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발현: 역사는 때에 맞게(카이로스) 변역(變易)한다 – 수괴 체포와 식민지 연관에서 자각 [천 하룻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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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발현: 역사는 때에 맞게(카이로스) 변역(變易)한다.

– 수괴 체포와 식민지 연관에서 자각.

– 2025. 01. 20. 대한(大寒): 소한 추위에 밀린 대한

지난 달 동지 이후에, 그 다음 한 달 후 절후인 대한에 이르기까지, 일부 사람들은 쿠데타와 계엄의 이야기가 점점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드라마와 같다고들 한다. 그리고 역사적 전개과정을 마치 연극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드라마든 연극이든 현상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내밀한 특성들과 그 사유의 뿌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도 한다. 윤석열이 등장인물이면, 이 각본과 대사는 누가 작성하였고, 연출자는 누구일까?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드라마 같은 이야기 있다고 한다. 드라마라기보다 긴 과정에서 크게 보아, 우리의 역사나 서구의 역사에서 비슷한 상사구조 같은 것이 있다. 서유럽도 기원전 역사의 문헌이 자체적으로 없고 외부에 있으며, 우리나라도 김부식의 짤라버린 역사서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원후의 역사에서 천년의 불교시대, 500년 유교시대가 있듯이, 서유럽에서도 1,500여 년의 크리스트교시대, 다음으로 오성의 합리화시대 300년이 있다. 유럽이 실증의 시대로 진행하면서 구시대의 두 가지, 종교시대와 형이상학시대를 벗어나려고 하였고, 그 이후로 상부는 유럽을 벗어나 부의 획득을 위해 전지구적으로, 칼과 방패로 무장한 로마의 식민지 개척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총과 대포의 무력으로 전지구적 식민지를 확장하였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영정조 시대에 몰락한 남인들이 실학이란 이름으로 실증학문에 관심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실증주의가 발현했지만, 서구의 식민지 확장이 중국과 일본을 압박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밀려왔을 때, 우리나라는 로마의 식민지경영보다 훨씬 더 강압적인 제국주의 식민지약탈의 먹잇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이 미국에게 배운 것을 대행해서, 일제 식민지와 광복이후 미국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때부터 미국은 일본을 주구(走狗)로서 소두목으로 앞세워 소련과 중국에 대립하게 하였고, 그 와중에 우리나라는 제국주의와 제국의 세력들이, 이승만, 박정희, 전투환, 이명박을 관리하더니, 이들 모습을 통합 모습으로 21세기에 윤석열의 쿠데타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사에서 기원 후에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몰락하고, 로마 제국이 지중해 주변뿐만 아니라, 유럽의 서부(프랑스와 스페인), 북아프리카(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포함), 중동지역(현 터어키,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이라크 등)을 깊숙이 장악하였다. 식민지 정책에서 그리스 식민지 개척과 로마의 식민지 지배가 다르다. 그리스 식민지 정책은 그리스인들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그 지역의 상부로 정착하면서 그리스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들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이상)의 공유로서 다자의 평등과 자유를 누릴려고 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중앙집권 시기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몰락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시가 지중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참여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통치하면서, 이 장군이 파라오를 대신하면서, 통치를 위한 세 부류의 학자들을 궁정에 불러들여, 통치의 난제들에 대해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학문의 3계보는 소크라테스 좌파라 불릴만한 퀴니코스와 스토아가 한 축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서 로도스 섬으로 떠난 학자들과 달리 아테네에 남은 소요학파 학자들 중에서,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과학에서 해결책을 내려 했던 이들이 당대에 성행했던 의학의 히포크라테스학파와 함께, 민생의 삶을 해결하는 한 축을 형성했다. 그리고 나일강의 전통에서 측량술을 기하학으로, 천체의 운동에서 책력의 만들었던 오랜 이집트 신관들이 수학적 전통을 유지했던 것이 또 다른 한 축이 있다. 이 세 부류의 통합적 결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성립이라 한다. 제국의 체제를 확립하면서 정책의 실현에서 이 세 부류들은 상부로서 인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다. 이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앞에서, 제도와 인간의 관계와 달리 자연과 인간이라든지, 신(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그래도 여전히 탐구하는 노력은 있어왔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장군이 세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왕조가, 공화정의 로마에서 제국의 로마로 바뀌는 시절에, 지중해와 중동의 패권을 로마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의 식민지 정책은 달랐다. 그리스 식민지처럼 새로운 도시 개척이 아니라, 이미 성립된 도시들이 로마에 복속(예속)하지 않으면, 무참히 말살하였다. 로마는 공화정 시절에도 카르타고라는 도시 자체를 몰살시켰듯이, 로마의 제국은 저항하는 나라들을, 특히 이스라엘을 저항자들을 완전히 몰살시키려했다.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로마의 정복을 통한 식민지 확보는,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듯이, 개척에서 생산력의 증가에 의한 이익의 확대와 달리, 식민지 지배의 생산양식에서 생산에 참여 없이도 잉여의 착취를 하였다. 이런 정복을 통한 잉여착취는 앵글로색슨 철학에 깊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전지구적 교역하기 시작한 1,600년 전후에 네덜란드 상인은 세계 지역들과 상호호혜 무역을 하려고 한데 비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1588년) 영국이 해상권을 지배하면서 식민지 정책은 개척이 아니라 착취와 약탈이었다. 이런 약탈 경제에 의한 부의 확충을 아담 스미스가 눈치 채고, 국가의 부는 상업을 통한 자유경제체제라고 보았다. 물론 아담 스미스의 중요한 업적은 단일체제 내에서도 노동의 분업의 과정을 통한 잉여이익의 창출을 밝힌 점이다. 그럼에도 그의 경제학은 국가 또는 공동체의 총생산의 노동과 분배보다, 국가 경제에서 교환을 통한 이익의 증대를 보았다. 중상주의에 자유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개척과 착취를 정당화하였고, 께네의 중농주의와 맑스의 정치경제학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총과 대포의 식민지 확장은 세계사를 영국이 주류인 것으로 되었다.

유럽이 중심이 되어 20세기에 두 번의 식민지 세계전쟁을 거치면서, 부의 축적을 이룬 미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쟁을 통해 성립했듯이, 미국이라는 제국은 세계 곳곳에서 쿠데타와 전쟁을 일으키며 잉여의 착취라는 체제를 유지하였다. 제국은 한 세기 동안에 차례로 일어난 자본과 금융의 위기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소비에트와 중국이라는 대립적 국가들의 성립과 더불어 제3세계는 자주와 자립의 길을 찾기 시작하였다. 세계는 철기문화에서 규소문화 시대로 변화하면서 인도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들이 자기 위상을 만들면서 세계는 다원화되어 가고 있다.

철학과 학문의 발달은 인간이 즐겁고 평화롭게 살려고 하는 노력의 결실들이다. 이런 노력들은 학문이전에 있어왔다. 그런데 로마의 제국은 달랐다. 악랄한 착취에서 식민지 인민의 삶은 비참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철학사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이야기하면서 이를 해소하는 노력과 학설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 식민지에서 지성의 노력은 인간의 기초적 어려움에 대한 해소로서, 자연학과 도덕론, 나아가 정치학이나 국가체제를 설명하려 하였다. 그런데 로마는 제국화 되면서, 그리고 식민지 총독으로 나가서 식민지의 수탈의 재산과 명성(?)으로 로마로 돌아와 황제에 오르는 방식이 생겨나면서, 식민지 착취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에서도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제 속에서도 식민지 수탈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항쟁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이는 20세기가 지난 후, 마치 미국이 전쟁을 통해 세계를 다스리는 경찰을 자임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로마가 무너지고(476년), 동로마가 오스만 투르그에 의해 멸망(1453년)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방식이 유지했던 것은 황제와 유일신앙의 지도자(주교들)의 담합에 있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로마의 교황은 다르다고 할 것이지만, 서유럽은 제국은 없고, 군소 왕국들의 분화, 즉 봉건시대였다.

국가권력에 종교권세가 결합한 것은 둘 사이에 이익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야합 또는 카르텔이 드러난 것은, 고대 이래로 권력과 권세가 한 사람(황제, 참주)에 있어서, 둘 사이의 갈등관계 또는 이질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이질 관계의 봉합이라 부를 수 있는 상부가 성립하기에는 철학적 배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겉보기에는 철학학파들 사이의 진리 논쟁 또는 각 학파들 사이에 학문적 위상 정립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말하자면 분화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학문의 분화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있었던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학문 또는 철학의 분화는 자연을 다루는 이오니아학파와, 존재를 사유하는 엘레아학파 사이에 있었다. 이 다음에는 소크라테스의 후계자들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퀴니코스를 이은 스토아의 대립에서 갈래가 일어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와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에피쿠르소의 정원학파도 나왔다. 이런 분화가 이루진 것은 천문과 기상학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해가 상식에 준하였기에, 이미 기원전에도 몇몇 학자들이 지구의 둘레 지구의 자연을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말기에는 시각적 관찰의 학문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이론에 동조하였고, 게다가 권력과 권세는 이런 정태적 지식에게 권위를 부여했다.

권력과 권세와 맞물려 지식의 권의의 문제는 알렉산드리아의 말기에 학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학파들에 별 주목하지 않고, 신플라톤주의, 아리스토레스학문의 복원, 셈계의 유일신앙의 성립으로 나누고 있다.

알렉산드리아학파를 대부분 철학사는 신플라톤주의라고 말하지만, 이오니아 이래로 우주발생론과 우주론 사이에서 체계적 학설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표자는 플로티노스(204-270)이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우주 영혼이라는 생성하고 변화하는 체계를 받아들여 플라톤주의 다시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관을 통한 상식이 이 우주발생론을 지탱해 주지 못했을 것이고, 새로이 제기된 유일신앙자들과 부딪히면서, 세계영혼의 신학이 크리스트교의 반박으로 이방종교(이교도)로 몰렸다. 그 몰락은 크리스트교인의 사주를 받은 군중이 여성 수학자이며 신플라톤주의자로 인정했던 히파티아(370-415)를 대로에서 갈갈이 찢어 죽였고, 529년에 아테네의 학당들이 폐쇄되면서 중세의 암흑기로 그늘 속에서 면면히 이어갔다.

알렉산드리아학파와 대등하게 발전한 것은 로도스 섬에서 소아시아 연안의 카리아 지방에 아프로디지아스라는 도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의 계승자들이 어어진다. 그 대표자는 알렉산드로스아프로디지에우스(150경-250경)이다. 소요학파의 특징처럼 논리학을 기본으로 사물들과 대상들을 경험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유효했다. 이들의 논리학의 최고류 용어는 개념적으로 절대자 또는 신과 대등하게 위치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그리고 사물의 대상이든 사유의 대상이든 정태적인 현상에서부터 변화를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도 흥미있게 받아들였다. 이들의 학설이 유일신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크리스트의 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시기에, 알렉산드리아학파와 논쟁과 대립에서, 플라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성립하듯이, 새로운 신학 특히 신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확립하는데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유대-크리스트교 쪽에서 신학과 유대 전통의 역사를 개입시켜, 예수를 드라마의 인물로 만들고자 하였다.

예수-크리스트의 전통은 유대-메시아(크리스트) 전통과 다르다. 전자는 이방종교에 물들었다가 삶에서 비참을 벗어나는 방식에서 그리스철학보다 비유로 설명된 스토아-크리스트교의 설교에 매력을 느꼈다. 이는 유대-크리스트(메시아) 전통처럼 태초의 신(야훼, 유일신이든)에서 보다, 하늘에서 울려오는 신의 말씀 또는 로고스가 진리이다. 그리고 아가페(무상보시)가 세상의 비참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예수-크리스트가 구원과 부활에 의한 삼신론이 성립하기 전에(324년), 자연의 이법과 학문의 이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위계처럼, 절대적인 부동의 원리와 그 원리의 경험적 연결을 찾으려 했다. 이런 전승에는 오리게네스(185경-253경)가 있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자연과 더불어 이법의 해결에서 진리보다, 또한 숙명의 해결할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운명의 논리 전개에서 저세상의 안녕을 통해 삶의 안정과 구원을 찾으려 했다. 이방종교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저세상의 문제 해결을 예수의 속죄에서 찾는다는 알레고리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비슷한 시기였다. 플라톤주의자라 불리는(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학파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의 개념이 들어있는데) 플로티노스(204-270)의 우주발생론적 설명,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 속하는 알렉산드로스 아프로디지에우스(150경-250경)의 논리적이고 정태적 세계구축, 그리고 신을 통한 완성된 세계와 구원을 주장하는 오리게네스(185경-253경) 등이 담론을 전개하였다. 이들 중에서 로마 제국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점점 더 제국과 같은 체계를 형성하는 쪽은 셋째 예수-크리스트교 쪽이었다. 물론 이런 체계의 완성에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 때 와서였다.

학문적으로 플라톤주의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나름의 체계와 대상을 다루는 방식을 갖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전자는 다자의 공존을 말하고자 하고, 후자는 종과 류 위에 하나의 최고류를 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자의 단위의 하나(un)이거나 류와 종에서 각각의 단위로서 하나(un)는, 입말로서 표현하는데 같은 하나이다. 그럼에도 전자에서는 유일한 선의 이데아로서 일자(l’Un)를, 후자에서 완전자이며 절대자로서 일자(l’Un)를 말하는데, 용어로서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크리스트의 체계에서도 일자를 수용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둘을 알레고리로서 통합된 방식으로 유대-크리스트교를 만들면서, 유일신의 일자(l’Un)를 설명한다. 이로서 신학의 일자는 최고선이자 불멸자와 같다.

그런데 이방종교에서 이데아의 일자는 미래에 만들어야 할 세상이지, 과거에 만들어진 천국과 같은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유대-크리스트교의 일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율과 모순율 수용하면서, 과거의 일자인 신을 알레고리의 첫 근거로 세웠다. 하나의 신이 있고, 다른 신을 믿는 것을 배격하여, 하나의 신으로 돌아가는 배중률(A 아닌 것이 아니고 A이다)을 받아들인다. 나 이외의 신들이 아닌 신이 진리의 신이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조의 멸망과 로마 제국에 성립에서 신학의 알레고리는 황제제에 맞는 배중률이었다. 예수-크리스트를 공동체 신앙(믿음, 독사)의 대상 밀어내고, 신학이론으로서 유대-크리스트교에서 세계사 변천의 진리로서 신앙(파라독사)을 구사하여 중세 천년을 이어온다. 이 배중율에 따라 교리(파라독사)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온갖 나쁜 짓의 신호탄이 히파티아의 광장에서 공개적 살해였다, 마남사냥은 이를 이어받은 한 방식이었고, 중남미의 식민지에서도, 우리나라에서 한경직에서부터 전광훈에 이르기까지 배중율에 의한, 자기 이외에 다른 신앙을 악이라는 진리의식의 세뇌는, 권력과 결탁하여 많은 백성을 살해해왔다.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세계사에서 황제제(참주제)에 반대의 첫 시도자는 소크라테스라고 한다. 다이몬들을 믿는 그는 민주제도의 성립을 바랐다. 그럼에도 고발 내용 중의 하나로서 전래의 신앙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사약을 받았다. 하나의 신이든 여러 신이든 신으로부터 믿음에서, 어느 하나가 독사이면 다른 신을 말하는 것이 파라독사이듯이, 거꾸로 유대-크리스트 신앙은 파라독사들 중의 하나이다.

학문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자연의 이법과 그 실증의 사실들을 탐구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고대와 중세는 실증적으로 연구가 거의 불가능했다. 르네상스이래로 망원경이 세상을 달리 보게 만들었고, 이어서 현미경은 눈에 보이지 않은 대상들을 말할 수 없다고 했던 시대를 넘어서 맨눈에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세계가 점점 넓어져 갔다. 사물의 변화라기보다 사물을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영혼)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증기기관과 원동기(모터)의 발달은 생산양식을 바꾸어 놓았고 편리와 안녕은 상부만이 아니라 대중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럼에 소유는 소수의 것이었다. 생산양식의 변화는 또 다시 인민의 사유를 변혁하였다.

20세기 중반에 DNA와 디지털의 발견과 발명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21세기의 인민들의 누리소통은 의식의 민중화를 넘어서 다양체의 길을 열었다. 알레고리에 의한 유대-크리스트교, 미국 제국, 동일율의 논리체계, 이 3자의 야합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종말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이제 이 3자의 야합으로 최고 존재로서 일자가 돈(자본)이라 한다.

세뇌되고 전승된 권세, 권력, 지식이 2천5백 년 전부터 아니 4천 년 전부터이라지만, 인류는 수백만 년 전부터 노력하며 내공을 키워왔다. 자연의 이법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지혜의 탐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규소의 시대에 와서야 다자의 공존과 같은 다양체의 문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일제에 부딪혀 우금치를 넘지 못했던 시절의 아픔을 날려버리며, 우리 젊은 여성들이 농민과 남태령을 넘었으며, 12.3에는 여남, 소노, 천귀없이 함께 여의도에서 불의에 항거하였고, 추운 밤 눈 내리는 도로위에서 눈사람이 될 정도에서도 새로운 공화국의 밝힐 빛을 발하였다. 내란 수괴 윤석열은 어제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제7공화국이 밝아 오리라. 한 가지만 바란다면 다음 선거부터 다양체의 바탕이 될 결선투표제를 실행하기 바란다. 배중률에 빠져 내편 찍지 않았기에 통일성(l’unite, l’un)이 안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자의 공존에서, 결선투표로 가면서 당연히 연대와 계약이 이루어 질 것이다. 루소의 자연권 사상에서 자기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은 합의 계약이 민주제의 기본이라 했다.

세상은 45억 년 전부터도 변역(變易)하고 있다. 벩송이 “저항에 대한 저항”이 열린 도덕사회, 역동적 종교를 만든다고 했다. 극우의 기획과 저항(반동)에 대하여, 이 시대 인민의 저항, 즉 리베르떼르(libertaire)와 휴마니떼르(humanitaire)의 저항의 역사는 지속되었고 이어가고 있다.

(4:25, 58LLI) (5:28, 58LLJ) (5:41, 58LLJ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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