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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1]

Max Stirner’s Philosophy Is Actually Worth Reading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은 실제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 ① –

 

이 글은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 1874~1960)의 글을 2024년에 훔볼트 대학교 사회비판센터 연구원 야콥 블루멘펠트(Jacob Blumenfeld)가 영역하고 이것을 다시 우리 말로 옮기면서 옮긴이가 주석을 단 것입니다.

 

옮긴이 박종성(한철연 회원)

 

주로 막스 슈티르너는 칼 마르크스가 조롱한 “허무주의자”(nihilist)로 기억된다. 그러나 독일 사회주의자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가 새롭게 해석한 기사(記事)에서는 슈티르너의 자기해방 철학이 노동계급 운동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주장합니다.

 

  • 옮긴이 서문

 

노동계급에게는 철학이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어떤 철학이 필요합니까? 아마도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가 1897년에 제시한 답변보다 더 충격적인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노동계급에게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철학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이어야 합니다.

유명한 아나키스트이자 허무주의자인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Proletarian) 철학입니까? 이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 만약 슈티르너의 철학이 단순히 아나키스트이자 허무주의자라고 가정한다면 말입니다. 슈티르너의 사상에 대한 그와 같은 어리석은 묘사는 1844년 그의 책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The Unique and its Property, 종종 The Ego and its Own으로 잘못 번역됨)이 출판된 이래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에는 조금의 진실도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슈티르너를 칼 마르크스를 돋보이게 하는 부정적인 사람(negative foil)이나 프리드리히 니체와의 긍정적인 유사함positive analogy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슈티르너를 슈티르너 그 자체로 읽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를 전유하는(appropriating) 아나키스트와 그를 비난하는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에 끼인 슈티르너는 숨을 쉴 틈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슈티르너를 나쁜 헤겔주의자나 좋은 니체주의자로 읽기보다는, 현대 사회에 대한 원대한 비판자, 우상과 정체성의 무자비한 파괴자, 애국심의 진부한 이야기, 윤리의 본질, 종교의 의식(儀式), 성별의 우상, 그리고 국적의 규범을 경멸한 사상가로서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막스 슈티르너는 현대 사회에 대한 원대한 비판가이자

우상과 정체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사람이었습니다.”

 

슈티르너는 개인이 자발적 연합(voluntary associations)에서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여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 즉 자유로움을 성취함으로써 고정된 교리와 신성한 관습으로부터 개인의 자기해방(self-liberation)[2]을 옹호했습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 타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자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투쟁은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필요와 욕구로부터 시작해야,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대의(cause), 국가의 대의, 인민(people)의 대의를 위해 싸우지 말고 ―자신, 자기 자신의 대의를 위해 싸우십시오.[3] 이런 대의는 유용성의 극대화, 부의 획득 또는 기쁨의 추구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대의는 각 개인이 자신의 변화하는 삶 전반에 걸쳐 추구하며,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도달하며, 항상 새롭게 노력하는 가지각색의(a multiplicity of) 비교할 수 없는 목적을 지칭합니다.[4]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엥겔스가 언급했듯이 자기중심성(egoism)은 즉시 공산주의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in common), 우리 자신을 위해, 기쁨과 연대로 싸우는 힘 없이는 자기 자신의 삶을 전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통찰은 여러 시대에 걸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으로, 1897년 7월에 『사회주의 월간지』(Sozialistische Monatshefte)에 실린 헤르만 둔커의 이 짧고 낙관적인 글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어 처음으로 영문으로 번역했습니다.

헤르만 둔커의 책 『menschheits-gedichte』[5]

 

둔커는 독일 사회주의 역사에서 매우 인상에 남는 인물입니다. 파산한 함부르크(Hamburg) 상인의 아들로 1874년에 태어난 둔커 가족은 괴팅겐(Göttingen)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헤르만이 고등학교를 다녔고, 어머니의 손에 자랐습니다. 헤르만은 어머니가 키우는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1897년 이 글을 쓸 당시 그는 23세에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SPD) 당원이었으며 라이프치히에서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 카를 뷔허(Karl Bücher), 카를 람프레히트(Karl Lamprecht) 밑에서 정치경제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음악 학위를 막 마친 상태였습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in her own right 뛰어난 사회주의자인 케테 둔커(Käte Duncker(née Döll))와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사회주의자를 주제로 강연을 다니며 여행했고,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사회민주당을 탈당하여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6],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7],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8]과 함께 스파르타쿠스 동맹(Spartacist League)[9] 설립에 힘을 보탰고 결국 독일공산당(Communist Party of Germany/KPD)[10] 창당에 힘을 보탰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독일공산당의 초대 중앙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헤르만은 1925년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학교를 설립하고 사회민주당과의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독일공산당의 첫 번째 중앙위원이었습니다. 헤르만은 1925년에 마르크스주의자 노동자 학교를 설립하고 사회민주당과의 공동전선에 계속 헌신했습니다. 나치Nazi[11] 통치 기간 동안, 케테는 미국으로 탈출했고, 헤르만은 덴마크, 영국, 프랑스, 모로코를 거쳐, 결국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은 동독으로 돌아와 독일사회주의통일당(the Socialist Unity Party/SED)[12]에 가입했고, 헤르만은 로스토크(Rostock 대학교)[13]에서 [학생을] 가르치다가, 결국 자유독일 노동조합연맹(the German Trade Federation/FDGB)[14]의 수장가 됐습니다. 그는 1960년에 세상을 떠났고,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기념하는 사회주의자 기념관 옆에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펠데(Friedrichsfelde)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정의”와 “권리”와 같은 단어가 좌파의 담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아래 기사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슈티르너의 글을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 그의 사상이 노동계급(working class)에게 영감을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마침내 우리 자신의 대의(大義)보다 더 높은 대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독단에서 사회주의자들을 깨어나게 할 것입니다. 둔커는 슈티르너를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그들 자신과 그들 자신의 필요를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노동자가 스스로(for themselves)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은 사회적 해방을 위한 기본적 전제조건입니다. 둔커가 이 글의 주석에서 지적했듯이, 슈티르너의 “주요 철학적 작품은 레클람(Reklam) 판(版)에서 80페니히(pfennig)[15]에 구입할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작품 자체를 토대로 그의 혹은 그녀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노동이 자신을 얼마나 타락시키는지를 노동자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학”(philosophy of the proletariat)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해방을 가로막는 이념적 장벽을 일부 제거하는 것이지만, 결코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학은 그 일 자체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그러한 해방을 원하고, 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무거운 짐(burden)입니다.


[1]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독일 노동자 교육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원이었으며 나중에는 독일공산주의자의 일원이었습니다. 옮긴이 야콥 블루멘펠트(Jacob Blumenfeld)는 『나에게 모든 대의(大義)는 무(無)이다 : 슈티르너의 유일자 철학』(All Things Are Nothing to Me: The Unique Philosophy of Max Stirner)의 저자입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s://jacobin.com/2024/02/max-stirner-proletariat-philosophy-duncker  – 나(옮긴이)는 이 글과 연결되는 내용을 내가 번역한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로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모든 주석은 옮긴이의 주석이다. –

[2] “여기에 자기해방과 해방279(Emanzipation)(자유롭게 방면함, 자유롭게 놓아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주석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 2쇄)[이하 『유일자와 그의 소유』로 표기] 262쪽. 그리고 261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3] “신과 인류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의 근거를 자기 이외에 아무것에도 두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의 근거를 바로 신처럼 다른 모든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나, 나의 전부인 나, 유일자(Einzige)인 나, 나 자신 이외에 아무것에도 두지 않는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11-12쪽.

[4] “실제로 나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며, 유일한 사람이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218쪽.

[5] 헤르만 둔커의 책 『menschheits-gedichte』에는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의 잊을 수 없는 웅변가였던 헤르만둔커가 자신의 펜으로 쓴 시를 통해 자신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각과 감정을 시로 표현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주요 주제는 무엇보다도 형제애와 연대 속에서 전쟁 없는 인간적인 삶에 대한 관심, 즉 인류를 위한 시였습니다! 선별된 시들은 노동 운동 대열에서 지칠 줄 모르는 교육 활동과 파란만장한 삶의 흔적을 따라갑니다. 그는 파시스트 독일에서 배척당했습니다. 1933년 스판다우(Spandau)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에 투옥된 후 수년간 지구 반대편으로 추방되었습니다.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는 베르나우 노동조합 대학의 총장으로서 동독의 사회주의적 변화의 시작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편집자 Dr. Dr. 젊은 대학을 졸업한 독일 하인츠는 1950년대 말 직원으로서 아주 늙은이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In diesem Buch kommt Hermann Duncker (1874 bis 1960), der unvergessene, wortgewandte Lehrer in der sozialistischen Arbeiterbewegung, mit Gedichten aus seiner Feder zu Wort. Er hatte ein ausgepragtes Bedurfnis, Gedanken und Gefuhle inVersen auszudrucken. Seine großen Themen waren vor allem die Sorge um ein menschenwurdiges Leben ohne Krieg in Bruderlichkeit und Solidaritat – Menschheitsgedichte! Die ausgewahlten Gedichte folgen den Spuren seiner unermudlichen Bildungsarbeit in den Reihen der Arbeiterbewegung und seines bewegten Lebens. Im faschistischen Deutschland war er verfemt. Der Haft in Spandau und Brandenburg 1933 folgten Jahre des Exils uber den halben Erdball. Hermann Duncker schatzte sich glucklich, als Rektor der Gewerkschaftshochschule in Bernau denBeginn der sozialistischen Umgestaltungen in der DDR noch miterleben zu konnen. Der Herausgeber, Prof. Dr. Heinz Deutschland, durfte als junger Hochschulabsolvent dem Hochbetagten Ende der funfziger Jahre als Mitarbeiter hilfreich zur Seite stehen).

[6] 로자 룩셈부르크(독일어: Rosa Luxemburg, 문화어: 로자 룩셈부르그, 1871년 3월 5일 ~ 1919년 1월 15일)는 폴란드 출신의 독일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이며 사회주의자, 철학자 또는 혁명가이며, 레닌주의 비판자이다.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이후의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사회 민주주의 이론가였다. 그녀는 신문 〈적기(赤旗)〉를 창간했고 나중에 독일 공산당(KPD)이 된 마르크스주의자 그룹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공동으로 조직하여 1919년 1월에 베를린에서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녀의 지도 아래 수행된 사건은 자유군단에 의해 진압되었고, 룩셈부르크와 수백 명의 스파르타쿠스 조직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7]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년 8월 13일 ~ 1919년 1월 15일)는 독일의 공산주의자, 혁명가, 사상가이다. 1900년부터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이었으며 1912년부터 1916년까지 국가의회 원내의 대의원으로 당내 혁명적 좌익세력을 대표했다. 리프크네히트는 반전주의자로 1916년 독일 정당들 간의 전시 협의에 반대함으로써 의원단에서 제명되었다. 그는 1907년 반전 팜플렛 제작과 1916년 반전 시위의 주도자로 두 번 투옥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독일에서 11월 혁명이 발생하면서, 리프크네히트는 1918년 11월 9일 베를린성에서 “자유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어 11월 11일에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과 함께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독일에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려는 그의 시도는 국가노병평의회(Reichsrätekongress) 다수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918년 말 리프크네히트는 독일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는 1919년 1월 그가 주도한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면서 자유군단에 억류되어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피살되었다. 그의 죽음과 직접 연관된 두 명의 인물이 기소되었으나 재판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8] 클라라 체트킨(독일어: Clara Zetkin, 1857년 7월 5일 ~ 1933년 6월 20일)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여권운동가이다. 1911년 최초의 국제 여성의 날을 조직했다. 1917년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원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옹호하는 당론에 반발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탈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독립사민당내 극좌파이자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에 가담했다.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뒤 공산당을 조직했고, 1920년 ~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권력을 잡고 1933년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독일 공산당은 활동이 금지되었고, 체트킨은 소련으로 망명해 거기서 죽었다.

[9] 스파르타쿠스 동맹(독일어: Spartakusbund 슈파르타쿠스분트[*])은 독일의 단체로, 고대 로마에서 노예들의 계급투쟁을 이끌었던 전설적인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따왔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활동은 1914년부터 암암리에 시작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6년 1월부터 잡지 『슈파르타쿠스브리페』(Spartakusbriefe)를 발행하면서 특히 스파르타쿠스 동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에 독일 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내의 극좌, 극단 성향의 당원들이 탈퇴하여 결성되었다. 1919년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맹원인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체포되어 1월 15일 처형당했다. 이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이 있다. 이 사건으로 좌파공산주의는 쇠퇴하게 된다.

[10] 독일 공산당(독일어: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KPD 코무니스티셰 파르타이 도이칠란드스, 케이피디[*])은 1919년 1월 1일 창당한 독일의 공산당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8년 11월 혁명에 참가했던 많은 공산주의 혁명 조직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독일 공산당은 초기부터 개량적인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 이해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초기엔 의회주의에 대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잏었으나 1919년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공산주의와 인민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으로 통일하였다. 에른스트 탈만이 서기장으로 취임한 이후 독일 공산당은 스탈린주의 노선을 지지했으며, 코민테른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나치 정권 시절 독일에서는 공산주의 서적이 폴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 서적들과 함께 소각되는 등 공산주의가 탄압받았기 때문에 나치당에 의해 독일 공산당의 활동이 금지되었고, 종전 후 연합국의 점령군에 의해 활동이 허가되었다. 1946년 4월 독일 공산당 동부 지부는 독일 사회민주당 통합한 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소련의 지지를 받아 독일 민주공화국을 건국했다.

서독 지역에서 독일 공산당은 제1회 독일 연방의회에 의원을 배출하였으나 서독 정부는 독일 공산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에 책임이 있고 소련에 종속적이며 위헌적인 정당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독일 공산당은 1956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1] Nɑtionalsozialist; 전(前)독일의 국가 사회당

[12]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 독일어 :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13] 로스토크 대학교(독일어: Universität Rostock)는 독일 로스토크에 있는 대학교이다.

[14] 자유 독일 노동조합연맹 (독일어 : Frei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 또는 FDGB)은 1946년부터 1990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민주 공화국(GDR 또는 동독) 의 유일한 전국 노동 조합 중심지 였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동독의 대중 조직으로, 모든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FDGB는 국민전선 의 구성원이었습니다. FDGB의 지도자들은 집권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고위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15] 《독일의 동전; 1마르크의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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