함축하고 있는 근본정신을 통해 해명되고 있다할 것이다.

* ‘참고로 dialektikē, dialegesthai가 복수의 사람들 또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 또는 토론의 의미를 갖지만 플라톤 말대로 영혼이 영혼 자신과 나누는 말 또한 대화인 한(<테아이테토스> 189e, <소피스트> 264a-b) 개인이 치열한 내면의 사색을 통해 궁극의 진리를 직관하는 것 또한 진리 탐구의 치열한 과정으로서 dialektikē의 극치에서 충분히 주어질 수 있는 일이다. 533a에서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에게 비록 문답을 통해 이어져 온 진리 탐색의 과정임에도 이제 더 이상 따라올 수 없다(533a)고 말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하나의 화두를 두고 치열한 사색과 명상을 통해 끝내 돈오(頓悟)에 이르는 불가의 견성론도 방법론적으로는 dialektikē와 일정부분 상통한다 할 것이다. 종종 우리는 플라톤 철학 내지 그의 형이상학적 논변이 갖는 독단주의(dogmatism)을 비판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지적 역량을 총동원해 더 이상 의문을 던지기 힘들 정도의 수준까지 치열하게 끌고 가는 그 변증술적 문답의 과정 자체가 그것의 뿌리에 자리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 철학이 독단의 철학 이전에 끊임없는 질문의 철학, 의심의 철학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섣부른 답도 문제이지만 답을 내놓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플라톤이 내놓는 답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궁극에 이를 정도의 모든 의문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 궁극의 답마저 직관적 진리란 이름으로 궁극의 끝점이되 실제로는 끝없이 물러서는  끝점으로 마치 철학이 늘 길 위에 있듯이(auf dem Wege) 설명을 부대(附帶)하면서 그 진리성을 끝없이 충전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입장이나 주제를 가지고 치열하게 묻고 또 물으며 설명이 가능한 최선의 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플라톤의 변증술의 기본 정신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이 의심이라면 플라톤 철학은 그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철학적 토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우리가 법제화하여야 할 교육의 목표를 아래와 같이 제안하고 있다. 교육paideia은 ’무엇보다도 질문하고 대답하기를 가능한 한 가장 잘할 줄 아는 자를 만드는 일‘이다.(534d) -끝-

 

다음 주제 :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영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3) 교과목들의 대상과 부과 방법, 시기와 구체적 프로그램(535a-54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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