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 2-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2-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1
1)
앞에서 헤겔 논리학이 실제 다루는 내용은 형이상학과 동일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헤겔은 처음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붙였다가는 나중에 가서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빼고, 논리학이라는 이름만 내세웠다고 했다.
그런데 보통은 논리학을 ‘logic’이라 한다. 헤겔은 ‘Wissenschaft der logic’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붙였다. 번역하기가 좀 곤란하다. 직역하자면 ‘논리학의 학문’이라고 해야 하는데, ‘학’이라는 말이 중첩되어 그저 ‘논리학’이라고 번역한다. 오해를 피하려 ‘논리의[에 관한] 학문’이라고 번역하기도 한지만, 불필요한 현학적 태도일 것이다. 앞으로 그저 ‘논리학’으로 번역하자. 문제는 왜 헤겔이 형이상학적 내용에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는가이다.
여기에 여러 문제가 개입한다. 특히 논리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이 문제 된다. 헤겔은 초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약 25년 전쯤에서부터 우리 속에서 철학적 사고의 방식이 겪었던 전면적인 변화나 이 시기 정신이 자의식이 자신에 관한 도달하게 된 좀 더 고차적인 입장은 아직 논리학의 형태에 거의 이렇다 할 영향을 입히지 못한 상태에 있다.”(초판 서문, 5쪽) [주1]
[주1] 앞으로 인용문은 헤겔의 논리학의 경우에는 장 절과 페이지만 표시하겠다. 원전은 G. W. F. Hegel, Wissenschaft der Logik(1832), Th. 1, Bd, 1, GW Bd. 21, Hrsg. Friedrich Hogemann & Walter Jaeschke, Felix Meiner, 1985이다. 이 책은 재판본이다. 앞으로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초판본은 1812년 발간되었고 1826년 헤겔은 초판본이 거의 소진되었다는 연락을 받고(무려 15년 걸쳐 겨우 1000부 정도가 팔렸다니!) 1829년에 들어가서야 계약이 이루어져서 재판을 위해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개정 분량이 상당히 많아서 개정 작업은 1831년에야 비로소 끝났다. 그것도 1부 1권 존재론에 그쳤다. 1부 1권 개정판은 1832년 발간되었다. 안타깝게도 헤겔은 1부 2권 본질론, 2부 개념론은 개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해 여름 헤겔은 콜레라를 피하려 시골 별장에 가서 작업했는데 개강 때문에 베를린으로 돌아오자 콜레라에 걸려 죽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임석진 교수가 번역한 판본은 초판본이다. 내가 대학원 시절 읽었던 원전은 라슨 판 재판본이다. 임석진 교수의 번역판을 받았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왜 임석진 교수가 재판본이 아닌 초판본을 번역했는지 지금도 의아스럽다. 재판본을 번역했으면, 읽고 인용하는 데 번역본을 참고로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하지만 재판본이 상당한 개정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골격에서 초판본과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번역본을 읽었다고 해서 헤겔 논리학을 오해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 둔다.
이 글을 쓴 게 1812년이니 그 25년 전은 1787이 된다. 이 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2판에 발간되었다. 이 선험철학은 “정신이 자의식이 도달한 고차적 입장”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헤겔이 칸트의 인식론적 혁명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헤겔은 칸트의 인식론적 혁명을 단순히 인식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조차도 근본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아직 이런 변화가 실현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2)
헤겔이 논리학의 변화를 기대할 때, 이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내려오는 일반 논리학 즉 형식논리학을 말할 것이다. 헤겔은 곧이어 이 형식논리학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헤겔은 형식논리학을 “시든 잎사귀”에 비유한다.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솟아오르기 시작한 새로운 정신[이 시대 자유의 정신을 말할 것이다]이 논리학 속에서는 아직 그 흔적을 새기지 못했다. 그러나 정신의 실체적 형식이 변화된 마당에 전시대의 교양의 형식을 보존하려 한다는 것은 전혀 헛된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형식은 이미 뿌리로부터 새로이 움트기 시작한 새로운 싹에 의해서 밀려나 버린 시든 잎사귀와 같다고 하겠다.”(초판 서문, 6쪽)
헤겔이 일반 논리학을 이처럼 조롱하는 이유는 그 논리학이 형식논리학이기 때문이다. 논리학이 형식적이라는 것은 거의 상식과 같아서, 소위 띄어쓰기에도 반영되어 있다. ‘일반 논리학’은 띄어 쓰지만 ‘형식논리학’은 붙여 쓰니 말이다.
논리학이 형식적이라는 말은 논리학은 내용은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세계로부터 경험을 통해 주어진다. 논리학적 형식은 그 자체로는 내용이 전혀 없는 순수한 것이다. 형식논리학은 하나의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 변형하는데, 표현되는 형식은 바뀌더라도, 내용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 각각의 형식은 비록 다르게 보이지만 내용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유클리드의 기하학적 순수 공간에서 도형을 이리저리 이동하더라도 그 도형이 전혀 변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형식논리학을 대신하여 헤겔이 제시하는 새로운 논리학은 “사유를 고찰하는 데서 내용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내용은 자체 내에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오로지 그런 형식을 통해서만 영적 생기를 지닌 내용이 된다.” 거꾸로 “형식 자체는 다만 어떤 내용이 그 속에서 비추어지는 가상[Schein eines Inhalts]으로 다시 말하자면 이 가상[Schein: 내용]에 외적인 것[형식]이 가상[Schein]으로 전환된다.”(2판 서문, 17쪽) [주2]
[주2] 위의 구절 가운데 뒷 문장에서 헤겔은 가상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이 문장은 함축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이해하기가 까다롭다. 여기서 ‘가상’이라는 말은 마치 거울처럼 자기를 부정하면서 자기에 대해 마주하고 있는 것 즉 본질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용 속에서 형식이 스스로 떠오르며, 형식은 자기를 내용 속에서 드러낸다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이 함께 상호작용하는 관계가 형식논리학에 대립하는 새로운 논리학의 기본 개념이 된다.
이렇게 “논리적 고찰 속으로 내용을 끌어들인다면”, 헤겔 말대로 논리학은 세계와 독립적인 사유의 법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세계가 되며 거꾸로 “논리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개념, 즉 사태가 된다.”(2판 서문, 17쪽) 그러니 헤겔 말대로 논리학은 세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밝히는 형이상학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3)
하지만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어떻게 내용에서 형식이 탄생하고, 형식이 내용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전자는 마치 물활론처럼 들린다. 후자는 신의 창조론을 의미한다. 헤겔을 물활론자나 창조론자로 이해하면 쉽겠지만, 그렇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인간인 헤겔이 어떻게 신의 창조과정을 안다는 말인가? 또 물활론이라면 전적으로 자발성 또는 우연성에 맡겨지는 것인데, 자발성을 학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인가?
더구나 헤겔은 이런 새로운 논리학이 칸트의 선험철학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당혹하게 된다. 알다시피 칸트는 일반 논리학에서 나온 범주를 경험을 구성하는 범주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칸트 선험철학의 전제는 일반 논리학이다. 칸트는 한 번도 논리학 자체를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적 정신으로부터 새로운 논리학 즉 내용을 지닌 논리학으로 전환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데도, 아직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으니, 정말로 당황스럽다. 칸트의 철학으로 칸트의 전제를 비판하는 헤겔의 태도는 우리를 아찔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헤겔이 이해하는 칸트의 비밀을 이해해야 한다. 칸트가 말하지 않은 것을 헤겔은 칸트의 뜻으로 알았으니 말이다. 칸트 비밀의 핵심에 범주라는 개념이 있는 것으로 보이니, 범주라는 말을 이해하려 거슬러 올라가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나는 범주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아서, 고대철학을 하는 분을 만나기만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론이 무엇을 다루었느냐고 물어본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했다. 물론 스스로 범주론을 읽으면 되는데, 유감스럽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직접 읽을 자신이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위키피디아를 참조해 보니, 다행스럽게도 위키피디아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항목은 내가 희망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나의 물음은 이런 것이다. 사물이나 생물은 유와 종으로 분류된다. 그 최고의 류를 범주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범주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분류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내가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는 10가지다. 범주를 중세에 라틴어로 ‘praedicamenta’라고 부른다고 한다. [주3]
[주3] 어원적으로 범주는 술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주어가 될 수 있는 것 곧 실체이다. 중세 번역어에 오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전 프래디카멘타와 프래디카멘타로 나누어지는 데, 전자에서는 동의어와 파생어, 주어[subject]에 대해서[of] 말해지는 것과 주어 안에[in] 있는 것의 구분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에 중요한 것은 후자이다. 후자는 다시 네 가지로 구분된다. 주어에 대해 말해지지만 주어 안에 있지는 않은 것과 주어에 대해 말해지지는 않지만 주어 안에 있는 것, 주어에 대해 말할 수도 있고 주어 안에 있기도 한 것, 마지막으로 주어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주어 안에 있지도 않은 것이다. 이 네 번째가 곧 실체라는 범주가 된다.
이상에서 언급된 것만 보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 사물을 분류하는 범주를 다룬 것은 아니고 다름 아닌 언어를 분류하는 범주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사실은 열 가지 범주를 다루는 프래디카멘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열 가지 범주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실체,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상태, 행동, 능동, 수동이다. 이 열 가지 범주는 절대로 사물을 분류하는 최고 유로서 범주가 될 수가 없다. 이 범주는 우리의 언어의 문법적 범주이다. 판단은 주어와 술어로 나누어진다. 주어가 되는 것이 곧 실체이며, 양은 주어의 외연을 말한다. 질과 관계(형용사) 상태와 행동(동사)은 모두 술어를 문법적으로 분류한 것이다. 시간과 장소, 능동과 수동은 문법적으로 양상을 표현하는 범주가 된다.
4)
이처럼 범주가 문법적 범주라는 사실은 더 나가서 주어가 될 수 있는 실체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 실체와 제이 실체로 나누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제일 실체는 개체다. 여기서 실체는 “주어에 대해 말해질 수 없으며, 주어 안에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하나를 실체를 거론한다. 그게 제이 실체라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이나 개와 같은 종적 본질이 된다. 이것은 주어에 대해 서술될 수 있는 술어의 일종이다. 그런데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실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많은 문장에서 종적 본질이 주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실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은 흔히 사용하는 문장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문장도 자주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종적 본질을 단순한 보편적 술어와 구분해서 실체에 포함했는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용주의적, 경험주의적 철학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원칙에 어긋나도 사실이 그러하면 받아들인다는 정신이다.
그러나 철학자로서는 이런 경험적 실용적 정신에 머무를 수가 없다. 왜 다른 보편적 술어와 달리 종적 본질을 드러내는 술어는 주어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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