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사변적 물리학을 위하여’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안호성 옮김, 『자연의 개념』(갈무리, 2025) 서평|글: 이수영(미술작가,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철학자의 서재]
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사변적 물리학을 위하여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안호성 옮김, 『자연의 개념』, 갈무리, 2025
이수영(미술작가,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해가 붉게 서산에 걸리면 태양의 광선이 대기권을 통과하는 경로가 길어지면서 파장의 길이가 길어지고 각도가 커진다. 태양광선의 파동 630~750nm은 물리적 객체이지만 노을의 붉은빛도 객체일까? 화이트헤드는 ‘붉은색’이라는 감각이야말로 우선하는 객체라고 말한다. 붉은색이라는 감각-객체가 아니라면 태양의 가시광선이라는 물리적 객체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객체 ‘붉은색’은 석양이 지는 복합적 관계들 속에서 우리의 감각 지각이 붙잡은 관계항이다.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붉은색’이 자연의 존재자이기 때문이지 색깔이라는 것이 단지 인간 정신 안의 표상이거나 태양광선의 특정 파동에 귀속된 특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사고가 아닌 감각이 자연과학의 기초여야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 정신에 대해 자립적인 닫힌 체계이다. 화이트헤드는 메이야수가 상관주의라고 부른, 즉 인간정신에 드리운 자연과 인간 바깥의 자연을 분리하는 이원론에 맞선다.
화이트헤드는 세계를 끊임없이 서로 관계하며 변화하는 사건들의 총합으로 보았다. ‘사건’이라면 교통사고 같은 것을 떠올리지만, 화이트헤드에게 광화문 사거리 이순신장군 동상 역시 사건이다. 이순신장군 동상은, 동상의 양자장이 요동치고 전자기장이 저항하는 등 여러 흐름들이 광화문 이순신동상이라는 상황으로 회집되어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광화문 이순신동상을 감각적으로 특정할 수 있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존재자들이 세계를 경험하는 매순간 현실은 생성 소멸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 샤비로는 『사물들의 우주』에서 화이트헤드를 들뢰즈의 생성과 흐름의 철학과 연결시킨다. 또한 화이트헤드는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이나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 등의 신유물론의 계보학적 선행연구로 떠오르기도 한다. 들뢰즈, 신유물론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공통점이라면 세계를 자기동일성에 폐쇄된 정태적인 실체나 사물들이 아닌 역동하는 과정으로 본다는 점일 것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존재를 존재이게 만들어 주는 작용인인 보편자는 창조성, 생성이다. 그는 ‘임페투스’라는 장(field) 개념을 도입하는데, 특정된 사건을 회집된 것으로 보는 관점은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이론을 떠오르게도 한다.
화이트헤드가 세계를 사건들이 요동치며 생성하는 과정으로 바라보지만, 수학자이기도 한 화이트헤드는 추이하는 사건을 미분해 들어가는 추론으로 이상적 극한을 추상화한다. 그리고 그 추상적 개념들로 지각 속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자연을 인식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사건들의 관계를 추상하는 것은 상대적이다. 요동치는 사건들을 경험하는 입각점에 따라 사건은 다르게 특정될 수 있다. ‘지각하는 사건’이라는 그의 개념은 지각하는 현재를 입각점으로 사건을 어떤 고유한 방식으로 식별하는 것이다. 관할하는 현재의 상황이 특정한 구조로서 사건을 파악하는데 포함되는 것이다.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관찰 행위가 관측이라는 장에 포함되어 관측결과에 영향을 주는 비결정성이라는 관찰자효과를 떠올리게 한다. 화이트헤드는 ‘파악(prehension)’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사건은 실재적 계기(actual occasion)의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다른 객체로 파악될 수 있는데, 객체란 이렇게 흐르는 사건 속에서 특정하게 상황화된 회집체이다. 들뢰즈라면 욕망에 따라 접속하여 전혀 다른 기계를 만들어 낸다고 했을 것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에 아인슈타인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화이트헤드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개념과 빛의 절대속도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에게 시공간은 사물들 간의 질량에 의해 구성되는 중력장으로 물리적 실체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에게 시공간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의 상호관계를 추상하는 수학적 개념이었다. 아인슈타인에게 빛의 속도는 불변하는 절대속도이지만 화이트헤드에게는 빛의 속도 역시 사건들의 관계의 추상이어야 했다. 화이트헤드에게 존재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사건들이지 자기동일성을 가진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었다.
화이트헤드는 우리로부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곳-예를 들어본다면 수억 광년 저편의 천체-에서 사건들이 상황화 된다면 빅토리아 여왕의 탄생과도 공-현재하면서 2025년 우리와도 공-현재하는 사건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설명은 마치 끈이론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의 블록우주이론하고 같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른다는 선형적 시간이론과 달리 덩어리로 이미 존재하는 시간-실재에 어떻게 진입하느냐, 어떻게 상황화 되느냐에 따라 달리 현재화 된다는 이론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하는 화이트헤드의 열린 사건들의 세계와 이미 닫힌 우주블록이론의 시간은 많이 다르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개념』에서 과학의 목적은 “다양한 객체가 상황화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다양한 사건 속에서 그 객체들의 나타남을 지배하는 여러 법칙을 추적하는 것(245)”이라고 밝힌다. 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화이트헤드의 책 『자연의 개념』이 주는 영감은 생생하고 매혹적이다. 물질이 뿜어내는 생기, 감각에 대한 신뢰와 집중, 이접(disjunctive)하는 다자(多子)들의 세계, 그리고 이 요동치는 카오스의 세계를 끈질기게 미분하여 극한으로 추상해내는 정합성. 기후위기와 디지털 시대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다양한 실천에 소환되고 있는 이유를 『자연의 개념』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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