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17-논리학의 시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7-논리학의 시원
1)
앞에서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이 나가는 길에 관해 설명했다. 양자는 판단형식의 이행을 밑에 깔고 있으나, 이 판단형식의 이행이 이중적인 길이므로, 정신현상학이나 논리학이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길을 통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우선적인 길이 있다. 정신현상학은 우선적으로 본다면, 의식의 형태가 역사 속에서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상승하는 운동(연구 과정)이며, 논리학은 가장 추상적인 범주가 가장 구체적인 범주로 이행하는 하강하는 운동(서술 과정)이라고 했다.
이상과 같은 긴 논의로부터 이제 비로소 우리는 헤겔이 논리학의 시원으로 제기한 문제가 이해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헤겔이 설명한 논리학의 시원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2)
논리학의 시원이니, 서론이나 서론, 그리고 구분처럼 존재론이 시작하기 전에 들어가야 할 부분으로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헤겔은 존재론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이 시원 문제를 다룬다.
(이 시원론이 존재론이 시작한 다음에 위치시킨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만,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그다음에 나오는 존재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시원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시원론에 관해 초판과 재판의 내용을 비교하면, 초판본 앞부분에 두 페이지 정도에 걸친 내용을 재판본에서 헤겔이 제외시켰다는 것만 다르고 뒷부분에서 내용은 별 차이가 없다. 물론 표현은 많이 손 본 것 같다.
시원론에 들어가서 헤겔은 여기서 자기가 다루는 시원의 문제가 형이상학의 시원이나, 인식의 시원 문제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전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철학인 형이상학의 핵심 문제인 ‘종적 본질’과 같은 것을 말할 것이고, 후자라면 데카르트가 말한 ‘에고 고기토’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자기가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시원은 그런 시원이 아니라, 논리학 강의를 이끌어가는 시원이라고 못 박는다. 이 말은 논리학의 독특한 지위에 대한 언급으로 볼 수 있는데, 논리학은 넓게 본다면 학문에 속하지만, 그 가운데 형식적 학문에 속한다. 즉 논리학은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는다. 반면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은 학문 가운데 다른 학문보다는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는 실재[real] 학문에 속한다. 형이상학은 신이나, 세계 등을 다루며, 인식론은 의식을 다루니, 구체적 내용을 갖는다.
3)
헤겔은 이런 논리학 강의의 시원에 대해 독단론자는 자기 멋대로 정했고, 다른 사람(경험론자)들은 논리학에 관해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관념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직관론자는 굳이 직관적으로 이미 모든 것을 얻으니, 그런 시원의 문제 같은 것을 아예 상정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헤겔은 이들과 달리 이 문제가 엄밀하게 대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것이 시원이라면 그것이 시원인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학에서 무엇이 왜 시원이 되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서 헤겔은 일단 시원은 모름지기 직접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매개된 것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서두를 뗀다.
헤겔이 문제를 왜 이렇게 끌고 가는 것일까? 시원의 개념은 개념상 전개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전개 과정의 첫 번째가 시원이니, 어떤 것이 시원이라면,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을 고려하여야 비로소 대답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곧이어 헤겔은 단적으로 직접적인 것도, 또한 단적으로 매개적인 것도 시원이 될 수 없다고 한다. 헤겔은 단정적으로 말하며 구체적 설명은 없지만, 헤겔이 제기한 문제 제기에 비추어 본다면, 헤겔이 이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된다.
생각해 보자. 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이라면, 출발점 즉 시원의 개념에 적합하기는 하지만, 그게 왜 시원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에 대답할 수 없다. 어떤 것이 시원이라면 그것의 바탕 위에서 어떤 것은 앞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런 어떤 것의 바탕은 단순하게 출현한 것은 아닐 것이고, 어떤 과정을 통해 출현할 테니, 시원은 직접적인 것일 수 없고, 매개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단적으로 매개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결과이니 시원이라 하기 어렵다. 시원이라면 나머지 모든 것이 출발하는 바탕이니 적어도 그보다 나중에 나오는 여러 규정들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원은 아직 어떤 규정도 구체화되지 않은 것이니,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헤겔은 시원을 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나, 아니면 단적으로 매개적으로 보는 것은 어느 편이든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4)
이런 문제를 고민하면서 헤겔이 끌어낸 답변은 시원이라면 그것은 매개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직접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직접적인 것이란 논리학의 전개 과정에서 최초의 것이라는 의미이며, 이것이 매개적인 것이란 그런 논리학이 펼쳐지는 차원에 이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헤겔이 스스로 말하듯이 모든 학문에서 시원은 매개와 직접성은 동시에 갖는다. 그것은 그 개별 학문이 전개되는 바탕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것 앞에 있었던 것을 매개로 한다. 동시에 그것이 그 학문의 내에서는 최초로 전제된 것이며 앞으로 전개될 더 규정성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직접적인 것이다.
“매개된 것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하늘에도 자연에도 정신에도 그리고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논리학의 학문에서 시원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전제된다. 하나는 논리학이 전개되는 차원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며, 또한 논리학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가 대답되어야만 논리학의 시원 즉 직접적인 것이고 동시에 매개된 것이 무엇인지 밝혀질 것이다.
5)
앞에서 우리는 논리학의 개념과 그 전개 과정을 설명했다. 우선 논리학의 개념을 보자. 논리학은 사유 속에서 하나의 판단형식이 다른 판단형식으로 즉 하나의 범주가 다른 범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이런 이행은 외적인 경험의 도움을 받아서 나가는 과정은 아니다. 이런 이행은 순수한 사유 내에서 필연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이니, 즉 사유 내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스스로 자기를 전개하는 사유가 곧 순수지다. 헤겔은 이런 순수지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순수지의 이념은 정신에 관한 학문의 결과에서 진리에 이른 확신으로 규정된다. 이제 확신은 한편으로 대상에 더 이상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대상을 내면화하면서 이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한다.”
순수지가 이처럼 대상과 합일되어 있는 지식이다. 여기서 “대상은 내면화하면서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순수지의 전개는 순수한 자기 내에서의 전개이며, 외부적 경험의 개입이 없는 필연적인 전개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이런 순수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헤겔은 이런 문제는 논리학이 다루는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이 문제는 바로 의식을 다루는 학문인 정신현상학의 과제이다. 정신현상학의 의식 운동 끝에 마침내 도달한 것이 순수지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정신현상학의 운동을 매개로 한다.
논리학의 순수지라는 지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니, 단순히 경험에 매달리는 의식으로서는 이런 순수지의 사유를 전개할 수 없으니, 논리학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정신현상학을 통해 자신의 의식을 순수지라는 사유의 수준으로 고양해야 한다.
6)
논리학은 순수지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순수지는 논리학이 전개되는 전체의 토대이다. 논리학 전체가 순수지의 영역 내에서 운동한다. 이점에 관해 헤겔의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보라.
“논리학은 순수한 학문 즉 그것이 전개된 전체 영역에서 순수지다.”
그런데 이런 순수지 가운데 최초의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전제로 한다. 논리학의 전개 과정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중적인 과정이지만, 그 중 우선적인 과정은 곧 개념의 자기 정립, 즉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자기를 규정해 나가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처음에 있는 것은 가장 추상적인 범주 즉 판단형식이다. 헤겔은 가장 추상적인 범주를 곧 순수 존재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것의 근거에 있는 것이고 그 자신은 더이상 어떤 근거를 가지지 않은 것이기에 스스로는 어떤 규정도 갖지 않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원은 어떤 것도 전제해서는 안 되며 어떤 것을 통해서도 매개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근거를 가져서도 안 된다. 시원은 오히려 전체 학문의 절대적 근거이어야 한다. 따라서 시원은 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이거나 또는 다만 직접적인 것이다. 시원은 다른 것에 대립하면서 어떤 규정을 가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규정도 자체 내에서 포함할 수 없고 어떤 내용도 포함할 수 없다….그러므로 시원은 순수한 존재이다.”
여기서 순수 존재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는 지식(의식)에서 존재(대상)로 이행하면서 당혹하게 된다. 그러나 논리학의 전체 기반이 순수지라면, 이 순수 존재 역시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존재자와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순수 존재란 순수지의 다양한 범주 또는 판단형식 가운데 하나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판단형식은 곧 주어와 술어의 관계인데, 이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계사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순수 존재는 마치 존재자 가운데 일반적인 것으로 봐서는 안 되며, 판단형식을 이루는 존재 가운데 가장 순수한 것을 말한다고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여기서 헤겔은 논리학의 시원이 순수 존재인 이유를 그것이 절대적 근거이므로, 아무 규정도 갖지 않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간다는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밑바닥에 깔고 있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만일 논리학의 전개과정이 정신현상학처럼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이행이라면 가장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가장 직접적인 현존이 그 출발점으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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