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 21-존재와 존재자의 구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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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 21-존재와 존재자의 구분

1)

1부 1편 1장 존재론에서 헤겔의 주장은 단순하다. 즉 존재와 무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상식으로는 누구나 쉽게 인정하듯이 존재와 무는 동일하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 내가 존재하는 것과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헤겔은 이런 상식을 주석 1에서 비판하면서, 여기서 두 가지가 혼동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즉 존재와 무, 더 분명하게 말하자며 순수 존재와 순수 무와 어떤 존재자와 그 존재자의 부정으로서 비존재[자]는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동일하지만, 어떤 존재자와 어떤 비존재자는 서로 다르다.

헤겔은 주석1에서, 존재와 존재자(또는 무의 비존재자)의 구별을 설명하면서 그 유명한 칸트의 백 탈러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칸트는 백 탈러가 내 주머니에 실제로 있는지 아니면 다만 마음속에 가능적으로 있는지가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고 말한다. 이 비유는 너무나 적실하게 가슴에 와닿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주머니에서 동전이 달랑거리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 적실성 때문에 이 비유는 유명해졌는데 칸트가 이 비유를 끄집어낸 데에는 사정이 있다.

그 출발점은 신 존재 증명이다. 이 증명은 신적 존재의 본질은 무한하고 그 속에는 현존이라는 성질도 들어 있으니, 신은 현존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칸트는 현존은 성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본질 즉 성질은 사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현존은 직관(시공간)의 형식에 속하는 것이라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의 본질을 아무리 분석해보아도 현존을 끌어낼 수 없으며, 현존은 다만 경험에서 주어질 뿐이다.

칸트는 이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소위 가능적 백 탈러와 현실적 백 탈러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가능적이든, 현실적이든 그 현존은 경험에 의해 주어진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백 탈러라는 내용은 줄어들지도 커지지도 않는다.

신 존재 증명에서 제기된 성질과 현존의 구분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을 비판할 때도 제기되었던 것이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사물은 서로 성질이 동일하면 서로 동일한 것’이라는 동일성 테제를 제시했다. 이에 대해 칸트는 두 나뭇잎의 예를 들면서, 두 나뭇잎은 모든 성질이 동일하지만, 그 현존은 서로 다르며 또 앞에서 말한 백 탈러 예를 들면서, 가능적 백 탈러와 현실적 백 탈러는 모든 성질이 동일하지만, 그 현존은 서로 다르다고 했다.

2)

헤겔이 칸트의 현존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은 칸트처럼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하거나 라이프니츠의 동일성 테제를 비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헤겔은 칸트의 현존 개념을 존재와 무의 동일성과 비동일성에 관한 논쟁으로 끌어들인다.

칸트에서 현존은 헤겔에서 존재자를 말한다. 성질이 동일하면서도, 서로 현존은 다를 수 있다면, 그리고 가능적 현존과 실제적 현존이 다른 것이라면, 존재자와 비존재자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과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다르며, 내 주머니에 백만 원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겪어본 누구나 인정하듯이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헤겔의 논점은 상식이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자와 비존재자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존재와 무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상식에서 존재와 무는 서로 다르다고 할 때, 그들이 ‘존재’와 ‘무’라고 말한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존재자’와 ‘비존재자’를 말한다. 이렇게 존재자와 비존재라는 측면은 현존을 포함하는 개념인데, 그럴 경우라면 상식이 말한 것처럼 존재자와 비존재자는 다르다. 그런데 상식은 이런 존재자의 예를 들면서도 여기서 끌어내는 것은 존재와 무, 즉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가 다르다는 주장을 끌어내니, 상식은 여기서 범주의 혼동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헤겔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백 탈러를 갖는지 아닌지 하는 구별을 단순히 존재와 비존재로 귀결시킨다는 것은 기만이다. 이런 기만은 이미 제시되었듯이 일면적인 추상(존재와 무의 고립화)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 추상은 그런 예들에서 출현하는 특정한 현존을 제거하고 단순히 존재와 비존재만을 확립하며 바대로 추상적인 존재와 무가 파악되어야 함에도 이런 추상적 존재와 무를 특정한 존재와 무로 즉 현존으로 전환한다.”(논리학, GW21, 75)

헤겔은 여기서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하면서 존재자의 경우는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경우는 존재와 무, 순수 존재와 순수 무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논증이 충분한 것일까? 누구나 금방 알아차리겠지만 헤겔의 논증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존재자와 존재를 왜 구별해야 하는가가 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상식이 존재와 존재자를 혼동했더라도, 아직 존재의 경우 존재와 무가 같다는 것이 직접 논증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헤겔의 논증 가운데 감추어진 일면이 있다. 사실 그 때문에 헤겔은 칸트의 현존 개념을 끌어왔던 것인데, 실제 헤겔의 논증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현존이라는 칸트의 개념이다. 이 현존이라는 개념을 이해해 보면, 헤겔이 왜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했는지가 이해된다.

3)

현존[Dasein]은 칸트에서 시공간적 직관에 속하는 것이다. 칸트가 시공간적인 규정을 선천적 감성의 형식이라 보았다. 그 때문에 마치 시공간적 규정이 사물에는 없는데, 감성이 부여한 것으로 간주된다.

칸트의 주장은 여기서 그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당장 엄청난 문제가 등장한다. 그런 시공간성이 주관적 감성이 부여하는 것이라면 굳이 그게 직관형식이라고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관적 감성이 부여하는 것이라면 왜 어떤 사물에는 이 시공간성이 부여되고 다른 사물에는 저 시공간성이 부여되는가? 우리는 자주 몽롱한 상태에서 사물이 실제와 다른 시공간성을 가지는 경험을 한다. 감성을 통해 부여된 시공간성이 이런 몽롱한 상태에서 부여된 것과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칸트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는가를 여기서 탐구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시공간성에 관한 이런 딜레마 앞에서 헤겔이 나갔던 길로 바로 들어가 보자.

헤겔의 경우 이미 사물 자체가 그런 시공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즉 시공간성 자체가 사물에 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공간성을 사물의 다른 성질과 같은 것으로 본 것인가? 헤겔이 만일 그렇게 보았다면, 칸트의 신 존재 증명 비판이나 동일성 테제 비판에서와 같은 비판에 걸려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헤겔은 시공간성을 사물의 성질로 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물에 속한 시공간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오히려 헤겔에서 시공간성은 사물이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사물은 이 관계 속에 들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공간성이 사물의 관계이므로 시공간성은 사물 밖에 있다. 그러나 시공간성은 사물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도 없다. 즉 시공간성은 사물이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시공간이 사물의 관계이므로, 시공간은 구체성을 띠고 있다. 관계 맺는 사물의 종류에 따라서 그 시공간은 서로 다르다. 이로부터 다양한 시공간이 나올 수 있다. 가성적 세계도 하나의 시공간을 지니며, 현실이 아닌 피안의 세계도 하나의 시공간을 지닌다. 역학이 다루는 일반적 추상적 시공간성 외에도 더 구체적 개별적 시공간성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사랑하는 남녀가 다방에 앉아서 만드는 시공간은 다른 시공간과 구별되는 독자적 시공간이다.

4)

시공간을 이처럼 사물의 관계라고 할 때, 모든 사물은 이 관계 속에 들어 있다. 이런 관계를 확장하여 모든 존재자가 자신의 구체적 성질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존재하는 한에서 맺는 관계 즉 가장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실제의 시공간을 넘어서 가상적인 시공간까지 포함하는 총체적인 시공간이다.

이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할 때 즉 존재자는 이런 총체적 시공간 안에 있다는 말이 된다. 어떤 것이 이 총체적 시공간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시공간 밖에 있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시공간적 차이 때문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구별된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공간의 특정한 위치에 존재한다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위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위치에 존재하지만 다른 위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모순되지 않으니,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위치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이며 성립할 수 없다.

나는 도처에 존재한다는 말도 말이 되며, 또는 나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도 말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도처’나, 그 ‘어디’는 어떤 시공간을 전제로 한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런 시공간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무의미한 말이 된다. 예를 어떤 구체적 시공간을 생각해 보자. 특정 소설적 시공간이다. 그런 소설적 시공간에서 특정 주인공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은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런 소설의 주인공이 소설 공간 밖에 실제 시공간에서 존재하는가 않는가를 묻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물음일 뿐이다.

가장 추상적인 시공간을 생각해 볼 때, 여기서 그런 시공간 밖에 존재자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는 것은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발언일 뿐이다. 모든 존재자란 아무리 추상적 존재자라도 가장 추상적인 시공간 속에 있기 때문이다.

5)

시공간이란 이처럼 어떤 것들이 관계를 맺는 곳이다. 이렇게 존재자는 시공간 속에 있으므로 이 존재자는 항상 타자와 관계하지 않을 수 없다. 시공간 자체가 이런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자와 관계하면서 어떤 현존은 규정성을 지니게 된다. 이 규정성은 곧 타자에 대한 부정을 통해 나온다. 예를 들어 ‘빨강’은 그것에 대한 타자인 ‘파랑’을 부정하면서 ‘빨강’이 된다. 물론 이 부정은 색깔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는 색깔이 만나는 시공간이다. 그러므로 ‘빨강’은 ‘수 3’이나 ‘코끼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으며 이들은 서로 부딪히는 시공간이 없다.

어떤 규정성이 이처럼 시공간에서 타자에 대한 부정을 통해 성립한다는 생각 즉 규정성은 부정성이다는 생각은 비판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빨강’이나 ‘파랑’이나 각자 실재하는 것이지 이것이 서로 대립하거나 서로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자연에는 부정성이 없으며 다만 실재성만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것의 규정성을 이런 특정한 시공간에서 타자에 대한 부정을 통해 나오는 것으로 보는 것, 이것은 그 밑바닥에 반성적 사유를 깔고 있는 것이며 헤겔 논리학 또는 형이상학의 가장 근본적 전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일정한 시공간에 타자와 관계 속에 있으므로 이제 존재한다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헤겔은 만일 어떤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와 전혀 어떤 관계를 맺지 않고 고립된 세계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런 세계라면, 전체 우주의 티끌만 한 존재인 내가 존재하거나 말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내가 타자와 관계 맺는 이 시공간과 어떤 소설가가 쓴 소설의 시공간은 전혀 관계없는 세계다. 그러니 그 소설 속에서 누가 죽든 말든, 거기서 홍수가 나든 말든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나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내가 소설 독자로서 그 소설의 시공간에 일종의 참여자로 들어가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주인공의 죽음에 관해 슬퍼하며 또는 기뻐한다.

이런 생각을 해보면 결국 존재자와 비존재자의 차이는 그 존재자가 타자와 관계하고 그런 존재자의 존재 여부는 타자의 관계를 변화시키므로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무차별한 일일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그것의 존재와 비존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의 규정성과 또한 그것을 다른 것과 관련하게 만드는 그것이 지닌 내용 때문이다.”(논리학, GW11, 46)

만일 모든 것이 상호 필연적으로 연관된 세계라면, 여기서 티끌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도 전체 연관이 바뀌게 되니, 티끌 하나의 존재와 비존재는 세계 자체를 바꾸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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