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1회|4. 선택과 탐색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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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1. 선택과 탐색 (3)

 

“나요, 이형이요.

놀랬죠?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편지일 테니까. 그렇소, 나 역시 사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쓰고자 한 편지가 아니라 다소 얼떨떨하오. 그러나 왠지 당신에게 이 편지를 꼭 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소. 어제부터 몸살이 나서 그런지 오한이 나고 온통 몸이 쓰시오. 아무도 돌봐줄 사람 없는 외로운 산사에서 몸이 아프다는 것은 정말이지 육체적인 고통 이상으로 정신적인 고통이기도 하오. 그래서 어제는 낮잠을 무려 네 시간이나 잤소. 어제는 많은 꿈이 유달리 선명하게 기억되었소. 그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당신이 나를 힐책할 때의 고통이란…그 꿈 내용은 대강 이렇소. X-mas를 전후로 해서 모두들 즐겁게 놀 때 내가 당신 또래들 모임에 나타났소. 처음 박모 군을 보고 그리고 송모 군도 보았소. 그러나 당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불현듯 자리를 피한 것이오.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오. 그러나 황급히 돌아서 나오는 나에게 당신이 수도 없는 욕을 해대는 것이오. 왜 여기까지 와서 자기도 만나지 않고 돌아가느냐, 비겁하다 등 당신 특유의 감정이 고양되었을 때 내뱉는 말은 너무도 모욕적이어서 참기 어려웠소.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고통스러운 육체와 더불어 뇌리에 선명히 박히는 당신의 기억이 무엇인가 이 편지를 쓰도록 한 것이오. 그리고 당신과 나 사이에 분명 정리할 것이 있다면 정리해야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편지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흔히들 꿈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하오. 꿈속에서 기피하는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현실 가운데에서 그러하기 때문이오. 언제부터인가 내가 당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자 당신은 나를 기피하기 시작했소. 처음 당신을 만나는 순간부터 당신은 나에게 천사처럼 귀여운 우상이 되었소. 그러기를 무려 반년, 내가 당신에게 쏟았던 지순 지고한 정열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름다운 것이었소. 당신도 나를 무척이나 따랐고 또한 그렇게 행동했소. 그러나 이렇게 꿈속에서 부유하는 사랑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리 오래가지 못했소. 지난 해 여름, 나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가득 채워지던 때에 당신은 나의 감정을 공감하기는커녕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나에게 비쳤소. 당신은 가벼이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허망함이란, 자유가 차단되었을 때의 괴로움보다 더한 하늘이 무너지던 허탈함이었소. 그 뒤 뭐라고 할까. 당신이란 여자에게는 더 이상 깊이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오. 당신이란 여자, 참으로 무서운 여자요. 남자의 혼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리는 악녀요.”

“당신을 향한 불타는 사모의 정이 차츰 식어 들자 당신의 모습도 달라지더군요. 아름답고 귀여운 작은 천사이던 예전의 당신은 이제 점차로 하나의 평범한 여자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요. 아, 인간의 눈의 간사함이란 정말 모를 것이오. 한 얼굴이 지닌 두 가지 모습이 이처럼 천양지차로 변하다니, 우리는 항시 사물의 외관에서 비롯되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가련한 미물인가 보오. 그러나 슬퍼하지는 않소.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인지도 모르오. 당신이 언젠가 말하지 않았소? 당신에 대한 나의 기대가 깨질까 당신도 두렵다고. 비록 기대가 깨어지는 순간은 두렵고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그러한 고통은 서로를 위해서도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라고 생각하오. 너무 잔인한 말 이른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동안 미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소. 또한 이것을 아는 게 두려워서 더욱더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를 일이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 비로소 맑은 정신을 지니고 당신을 직시했을 때, 당신의 모습은 이전의 천사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여자였소. 이제는 좀더 정돈된 마음가짐으로 당신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더욱이 예전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애정을 품을 수 있었소.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의 태양이오. 해산의 난고를 겪고 난 후의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당신을 내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신이 들었소.”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은 상당히 순수하고 순진했다. 여자 경험이 거의 없었던 나에게 처음 청년회 친교 모임에서 다가온 그녀의 인상은 아주 강렬했다. 그날 촛불만 켠 상태라 내 표정을 들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녀를 볼 때면 나의 마음은 한없이 설레고 기뻤다. 그런데 경찰서 유치장에 와서 그녀가 남의 일처럼 떠들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녀와 나 사이를 높은 절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 다른 이들에게 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혹시 착각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이성적으로 그녀를 판단하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편지는 바로 이런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큐피드의 화살은 한 개로는 부족한가 보오. 당신을 향한 나의 화살로는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크게 밑도오. 당신이 나를 피하기 시작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소. 그것이 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듯한 아픔을 안겨줄 때마다 나는 나에게 잘못을 되돌리면서 애써 태연해지려고 했소. 당신에 대한 나의 정념도 순화시켜 절제하고 당신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려고 했소. 올해도 거진 반년을 넘어섰지만 특히나 올해는 당신에게 연락하는 회수도 크게 자제했소. 당신도 아마 괴이하게 생각했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 것이오. 당신에게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를 부여할지라도, 당신은 반드시 내게 돌아올 지혜로운 여자라고 나는 믿었던 것이오. 그러나 언젠가 당신이 내게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말했던 것처럼 당신은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있었소. 전혀 기대와는 어긋나게 당신은 무분별할 정도로 당신의 사랑만 갈구하고, 목마른 사슴처럼 사랑의 샘만 찾아 헤메이고 있는 듯하오. 정말 안타깝소. 당신이 어찌 나를 버릴 수 있소. 나는 당신에게 나의 순수한 혼을 바쳤소. 당신도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소. 언젠가 당신도 내가 한 것처럼 나에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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