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0회|7. 철학과 대학원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20회
7. 철학과 대학원 (1)
법대에서는 낙오자나 다름없었지만, 문과대 수업에서는 성적이 아주 잘 나왔다. 타지에서 설움을 받다가 고향에 온 느낌마저 들었다. 힘들고 오랜 항해 끝에 섬을 발견한 뱃사공들의 기쁨과도 같았다. 남들은 일부러 법대 가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하던데 나는 오히려 법대를 나와서 잘 팔리지도 않는 철학과로 갔다. 철학과 대학원 시험은 공부도 별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사히 통과했다. 그 당시는 대학원 시험을 통과하는 게 어려웠던 시절이다. 나의 대학원 동기는 타 대학에서 온 여학생과 본교 교육학과 출신인 여학생이다. 모두가 타과 출신인 셈이다. 대학원 등록금은 고등학교 동기가 자기 동생을 과외 공부시켜주는 조건으로 일부를 대주고, 나머지 절반은 나의 오랜 법대 동기인 김모 군의 어머니가 내주었다. 그 당시 과외를 금지했기 때문에 도봉구 방학동이었던 친구의 집에서 3달 정도 입주 과외를 해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돈 한 푼 없이 내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우리 대학원 입학 동기들은 타과생이라 학부 철학과에서 2과목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런데 수강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나를 아주 잘 보았던 과장 교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제가 생겼다. 나는 대학원에서 3과목을 신청하고 학부에서 1과목을 신청하겠다고 과장실로 찾아갔는데 과장 교수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과목의 수강 능력은 나의 선택과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그 교수가 벌컥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때 옆 소파에 앉아 있던 박사 과정 선배가 나가라는 눈짓을 주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과장 교수의 눈 밖에 나서 대학원 다니던 내내 불이익을 당했다. 우리 동기가 3학기가 되었을 때 그 과장 교수가 안식년 휴가를 떠나면서 과 조교에서 우리 동기들을 다 빼 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교 장학금은 나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받지 못하면 등록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대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당시 학생처장을 맞고 있었던 P 교수가 학생처장 장학금을 끌어다 줘서 간신히 등록을 맞쳤다.
대학원 수업은 재밌었다. 정말 공부하는 느낌이 들었다. 학생 수도 몇 명 안 돼서 강의의 집중력도 컸다. 학부에서 B 교수의 동양 철학 수업도 들었지만, 당시 동양철학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 남은 것이 없다. 당시 철학과 대학원은 강의가 끝나면 논문 형식의 리포트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다. 이 리포트를 방학 내내 작성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리포트 작성이 대학원 수업에서 비중을 많이 차지했다. 그때 제출한 리포트들이 교수들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 비트겐슈타인 강좌를 담당했던 P 교수는 내가 제출한 리포트 제목만 보고서 바로 그 자리에서 A를 줄 정도였다. 그때 내가 제출한 리포트 제목은 지금 봐도 멋지다. “커뮤니케이션의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삶의 형식’(Lebensforum)”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전기에 ‘언어의 그림이론’을 담은 『논리-철학 논고』(Tractatus)를 발표했지만, 후기 철학서인 『철학 탐구』(Philosophical Invesgation) 에서는 초기의 이론을 죄다 뒤엎었다. 그는 이 책에서 특히 삶의 형식’(Lebensform)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나는 이 개념을 당시 막 복사본으로 소개되었던 K. 오토 아펠의 책에서 알게된 ‘선험적 지평’이란 개념과 연결시켰다. 그의 삶의 형식은 언어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선험적 지평의 의미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 철학에 생소한 P 교수는 제목 자체만으로 봐도 멋있다고 높게 평가를 해주었다. 아무튼 이런 리포트를 석-박사 졸업할 때까지 10여 편을 작성해야 했다. 어려웠지만 배운 것도 많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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