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산책34-미분적 차이로서 진 무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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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산책34-미분적 차이로서 진 무한

1)

헤겔의 부정성 개념이 추상적 부정성이 아니라 ‘특정한 부정성[bestimmte Negation]’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자. 특정한 부정성이란 “그 자신이 유래한 것을 부정하는 무”(정신현상학, GW 9, 57)를 의미한다.

부정적 무한판단이나 그것의 변형인 모순 판단에서 부정은 어디까지나 일반적 토대 위에서 있는 개별적인 것의 부정 즉 특정한 부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무한한 부정의 끝에 도달하는 것은 그런 개별적인 것의 일반적 토대이다. 즉 필연적 속성(p or q or r..)의 일반적 토대가 곧 비X가 된다.

질적 무한판단은 세 가지 형식을 갖는다 했다. 첫 번째 형식이 부정적 무한판단 즉 속성을 반복적으로 부정하는 형식이다. 즉 -p & -q & -r… 등이다. 두 번째 형식은 모순 판단의 형식이다. 위의 무한판단은 -p & -(-p) 즉 -p & p의 형식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판단은 긍정적 무한판단 형식이니 -(p or q or r..) 또는 (p or q or r..)을 X라 할 때, 비X라는 판단 형식이다.

이렇게 긍정적 무한판단이 성립하려면 비X 곧 일반적 토대가 어떤 긍정성을 지닌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긍정적 토대가 있는가는 의문이다. 긍정적 무한판단이 의미를 지니려면 그와 같은 비X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가능성이 있을까?

예를 들어 ‘불멸적 존재’를 생각해 보자. 언뜻 생각하면 이 ‘불멸적 존재’는 마치 ‘붉은 것’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언어적 착시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멸적 존재’는 영원한 존재자인데, 우리는 경험적으로 영원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비X란 무한히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부정을 그저 언어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한 것일 뿐이고, 그런 비X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2) 철학에서 긍정적 무한판단을 허용하는 사람은 칸트와 헤겔 두 사람일 것이다. 긍정적 무한판단을 허용하는 칸트는 그 의미를 제한성에 두면서 감각의 정도 즉 내포량에서 0과 1사이에 있는 것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내포량은 양적 범주로 질적 범주 속으로 양적 범주를 끌어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반면 헤겔의 경우 긍정적 무한판단을 허용할 때 비X 즉 일반적 토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존재는 물론 ‘붉은색’이나 ‘짠맛’처럼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닌 관념적 존재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된 구절을 다시 한번 인용해 보자.

“관념성은 무한성의 질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관념성은 본질적으로 생성의 과정이며 따라서 현존으로의 생성과 같은 이행이다.” (논리학 재판, GW 21, 137)

‘관념성’이란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예를 들어 ‘색깔 일반’처럼 우리의 의식 속 관념의 세계에 있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또는 ‘불멸적 존재’처럼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아닐 것이다. 일반적 토대로서 비X를 그렇게 보는 철학자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헤겔적 사유는 아니다. 그렇다면 헤겔이 관념적 존재라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

2)

여기서 우리는 비X로서 일반적 토대라는 개념에 관해 사유가 부딪힌 당혹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소금은 두 가지 필연적 속성을 지닌다. 짠맛과 입방체는 서로 다른 속성이다. 한 사물 즉 소금에 이런 두 가지 대립된 속성이 내재하더라도 여기서 어떤 일반적 토대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런 속성이 소금의 서로 다른 장소에 있어서 혼합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곧 반박에 부딪힌다. 그렇다면 엄밀하게 말하자면 짠맛이 있는 곳에 입방체는 없고 입방체가 있는 곳에 짠맛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금은 짠맛이며 동시에 입방체다. 즉 양자는 소금의 서로 다른 속성이지만 한 장소에 있어야 한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궁여지책으로 이른바 ‘다공성[porositaet]’ 개념을 제시했다. 어떤 속성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다른 속성이 그 구멍에 끼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도 아니고 어떤 질적 속성이 구멍이 뚫린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는 않으며, 설혹 그런 구멍을 비유적으로 이해하더라도 그리고 그 구멍이 미세해서 두 가지 속성이 마치 혼연일체가 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여전히 양자는 서로 다른 장소에 있을 뿐이다. 그 구멍에는 어떤 속성은 없고 다른 속성은 있다.

어떤 사물에 우연성은 혼재하더라도 문제가 없다. 그 우연성은 어디까지나 그 사물에 외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다른 속성이 한 사물에 동시에 내재할 수 있는 것인가? 결국,사물의 본질 즉 필연적 속성의 일반적 토대란 없다고 결론 내려야 할까?

3)

어떤 일반적 토대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 속성과 저런 속성이 뒤섞여 혼연일체가 된 것이 아닐까? 반죽은 아무런 형상이 없으므로 이런저런 형상으로 빚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사물의 일반적 토대를 사물의 본질로 보기보다 이런 반죽과 같은 것으로 보면 어떻겠는가?

일반적 토대가 이런 반죽과 같은 것이라면 즉 이 속성도 아니고 저 속성도 아닌 것이라면, 어떤 사물의 고유한 본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플라톤의 생각은 이 반죽 밖 외부의 힘에 의해 그 반죽에 부여된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그 사물의 본질로 부여된 속성이 곧 형상이고 반죽은 질료가 된다. 사물에 아무 속성이나 부여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아무렇게나 부여된 속성은 반죽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반죽에 이미 있는 속성 중의 하나가 부여된다. 이것이 곧 플라톤의 형상 질료론이 된다.

그러나 플라톤적 생각은 곧 반박에 부딪히는데, 한 사물에 여러 속성이 등장한다면 그 가운데 어느 속성이 사물의 형상이 되는지 가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끌어들인다. 한 사물에 어떤 형상이 부여된다면, 그 형상은 그 사물의 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형상은 최선의 목적이라는 것에 종속한다. 하지만 선의 이데아를 끌어들인다면, 악의 이데아를 끌어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런 플라톤적 사유의 난점을 벗어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 토대를 어떤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여긴다. 즉 여러 속성은 마치 생명체의 지절과 같이 서로 관계하고 있으며 마치 지절의 통일적 연관이 생명이듯이 사물 속의 다양한 속성의 통일적 관계 자체가 곧 일반적 토대이며 사물의 실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사물에 내재하는 여러 속성 가운데 어떤 하나의 속성이 그 사물의 본질에 해당한다고 보기보다는 사물의 본성은 이런 여러 속성의 관계에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만일 이런 속성의 관계가 유지되기만 한다면 그 사물은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니, 이런 관계는 지속적 존재 즉 실체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외부의 힘이나 선의 이데아를 전제하지 않으므로 단순하지만, 속성의 관계라는 말이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여러 물질이 서로 관계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책상은 다리와 등받이 엉덩이 받침이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는 외면적 공간적 관계므로 쉽게 표상된다. 그런데 소금에서 짠맛과 입방체도 그런 관계를 가질까? 속성의 관계란 외면적 공간적 관계일 수는 없는데, 과연 어떻게 속성은 관계하는 것일까? 더구나 이런 속성이 서로 대립적이라면 대립적인 속성이 서로 관계한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4)

헤겔의 사유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근대 과학의 성과를 철학적 사유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제 여기서 비X 즉 일반적 토대에 관한 헤겔의 사유를 정리해 보자.

속성의 관계라는 말은 자연법칙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낙하법칙은 시간과 거리의 관계다. 압력은 부피와 온도의 관계다. 그러므로 속성의 관계란 속성이 가진 일정한 법칙을 의미할 것이다.

사실 이런 법칙은 어떤 속성과 다른 속성 사이의 일정한 연관이 경험을 통해 밝혀지면서 나온다. 그러나 경험은 하나의 속성과 다른 속성 사이에 존재하는 상응 관계만을 표현할 뿐 실제로 여기에 어떤 끈과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는 보여주지 않으며 왜 그런 관계가 나오는 것이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 미적분학은 이런 법칙이 지니는 관계를 설명해준다. 법칙에서 두 속성 사이의 관계는 미분적 차이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미분적 차이가 전개되면서 어떤 곳에서는 이런 속성을 다른 곳에서는 대립하는 속성을 드러내지만, 이미 어떤 속성이 있는 곳에 대립하는 속성이 잠재되고 이에 대립하는 속성이 있는 곳에 그런 속성이 잠재되어 있다.

미분적 차이라는 개념은 이제 헤겔이 말하는 비X 즉 일반적 토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비X란 속성 p q, r의 토대가 되는 미분적 차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면서 그런 속성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런 미분적 차이는 사물에 내재하는 일반적 토대, 본질이며 그러나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법칙적 관계에 내재하는 것이므로 관념적인 것이다. 헤겔이 무한성을 관념적이며 동시에 생성이라고 규정할 때 이 생성은 바로 미분적 차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긍정적 무한자(진 무한)s , 비X= 일반적 토대, 미분적 차이를 헤겔은 다시 ‘대자 존재’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범주가 출현한다. 여기서 대자 존재란 자기를 산출하면서 그 결과 자기가 자기에 대해 있다는 말이 된다. 대자 존재는 이렇게 자기를 산출하는 것에서 성립한다. 미분적 차이야말로 자기를 지속해서 산출하는 것이므로 대자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대자 존재가 출현하면서 논의의 차원은 새롭게 전개된다. 존재론 2장 현존은 2절 3항에서 무한성을 다룬 다음 2장의 마지막 절인 3절에서 대자 존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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