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3회|5. 인문학 수업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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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5. 인문학 수업 (1)

 

암자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방학도 끝나가기 때문에 나는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랫동안 수염을 깍지 않아서 턱수염이 많이 자랐다. 산에서 있다 보니 다소 거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간에서 다소 달라진 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로 복귀하자마자 2학기 등록을 마치고 수강 신청할 때 나는 법대 과목 보다는 주로 문과대와 신과대 과목으로 수강표를 짰다. 이제 심적으로도 법대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문과대에서는 영문과의 O 교수의 햄릿 강의를 신청했고, 사학과의 K 교수의 농업 경제사 강의도 신청을 했다. 사회학과에는 당시 새로 부임한 J 교수 수업을 신청했다. J 교수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종교 사회학자로서 미국 대학 내 지명도가 높았다. 철학과 과목도 하나 신청했다. 철학과에서는 P 교수가 안식년이기 때문에 이화여대의 J 교수가 대신 강의하는 인식론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신과대의 유명한 H 교수 강의는 그 이후로도 한 3학기 정도 들을 정도로 열심히 수강했다. 외부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H 교수는 Y대가 자랑하는 천재였다. H 교수는 원래 교회사 전공이지만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사고와 복잡한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도식화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항상 만면에 웃음기가 돌면서 거침없는 입담으로 강의하던 H 교수의 수업을 제대로 이해는 못했어도 지적으로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했다.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참으로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정법대 4년을 다니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유일하게 정치학과의 L 교수 강의를 들을 때 한 번 경험했을 뿐이다. 긴 머리를 뒤로 넘기는 오드리 햅번 흉내를 내면서 “권력은 도취적이다.”(Power is intoxical, Acton경)이라고 외치던 L 교수의 정치학 강의가 그나마 나의 지적 욕구를 채워 주었을 뿐이다. 그 당시 법대 교수들은 각기 그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던 교수들이었지만 내가 워낙 법대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반면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행정관으로 바뀐 낡은 문과대 건물은 대부분 소강의실로 이루어져 있다. 기껏해야 열 댓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덕분에 선생과 학생들 간의 공간적 거리가 가깝고, 학생들 상호 간에도 유대가 적지 않았다. 그 공간에는 대학의 낭만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좋은 인문적 공간을 행정 공간으로 바꾸어 버린 인간들이 지금 대학을 운영하고 있으니 대학이 기업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문과대의 유명 교수들의 강의를 들었다. 앞서 언급한 사학과의 K 교수는 선비풍의 조용한 용모와 다르게 강의는 대단히 열정적으로 했다. 조선에도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유물사관에 입각해 설명하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나에게는 K 교수가 학생들의 수많은 질문에 대해 일일이 답변해주는 친절한 면모도 인상적이었다. 국문과에서는 당시 강사로 출강하던 『오발탄』의 작가 이범선이 ‘창작론’을 강의했다. 당시 나는 창작에 내가 전혀 소질이 없다고 생각해서 중도에 포기했는데 두고두고 후회했다. 사회학과에 새로 부임한 J 교수의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그는 1973년에 출간된 미국 사회학자 다니엘 벨의 The Coming of Post-Industrial Society 1973 을 교재로 삼아 강의했다. 지금은 다니엘 벨의 이론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지지만 당시 한국은 산업화 단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단계에서 벌어지는 독재와 자유, 인권과 같은 가치들을 둘러싸고 갈등이 첨예한 사회였다. 특히 1980년도에 일어난 광주사태는 많은 대학생들에게 트라우마처럼 작용했다. 반면 테크놀로지의 환상을 자극하는 후기 산업 사회 이론은 우리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아서 수업 시간 내내 그 선생하고 설전을 많이 벌였다.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대학자에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까불었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그 당시 나를 위시한 학부생들의 문제의식은 대단했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은 산업 사회에서 후기 산업 사회로 넘어가는 사회 발전론을 설명하고, 지식과 기술이 후기 산업 사회의 계급 구조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기술했다. 더 나아가서 이런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학적 개념과 사회 계획에 관심을 가지고, 궁극에는 누가 후기 산업 사회를 지배할 것인가라는, 지금 보면 대단히 상식적일 만큼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도래할 미래를 전망한 책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그 책은 버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양키들 이론 정도로 뿐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그 책이 한국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은 아닐까요? 왜 우리가 이책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하는 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남이 차려 놓은 상에 앉아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당돌한 형국이다. 이런 도전적인 자세를 보고 J교수는 혀를 끌끌 찬다. 이건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쇼비니스트의 행태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의 내용은 선진국 미국에서 대단히 호평을 받고 있어요. 산업 사회의 현실과 도래할 탈 산업 사회에 대한 전망에서 이 책만한 분석이 없지요. 지금 있는 현실만이 아니라 사회 발전의 전망에서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 대해 연구하는 이론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선생님 말씀과 달리 현실 적합성이 없다고 한다면 한낱 공염불이 아닐까요? 한국의 현실을 보세요. 한국은 1960년대 세계 최빈국의 상황을 벗어나 수출 입국에 돌입하면서 저임금 과노동으로 엄청 시달리고 있지요. 가까운 구로 공단에 한 번 가보세요. 후기 산업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뜬구름 잡는 환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한국은 유신 독재를 거치면서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했고, 80년대에 들어오자마자 광주에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한 경험도 안고 있습니다. 이런 한국적 현실에서 명색이 사회학을 한다고 하면서 선진이론이라는 명목으로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과연 그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나의 당돌한 이야기에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J 교수도 이 상황을 숙지하고 있었고, 이런 나를 꺽어 놓지 않으면 수업 시간 내내 시달릴지 모른다고 예감을 했을 것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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