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2회|4. 선택과 탐색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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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1. 선택과 탐색 (4)

 

“그러나 당신이 갈구하는 사랑이 무엇이오? 나의 가슴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당신이 찾고 있는 그 사랑의 샘의 내용물이오. 당신은 정녕 진실한 사랑을 찾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순수한 사랑이 아니오. 내 눈에 비치는 것은 감각적이며 말초적인 언어의 유희에 당신의 순수한 혼을 흥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소. 왜 사랑을 세속적인 가치에 팔아 버리려고 하오? 보다 나은 대상, 보다 나은 사랑, 내가 당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걸고서 이야기하되 결코 사랑에는 보다 나은 것이라고는 없다고 맹세하오. 사랑은 그 자체이오. 거기에는 조건이 붙을 수가 없소. 대가를 바랄 수도 없는 것이오. 더욱이 경제적인 가치에 사랑을 결부시키려고 한다면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오. 황금의 신과의 교제는 정말이지 사랑의 탈을 가장한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짓거리요. 사정이 이러할진대 왜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그러한 것들과 결부시키려고 하오. 안타깝소.”

사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그녀와 나는 어울리기 쉽지 않은 배경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회사에 들어갔다. 워낙 성격이 쾌활하고 사교성이 많아서 회사에서도 바로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70-80년대 한국의 건설 붐을 주도하던 건설 회사에 다녔다.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있으니 그녀가 나에게 눈을 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빨리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편지는 단순히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고통은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이런 고통으로 인해 실존의 위기를 느끼면 더욱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당신으로 인하여 나는 지금 커다란 정신적인 진통을 겪고 있소. 내가 지녀 왔던 철학의 근본마저 뒤흔들리고 있소. ‘전체는 진리이다’는 헤겔의 말과 시민 사회의 주축 가치는 화폐의 신이 지배하는 물신주의임을 역설한 마르크스의 말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나의 머리를 혼돈의 나락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소. 일찍이 내가 헤겔에 접하기 전에 나는 어떤 계기로 인하여 인간 -개인-의 삶은 전체적 삶 속에서 비로소 조화와 생명을 얻는 것이라 확신했소. 해서 이러한 전체적 삶을 통한 인간 해방의 실현을 위하여 기꺼이 나의 작은 몸을 바치리라 결심했소. 불교에서 말하는 소신성불(燒燼成佛),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삶이며 인생관이라고 확신했소. 그러기에 나는 헤겔 철학에 접하는 순간 지적 안식처를 발견했다고 느낀 것이고 곧 마르크스의 실천 철학에 매혹 당한 것이오.”

초보적일지 몰라도 당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생각을 굳혔고, 새로 공부를 시작한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지난 1년 동안 유치장 동기들과 해온 세미나를 통해 상당 부분 강화되었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내가 본격적으로 철학을 하기 시작하면서 수행자의 화두처럼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생각의 알파이자 오메가 역할을 했다. 나의 철학적 캐리어는 바로 헤겔과 마르크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철학과 감성적으로 느끼는 철학 간에는 차이가 없을 수 없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편지글에서 사랑에 좌절한 젊은 청년의 감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요소는 개인 대 전체, 고난과 행복, 육체와 영혼, 차안과 피안, 투쟁과 승리등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소. 예컨대 일 개인을 들추어 본다 할지라도 그에게 작용하는 변수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 심리적 등의 수다한 것이 있소. 전체를 사상하고 단지 심리적 측면을 고찰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그 오묘하고 미묘한 움직임이란 우리를 매번 당혹스럽게 만드오. 더욱이 개인의 활동 및 사상의 흐름이 경제적으로 규정 받는 영역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전체와 관련이 커지고 동시에 그 역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미분화된 심리적 고독이 증대되어 가는 것 등은 단순히 헤겔적 사유 양식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것이오. ‘전체는 진리이다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은 영원히 개인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인 절대 고립의 오뇌가 현대인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오. 한 인간의 사회 경제적인 규정 조건을 파악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이상의 심리적 정신적 소외감의 해결을 위한 진지한 노력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현재의 나의 생각으로는 전체와 관련시킨 인간의 유적 본질의 실현이라는 마르크스적 접근 방식으로는 어려운 것이라 믿어지오. 정말이지 실존 상황에서 느끼는 개인의 자기의식의 분열은 법증법적 운동에서 보여지는 자기의식의 지양이라는 언어의 유희로서 위안 받을 수 없는 괴로운 것이오. 더욱이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느끼는 괴로움도 아니기에 그것이 더욱더 가중되는 것인가 보오. 케어케고르가 말하는 신 앞에서 선 단독자의 처절한 사투라고나 할까,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메카니즘의 차가운 환경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물신주의를 헤어나지 못하고 좌절하는 아픈 경험의 진상이오. 이러할진대 우리가 어찌 절대, 전체라는 거대한 언어를 들먹이면서 유토피아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것이오.”

“전체는 진리이다.”는 헤겔이 그의 주저인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사용한 유명한 명제이다. 반면 이와 완전히 대조되는 ‘신 앞에서 선 단독자’라는 명제는 키어케고르의 잘 알려진 명제이다. 그 둘은 전체와 개인을 각각 대변하는 사상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소나기가 밤새 내리던 산속의 암자에서 신앙 고백을 하듯 머리는 헤겔을 따르지만 마음은 키어케고어를 따른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 구절은 이런 감성을 전도서의 구절을 끌어들여 더욱 확인시켜 준다.

“하물며 당신의 사랑도 그러하니 나의 마음은 심히 안타깝소.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랑도 헛되고 진리도 헛된 것이니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이러다가 허무주의의 나락에 빠지지 않을까 두렵소. 당신이여, 이제 나를 잡아 주오.”

한참 그녀를 향한 장문의 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새 비도 그치고 하얗게 날이 새고 있었다. 우거진 숲에서는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들리고 있었다. 내 머리도 점점 더 맑아지고 있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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