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9-부정성의 개념과 사유에서 반성 개념의 역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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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9-부정성의 개념과 사유에서 반성 개념의 역할

1)

앞에서 말했듯이 반성 개념은 서로 배타적 통일의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동일성은 차이의 부정이며, 차이는 동일성의 부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부정의 개념이 형식논리학에서 말하는 부정의 개념과 다르다는 사실은 쉽게 드러난다.

형식논리학에서 어떤 것의 부정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의 부정은 ‘파란색’이 될 수도 있고, ‘수3’이나 ‘코끼리’가 될 수도 있다. 이런 형식논리학에서 부정 개념을 통해서 본다면, ‘동일성’의 부정은 반드시 ‘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운동’도 되고, 무수히 많은 것이 다 ‘동일성’의 부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동일성’의 부정이 ‘차이’라고 못 박고 있으니, 여기서 부정성 개념은 헤겔에게 특유한 것이다. 이런 부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부정이 한정되어 있어야 한다. 즉 부정은 부정되는 대상이 속한 어떤 유의 한계 내에서만 일어나는 부정이다. 즉 ‘빨간색’의 부정은 색깔이라는 유 속에서 ‘빨간색’의 부정이다. 그러므로 그 부정은 ‘빨간색’이 아닌 색, 즉 ‘파란색’이나 ‘노란색’ 등이 된다.

2)

헤겔은 이런 부정성 개념을 특정한 부정성이라고 한다.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않게 긍정적인 것이며, 자기 모순적인 것은 0이나 추상적인 무로 해소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것이 지닌 특수적 내용의 부정으로 해소된다는 것이다. 또 달리 말하자면 그와 같은 부정은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해소되기 마련인 특정한 사태의 부정이며, 특정한 부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 속에는 본질적으로 이 결과가 유래한 원인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논리학, S. 38)

헤겔은 이 구절에서 특정한 부정 개념을 제시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무로 해소되는 부정과 달리 그것이 지닌 특수적 내용의 부정에 그친다. 즉 부정의 대상이 되는 ‘빨간색’의 특수한 내용이라면 곧 ‘빨강’이다. ‘빨간색’의 부정은 ‘빨강’의 부정에 한정되지 색의 부정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빨간색의 부정은 ‘파란색’이나 ‘노란색’ 등에만 한정된다.

물론 반성 개념일 경우는 특정한 부정성이 적용되는 특별한 경우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이중부정이 성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부정이 가능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색깔의 유에는 ‘빨간색’과 ‘파란색’, ‘노란색’ 등 상이한 다양한 색깔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이중부정은 불가능하다. ‘파란색’은 ‘빨간색’의 부정이지만, 자기를 부정한다고 다시 ‘빨간색’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인간의 유 속에 ‘남자’와 ‘여자’만이 존재한다고 할 때, ‘여자’는 ‘남자’의 부정이며, 자기를 부정하면 다시 ‘남자’가 된다. 여기서 이중부정이 성립하는 데 이런 경우는 일반적으로 말해 유에 속하는 원소 사이에 배타적 통일의 관계(즉 X=P or -P)가 존재하는 경우다.

반성 개념도 마찬가지다. 좌우, 상하, 선후 등은 물론하고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개념인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형식과 내용,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배타적 통일의 관계 속에 있다. 그러기에 이중부정이 가능하면서 반성 개념이 된다.

3)

지금껏 우리는 반성 개념을 추적해 왔다. 이제 반성 개념이 사유에서 하는 역할을 밝힐 때가 되었다.

일상적으로 반성은 인간에게 속한 특유한 능력이 된다. 라캉이 들고 있는 유명한 예를 들어 보자. 주인이 노예의 이마에 글을 새겼다. ‘이 사람을 만나는 즉시 죽여라’라는 글자다. 그리고 주인은 이 노예를 자기 친구에게 보냈다. 노예는 자기 이마이므로 무슨 글을 썼는지 알 수가 없다(단 거울이 없다고 하자). 노예는 자기 이마에 쓴 글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노예가 주인의 친구를 만났을 때, 주인 친구의 반응을 보고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 반응이 노예에게 거울이 된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거울에 비친 자기의 반영[Reflection]을 보고 자기를 알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졌으니, 이게 바로 반성적 사유라고 하는 것이다. 소위 전략적 개임 이론의 기초가 된 것도 이런 반성적 사유이다.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를 보자. 증거가 없다. 죄수 두 사람이 자백하지 않으면, 처벌받지 않는다. 검사가 자백하지 않으면 두 배의 벌을 주겠다고 한다. 이때 죄수는 서로 먼저 자백하려 하는 가운데 둘 다 처벌받는다. 만일 상대방의 행동을 예상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백하지 않고 처벌도 면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타자의 행동에 대해서 이루어진 행동 즉 전략적 행동이다.

4)

이런 예를 통해서 인간에게 반성적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했다. 이제 이 반성적 사유의 역할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자. 구체적 예를 가지고 설명해 보자.

‘어떤 물체는 질량을 지닌다’라는 판단을 부정하면 ‘어떤 다른 물체(예를 들어 빛과 같은 물체)는 질량을 지니지 않는다’가 된다. 전자는 양적 긍정판단이고 후자는 양적 부정판단이다.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하는 것은 양자의 모순을 경험하게 한다. 이 모순적 경험은 양적 무한판단을 낳는다. 즉 ‘물체는 질량을 지닌 것인 동시에 질량을 지니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질량과 비질량은 부정적 관계를 갖는다.

이제 양적 무한판단 즉 모순 경험을 살펴보자. 칸트는 범주를 물 자체에 적용한다면 모순에 부딪힌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모순 경험으로부터 물 자체의 인식 불가능성이라는 주장으로 나간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은 다른 태도를 취한다.

헤겔은 여기서 이 양적 무한판단을 부정한다면, 질량[M]과 비질량[E: 즉 에너지]의 통일체, 즉 질량과 비질량을 동시에 산출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질량과 비질량의 미분적 차이 즉 dM/dE다. 이 미분적 차이가 사물의 본질이며 때로는 질량을 낳고 때로는 비질량을 낳는다.

이제 ‘물체는 미분적 차이다’라는 명제가 나온다. 이 판단은 이제 사물의 본질을 언표하는 정언 판단이다. 앞에서 ‘물체는 질량이다’라는 판단은 양적 긍정판단은 사물에 본질에 대한 주관적 판단에 그친다. 이제 사물의 객관적 본질에 관한 판단이 출현했다.

5)

이 과정에서 두 번에 걸쳐 부정이 작용했다. 첫 번째 부정은 양적 긍정판단에서 양적 부정판단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 부정은 사유가 주관적으로 전개하는 부정이 아니다. 이런 부정은 실제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즉 우리는 경험을 통해 질량을 지니지 않는 물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빛과 같은 것일 것이다.

두 번째 일어난 부정은 양적 무한판단을 부정하여 정언 판단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p or -p라는 형식에서 그것의 통일체인 X로 이행하는 것인데, 이는 사실 p와 -p 사이에 배타적 통일의 관계가 있을 때만 성립한다.

그런데 첫 번째 부정의 경험은 양자 사이에 배타적 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비질량에 속하는 것은 에너지도 있고 또 다른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일단 처음에 비질량으로서 에너지에 대한 경험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부정은 사유의 내에서 일어나는 자기 내 반성이다. 여기서는 질량과 에너지 사이에 일단 배타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양자의 미분적 차이로서 통일 개념이 출현했다. 쉽게 말해서 이는 새로운 하나의 가설이다.

이런 가설은 이어지는 경험에서 실제로 질량과 에너지가 배타적 관계가 있고, 비질량에 에너지 외에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때 가설을 넘어서 실제로 확립된다고 하겠다. 이것을 가설적으로 출현한 정언 판단을 실제로 확립하는 과정은 이제부터 일어나는 판단형식의 운동 즉 실체 범주의 판단형식에서 전개되는 운동(정언 판단-가언판단-선언판단)에서 일어난다.

이 전체적 과정에서 양적 긍정판단(‘물체는 질량을 갖는다’)은 물체에 대한 지각 판단에 그친다. 그것은 물체의 일반적 술어를 발견한다. 양적 범주의 판단형식에서의 운동을 통해 물체의 객관적 본질(‘이것은 dm/de이다’)에 대한 지성적 인식에 도달한다. 즉 판단형식의 운동을 통해 더 근본적인 인식이 일어난다. 즉 인식에서 발전이 일어난 것이다.

6)

헤겔이 논리학 판단론에서 전개한 이와 같은 이행 가운데 반성 개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자.

우선 양적 긍정판단과 양적 부정판단이 서로 반성 관계에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양적 긍정판단에는 반성 개념 가운데 동일성의 개념이 작용한다. 어떤 물체는 질량을 기준으로 서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반면 양적 부정판단은 반성 개념으로 차이의 개념이 적용된 판단이다. 어떤 물체는 질량을 기준으로 앞의 물체와 다르다는 것이다.

두 판단형식은 반성 개념 즉 반성적 사유를 통해서 모순에 이르게 된다. 만일 이런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개념이 없다면 두 판단형식이 서로 모순이라는 것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양적 무한판단에서 정언 판단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적 무한판단과 정언 판단 사이의 관계 역시 이중부정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양자 역시 반성적 관계에 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양적 무한판단에서 두 술어가 상호 배타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 전제되는 한에서 이런 이중부정이 성립한다. 이것은 사유의 가설인데, 여기서 적용되는 반성 관계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라는 반성 개념이다. 즉 양적 무한판단에서 배타적 관계에 있는 것은 외적인 것이다. 미분적 차이라는 개념은 내적인 것이다.

결국, 헤겔은 양적 범주의 판단형식에서 관계 범주의 정언 판단형식으로 이행에서 두 번에 걸쳐 반성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번은 모순의 경험이며 한번은 전도의 경험이다. 만일 반성적 사유가 없었다면 모순 경험이 가능하지 않았듯이 전도의 경험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헤겔의 반성 개념의 역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하나의 판단형식에서 다른 판단형식으로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이행은 추론에 속하는 것이다. 판단형식 즉 범주가 경험을 구성하는 데 사용되는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분명하다. 판단형식은 경험을 구성하는 지성의 능력이라면 반성 개념은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의 능력이다.

7)

물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양적 무한판단이 성립하는 것이 경험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여기서 간과할 수는 없다. 모순적 경험은 물론 반성적 개념이 있기에 모순이 되지만, 그런 모순적인 경험이 출현하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출현한다.

그러므로 헤겔의 논리학은 형식논리학과 구별된다. 형식논리학은 경험과 무관하다. 그것은 마치 판단의 벽돌을 사유의 공간에서 이리저리 옮기는 것과 같다. 벽돌 자체는 경험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공간에서 이동은 경험과 무관하다. 그것은 순수한 사유 내의 운동이니 마치 유클리드의 순수한 기하학적 공간에서 공간적 형태를 이리저리 옮기더라도 그 형태 자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헤겔의 논리학은 하나의 판단형식 또는 범주에서 다른 판단형식 또는 범주로 이행한다. 이런 이행은 사유를 매개로 한다. 즉 반성적 사유이다. 그러나 이런 반성적 사유는 경험을 매개로 한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사유 속에서 아무리 반성하더라도 새로운 판단형식으로 이행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의문에 이르게 된다. 경험을 매개로 새로운 인식에 이르는 것은 사실 인식론의 역할이 아닌가? 정신현상학에서 우리는 이런 인식의 발전을 보았다. 그런데 논리학도 마찬가지로 이런 경험을 매개로 한 판단형식 즉 인식의 변화라면, 논리학과 인식론은 어떻게 다른가? 논리학과 인식론 또는 정신현상학의 관계는 논리학을 다룰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 문제이지만, 일단 하나의 의문으로 남겨놓자. 그것을 다루게 될 때가 올 것이다.

8)

앞에서 헤겔의 반성 개념을 추적하다가 우리는 헤겔의 배타적 통일의 관계에 있는 반성 개념 속에서 변별적 차이라는 구조주의적 개념을 발견했다. 그러면 헤겔의 사유도 구조주의와 같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그런데도 구조주의와 헤겔의 논리학은 결정적 차이를 지닌다.

구조는 다양한 변별적 차이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이 복합체는 하나의 좌표축을 이룬다. 구조주의는 경험을 이런 좌표 속에 할당하므로, 마치 칸트가 경험을 범주의 좌표축 속에 할당했던 것과 같다.

이런 구조주의는 알다시피 역사적 발전 개념이 없다. 그런데 앞에서 헤겔의 출발점은 칸트에서 인식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비판이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헤겔은 “내용의 자기 운동”을 논리학의 기본 개념으로 삼았는데, 구조주의로부터는 이런 가능성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구조주의적 반성 개념에 기초하면서도 헤겔이 내용의 자기 운동을 끌어낸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반성 개념을 다루면서 하나의 판단형식에서 다른 판단형식으로 이행을 살펴보았다. 이 이행의 과정이 곧 내용의 자기 운동이다. 여기서 내용은 판단형식이 지닌 의미 즉 범주를 말하니, 범주의 자기 운동은 반성적 사유를 통한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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