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말대로 이 쿠데타가 희극일까? [천 하룻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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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역(變易): 맑스 말대로 이 쿠데타가 희극일까?

2025 02 18, 우수(雨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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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이 풀린다고 하는데, 한강이 얼지 않아서 강물이 풀린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지난 12월 3일 얼어붙었던 터전이 입춘에는 봄바람과 더불어 풀릴 것인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김건희와 함께)은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며 계엄령을 발동했다. 바로 국회가 계엄령 해제를 의결했다. 그럼에도 두 달이 넘도록 계엄은 끝이 난 것 같지 않다. 게다가 그 계엄의 시행은 잘 짜여진 실행계획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광범위한 실행을 모의했다는 정도를 넘어서 사실 증거가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모골이 송연하다고 한다.

내란을 일으키려 시도하며 계엄을 실행한 세력은 광복공간에서 일제부역자들이 이승만과 더불어 하는 짓을 반복하는 듯하다. 그러나 민중이 대체할 방법이 없이 당했던 시절과 달리, 누리소통의 시대에 각성한 인민이 잘 대처하고 있다. 세월은 흐른다. 70년 전 입말의 소통이 거의 없던 시절과 달리 70여 년 동안 입말이 풍부해졌고, 인민이 누리 소통을 통해 자발적으로 문화 창달과 홍익인간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중에 있다. 20세기 철기시대의 전성기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미국 제국의 반쯤 식민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한문도, 일어도, 영어도 아닌 우리 입말의 시대를 시작하였다. 이로 부터 79년이 지나, 규소시대의 흐름의 한 중간에 와 있는 것 같다. 이 시대에 누리 소통이 빛의 발산처럼 널리 빠르게 확장되고 전달되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 젊은이가 천지인(天地人)의 문자로 입말로 세상을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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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 서양은 천5백 여 년의 크리스트교라는 종교시대를 거쳐서, 350여 년의 합리주의시대, 그리고 인간의 각성과 더불어 실증주의시대에서 부르주와의 등장에 이어 프롤레타리아의 시대를 열었고, 식민지 수탈의 제국주의시대에 소비에트가 성립했으며, 미국이라는 제국시대의 시작에 동양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용화세계를 만들려고 천년의 불교시대를 거쳤으나, 고려 말에 중생의 고충을 해결하고자 사찰(寺刹)의 토지소유를 개혁하려다가 고려왕조가 무너졌다. 조선조 500년의 유학(儒學)시대를 거쳐 가는 마지막 100여 년에도 도탄에 빠진 백성을 생각하는 선각자들이 실증적 학문인 실학(實學)과 민중운동을 시도하였으나, 기득권을 지닌 노론이 일본제국주의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광복에는 일제 부일자들이 미국 제국에 빌붙어서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모는 수법을 쓰면서 600여 년의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자들의 기득권이 유지되었다.

동서양이 비슷한 위도 상에서 역사를 이어가는 나라들에서, 문명사적으로 종교시대를 거쳐서, 학문적 논리의 시대를 지나, 대중과 민중, 인민과 프롤레타리아 시대로 변역하고 있었다. 사실은 각 시대마다 동일성을 유지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각각은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변역의 과정에서 상층의 지배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은 항상 권력과 돈(재화)을 차지하였다. 21세기 윤석열 집단도 권력과 돈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저항하는 세력과 더불어 인민이 그를 파면하려 한다. 18세기 말 이래로 인민주권과 인민 최종심금은 역사 속에 한 찰나처럼 여기지지만, 전 지구상의 인류의 기억 속에 지층의 두께처럼 내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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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변역은 지배세력의 일방통행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백성으로부터 지지받는 새 왕조의 지위를 만들기 위해 우리 입말을 문자로 쓰는 과학적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 입말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뒷방의 글로 밀려났다. 조선 왕조 안에서 상부로부터 개조와 개혁의 노력들이 있었다. 연산군 시대에서부터 시작했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상부의 세력은 부동이었다. 훈구파들이 사림파 김종직 학파를 제거하는 모오사화와 기묘사화를, 그리고 중종 시절에 수구파들이 개혁파인 조광조의 일파를 제거 하는 기묘사회를 일으킨 역사에서도 있었다.

조광조 이후에 유학자들은 은둔지사로서 자신들의 안위를 보존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고들 한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서, 두 차례의 외국(일본과 청나라)의 침입에 의해 피해해진 강토에, 수구세력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사라진 나라인 명나라를 존중한다면서, 사대주의로서 유학 중에서도 신유학의 주자의 학문을 중심으로 삼아서, 이에 반하는 글을 쓰는 자를 통제하기 위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기괴한 사상 통제의 지침을 만들었다. 수구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난적으로, 요즘 표현으로 빨갱이 사냥을 한 것이다.

정조가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실학자들과 더불어 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훈구파, 수구파, 모화파로 이어진 세력들에 의해, 그의 사후에 다시 이익집단인 노론의 지배로 돌아갔다. 19세기 중반부터 우리나라가 세계사와 마주칠 때 젊은 지식인들이 있었지만, 극우집단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와 손을 잡고 나라를 팔아 넘겼다. 이런 과정에서 백성은 가난과 탐관오리의 착취 속에서 살아갔다. 백성이 서로 “니르고자 할배 있어도” 백성들 사이에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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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일요일에 광주에서 탄핵반대 집회를 한다고 전국에서 교회들이 많은 버스를 동원해서 집회를 하였는데, 이는 광복 후 우리역사에서 뒤바뀐 국면을 연출한 사건이 있었다. 얼핏 해방공간에서 신탁통치 오보사건(信託統治誤報事件)을 떠올렸다. 소련이 반대하고 미국이 찬성했다는데,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난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의 잘못된 보도를 내보낸 사건이다. 오보는 행방정국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민족의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공간에서 세상은 달리 흘러갔다.

이런 시기에, 여러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지도자들이 암살을 당하고 혼란에 빠졌다. 스스로 소통할 수 있는 입말도 갖추어지지 않는 시기에, 미국을 등에 업은 기독교 세력이 서북청년단을 만들어서 일제부역세력들과 더불어, 반민족처벌특별위원회를 해산시켰고, 제주도 도민을 학살하였다. 이때 민중은 이들에게 저항할 여론을 집결시키지 못했다. 인민이 자주적으로 의사를 결집시키고 퍼뜨릴 도구가 없었다. 부역자들과 기독교세력이 함께 반민족처벌세력을 빨갱이로 몰아갔다. 냉전의 부산물인 우리나라 남북 전쟁은 삶의 터전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중생이, 백성이, 민중이, 인민이 자립적이고 자치적인 사유에서 세상을 꾸려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촛불시위에 다음으로 찬란한 불빛시위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치며 축제를 벌였다. 이 둘째의 탄핵 심판에서 인민이 최종심급임을 의심하지 않는 나로서는 당연히 검찰독재 세력도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속사정을 모르는 근거 없는 낭만주의라고 한다. 나도 저 독재세력이 조선조에서부터 훈구파, 수구파, 모화파, 부일파, 숭미파로 이어져온 역사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백성의 입말보다 상부의 언어와 용어로서 지배해 왔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민중 또는 인민이 자각하고 소통하는 도구를 가졌으며, 스스로 자발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몇 가지 점에서 이들 극우파들이 인민에 의해 밀려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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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사람들이 코로나의 방어를 슬기롭게 거친 우리나라는 지구상의 중요한 나라로서 지위를 가져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가 DNA라든지 바이러스의 면역체를 해결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 질병대처의 방식에서 각 나라가 우리방식을 모방하거나 부러워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 속에 생물학적 질병과 위험에도 대처할 능력이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세계 정상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자고나니 선진국의 대열에 서있다고 했듯이, 우리는 어떤 국면에서 세계의 중요국가와 나란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각이 자주(自主)를 부추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류 문화도 중요하다. 대중음악에서, 영화에서, 클래식 음악연주자들에서, 그리고 식생활에서 우리방식이 다른 나라들에게 일반화하여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계에서 지위 상승에 스포츠도 빠질 수 없다. 그럼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노벨 문학상에 우리의 젊은 세대의 기수인 한강 작가가 올랐다. 나로서는 어떤 문화적 양태보다 우리글이 세계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말하자면 우리 입말이 문자로서 알려진 것이다. 이번 계엄에 대해 근거없는 낙관주의라고 할 때, 나는 우리 입말과 문자가 인민의 소통기구가 되었기에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오고 최종심급은 인민의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우리말을 입말 쓴지 79년 만에, 그리고 87년 항쟁이래로 우리글을 가로쓰기 신문이 나온 이래 38년이 지나서 인민의 시대를 열었고, 우리글로 세계문학사에 한 시대를 열었다. 자치에서 자주로 한 단계를 올라섰다고 해도 좋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누리소통(SNS)은, 권력의 지배방식과 전혀 다르게, 널리 공유되고 있다. 지식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은 도서관(문자, 음악, 영상)에서 라고 하지만, 인공지능(AI)의 속도와 확장은 코로나 이후 5년 사이에 지금까지의 문명사에서 만들어진 총량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하였다. 그 거대한 양에 짓눌릴 것 같지만, 어느 시대에도 부정확한 사례들이 넘쳐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화되고 정리되어 갔다는 것이 인류의 노력의 소산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극우파들의 가짜뉴스와 짜깁기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런 유투버와 텔레그램 등이 성행한다고 젊은이들이 모두가 그 속에 함몰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든지 탐욕과 오만이 겉보기에 화려하게 보여도, 내공을 쌓으며 노력하여 얻는 성과와 작은 좋은 일들을 쌓아가는 선량들이 이 세상을 환하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근거없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진실이라니깐.

이러한 세상의 변화에 늙은이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방식에 대해 진솔하게 마주하고 노력한다. 늙은이들의 괜스런 걱정은 늙은이 자신들의 걱정이며 젊은이에게 전가할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자치와 자주를, 태어나면서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젊은이는 자신들이 살아갈 새로운 시대의 세계의 변화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게다가 5년 정도 사이에 비약적인 소통의 발전에서 젊은이가 스스로 노력하며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철기시대에 보편적 동일성의 요구가, 지금으로 보면 탐욕과 오만이라는 것도 깨닫고 있다. 규소시대 다양한 삶의 양식들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자율성이 이미 몸에 밴 채로 움직이고 새로운 생산을 하고 있다.

전두환의 쿠데타를 겪지 않았어도, 윤석열의 쿠데타가 젊은이 자신들이 살아갈 삶에서 걸림돌이라는 것을 잘 안다. 촛불시위와 다른 불빛시위가 그들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문화이며, “다만세”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젊은이들이 달리 생각하는 가운데, “틀딱”과 성조기부대들이 역사 속에서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입틀막”이나 “입벌구”라는 용어가 윤석열과 김건희같은 이들이 방식으로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근거 없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진실이다. 바로, 천지인(ㅣ,ㅡ, ㆍ)의 삼글표를 기본으로 하는 젊은이가, 크리스트교의 삼신앙이든 철학에서 삼위격이든 간에 지나간 것에 비해, 현실에서 소통의 삼글표가 자율성을 발현하는 도구임에 틀림없기에, 즐겁고 유쾌하게 다음 열릴 시대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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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앙자들이 여섯 먹은 꼬마처럼 자연을 자동인형처럼 철없이 탐욕과 놀이의 도구로서 대하다가, 자연에 자치가 있다는 합리주의시대, 생물학과 심리학의 발달로 자연에 자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자연이 자율성이 있다는 데 놀라고 있다. 이런 자율성의 사유가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에 가깝다면, DNA에 이르러 이제 자발성의 발현의 시대라고 깨닫는다. 이 자연의 자발성을 견디지 못해,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교회가 구시대의 서북청년단과 백골부대 같은 무리들을 동원하고 있고, 인터넷 속에서 신천지의 댓글부대와 명태균의 여론조작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양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되돌릴 수 없다.

젊은이의 시대이다. 마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적으로처럼, 인민 속에서 인민과 더불어 인민으로 산다는 것이다. 벩송은 말한다. 삶이 먼저이고 사유한다(철학한다)는 다음이다. 서양철학사가 이상한 사고와 결합하여 신이 먼저고, 다음에 사유하고, 그리고 산다로 만든 시대가 끝났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의한 자연의 방식으로 사는 삶은 노력이고, 어느 생명체나 자기 강도(내공)를 높이고 있다. 이 강도를 우리는 내공이라 부른다. 열여덟까지 일반화의 방식을 가르친 대로 배웠고, 노력과 내공은 열아홉에서 서른여덟까지 자치를 통한 자율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돌아보며 노력하고 내공을 쌓는 이들을 만나러, 자연을 통한 지식의 광장으로(AI와 DeepSeek가 아니라) 떠나는 다양한 여행도 필요하다.

이 쿠데타가 희극이 되는 것은 낭만주의가 아니라, 젊은이의 내공과 노력에 있다.

이 세상은 젊은이에게 달려 있다.

(4:12, 58MLH) (4:29, 58MLHH)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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