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42-제논의 오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2-제논의 오류
1)
양적인 것의 개념은 우리를 항상 혼란에 빠지게 한다. 왜냐하면, 그 양적인 개념은 일자와 원자 그리고 공허라는 개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철학과에 처음 들어와 그리스 철학사를 배울 때,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라는 개념까지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개념에서 ‘존재는 있고 무가 없다’라는 주장이나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이고, 여럿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부동하고 운동이란 없다’는 주장은 의외에도 쉽게 이해됐다. 논리적으로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1년생이었던 당시 상식과 전혀 다른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듣고 황홀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당혹했던 것은 원자론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원자론자가 주장하는 원자라든가 공허라는 개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서 무수한 여럿이 존재하고 부단히 운동하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원자나 공허를 도입했다는 것까지도 이해됐는데, 이런 것은 논리적으로는 후퇴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에서 황홀감을 느꼈던 필자로서는 현실을 위해 논리를 후퇴시킨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철학자가 논리에 관해 타협한다니, 그것은 아직 어렸던 필자의 가슴에서는 마치 정조를 잃는 듯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 뒤 대학에서 시간 강사가 되어 처음으로 그리스 철학사를 가르치면서 원자론자를 설명할 때마다 무언가 얼버무리는 듯한 느낌 때문에, 강의하면서도 스스로 의혹에 빠져들었다. 강의의 톤이 떨어지고 왠지 학생들이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는 나를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뒤 늘 머리에 떠나지 않는 의문이 이것이다. 왜, 우리는 원자론자의 타협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2)
다와 운동의 문제는 그 뒤 필자를 자주 괴롭혔던 문제다. 이 자리에서는 일단 운동에 관한 논의는 제쳐 두자. 여기서는 주로 다의 문제만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다의 문제가 다시 필자를 괴롭히게 된 것은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에서 언급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에 관한 언급 때문이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동일률을 제시하면서, 하나의 성질이라도 다르면 서로 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원리에 따라서 동일한 성질을 지닌 것은 여럿으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하나만이 존재할 뿐이라 했다. 모든 것은 고유한 모나드(일자)며 이 모나드는 서로 성질이 다르므로 이 세상에는 서로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는 원자론자를 계승한다.
칸트가 라이프니츠의 이 주장을 반박하면서 물방울을 예로 들면서 어떤 동일한 것이 시공간에서 차이 때문에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일한 것이 여럿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칸트가 여기서 다루었던 반성 개념은 물론 ‘동일성과 차이’라는 대립 개념만은 아니다. 그는 그 외에도 세 가지 반성 개념을 추가했는데-일치와 모순, 형식과 질료라는 대립 개념이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나머지는 제쳐 놓고 여기서는 동일성과 차이만을 논하자.) 그에게서 핵심은 여럿은 주관적 차이에 불과하고 실상 같은 것이라 존재한다는 주장이 된다. 그는 다시 파르메니데스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시공간이 사물의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시공간은 칸트에서는 주관의 선험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공간을 칸트처럼 주관의 형식으로 받아들인다면, 풀리지 않는 많은 문제가 제시될 것이다. 칸트처럼 하면 시공간은 등질적인 하나의 시공간이어야 하는데, 실제 세상에는 질적으로 차이 있는 다양한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당혹하게 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원자론자과 닮았다. 다만 원자론자가 원자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오직 질적 차이만 존재한다. 칸트는 같은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같은 것은 하나로 합쳐지니 파르메니데스적 입장에 가깝다. 물론 그에게 같은 것은 이미 특정한 어떤 것 즉 물방울이나 나뭇잎인 한에서다. 그들의 이론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근본적으로는 파르메니데스와 원자론자라는 두 흐름에 닿아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러 물방울이 있고 여러 나뭇잎이 있는데 라이프니츠처럼 하나의 존재를 부정하기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칸트처럼 여럿의 차이를 단순히 주관적 차이로만 여길 수도 없다.
3)
여기서 제논의 역설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논은 역설을 통해 여럿의 존재를 부정하고 파르메니데스의 유일한 하나를 옹호했다. 제논은 일 여럿을 전제로 한다면,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르지 못한다는 역설이 나온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여럿은 없고 오직 하나만 있다고 했다.
제논의 논증은 많은 관점에서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논증을 그가 사용한 트로포스(논증의 형식)에서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트로포스는 가설이 경험과 배치된다는 데에 있다. 즉 그에게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른다는 경험은 이미 진지로 전제돼 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 역설이 하나와 연속성만이 존재한다고 할 때 이미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와 연속성만이 존재한다면, 실제로 이 세상에 여럿이 존재한다는 경험 즉 여러 물발울이 존재하고 여러 나뭇잎이 존재한다는 경험과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원자론자가 먼저 그런 트로포스를 사용해 여럿의 존재를 주장하지 않았던가?
경험과 배치된다는 것을 트로포스로 삼는다면, 모순된 주장이 동시에 입증되니, 이 트로포스는 증명의 원리가 되지 못한다. 제논이나 원자론자는 동시에 잘못된 증명 원리에 기초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원자론자가 틀렸다면 마찬가지로 제논도 틀렸다.
4)
철학사에서 부딪히는 하나와 여럿의 문제에 관해 당혹한 경험을 했던 필자로서는 헤겔의 제시하는 양적인 것의 개념에서 이런 여럿의 문제를 해결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헤겔의 논리학이 가지는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헤겔에게서 양적인 것의 토대는 대자 존재다. 이 대자 존재는 어디까지나 두 개 이상의 일반적 성질이 관계하면서 일정한 지속성을 지니는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초에(또는 세계의 종말에 이르러) 개별적 성질이 무차별적으로 존재하면서 명멸할 때는 양적인 것은 없었다.
이 세상에 두 개 이상의 성질이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 이때 대자 존재가 출현한다. 이 대자 존재는 통일된 것이니 하나다. 대자 존재는 통일성 즉 관계를 의미한다. 그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매번 존재하는 관계는 개별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자 존재는 동시에 개별자다. 대자 존재는 하나이면서 개별자이니, 곧 원자가 된다. 또는 라이프니츠처럼 모나드(단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자 존재가 개별자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대자 존재가 여럿이라는 말을 함축한다. 개별자가 개별자만 있는 것은 우연일 뿐이다. 개별자는 이미 내적으로 여럿임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남녀가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요즘 혼자지만, 혼자인 것은 우연이고 아이가 여럿인 것은 필연적이다. 그 필연성은 우연 때문에 실현되지 않더라도 혼자인 것이 필연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개별자는 여럿이라는 것은 개별자의 본성에 내재하는 필연성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경우 파르메니데스의 ‘유일한 하나’ 개념을 부정하고 ‘여러 하나’라는 원자론자의 입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5)
대자 존재 자체는 양적인 것이 아니다. 대자 존재가 다른 대자 존재와 관계하게 되면서 양적인 것이 출현한다. 대자 존재는 서로 동일한 것이니 이것이 서로 관계한다면 연속적이어서 어떤 구분이 없다. 그러나 이런 연속 속에서도 각 대자 존재는 개별자니, 그것들은 서로 다른 것이며 그런 점에서 각 대자 존재는 서로 반발한다.
대자 존재가 다른 대자 존재에 대해 이처럼 연속과 반발이라는 이중적 관계, 서로 동일하면서도 다른 개별자라는 이중성 때문에 양적인 것이 출현한다. 양적인 것이 출현하면 동시에 공허가 출현하게 된다.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 사이의 연속성의 측면을 말한다. 그 이면은 서로의 반발이다. 반면 공허는 대자 존재 사이의 상호 반발하는 관계를 말한다. 그런 공허의 이면이 대자 존재 사이의 연속성이다. 양적인 것과 공허는 항상 동전의 양면으로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결합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원자론자가 원자를 상정한 이상, 그것들 사이에 연속성과 반발이라는 관계가 성립할 수밖에 없으니, 원자로부터 양적인 것이 출현하며 그와 동시에 공간이 출현한다. 이렇게 ‘하나(일자)’, ‘원자’, ‘공간’라는 개념은 상호 공속하는 개념이다.
세상에는 파르메니데스처럼 유일한 하나 또는 연속성만 있다고 볼 수도 없고 원자론자 처럼 여러 하나가 있고, 그들에 단절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나의 여럿, 연속성과 단절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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