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 1-변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1-변명1
1)
내 삶에서 아마도 마지막이 될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헤겔 논리학을 이해하는 일이다. 헤겔의 논리학은 헤겔 연구자가 흔히 신의 언어라고 말하는 사변적 언어로 쓰였으니, 그 신을 믿는 신도들의 마음에 이심전심으로 전해져 왔다. 그 비밀의 영역은 일반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
내가 철학이라는 학문에 뜻을 두고 대학원에 처음 입학했을 때 공부하고자 했던 것은 후설 현상학이었다. 현상학에 뜻을 두었던 것은 청년 시절 내 영혼을 사로잡았던 철학이 바로 실존주의이었고 실존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방법론인 현상학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대학원에 입학했던 시대가 80년대 초이었으니 누구도 시대의 요구에 등을 돌릴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때 후배 하나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헤겔의 변증법만 제대로 안다면 세상을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가 레닌이 철학 노트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데, 아직 그 원전을 찾아보지 못했다. 그 말에 홀려서 헤겔의 논리학을 대하게 되었으나, 솔직히 말해 그건 범인으로선 접근이 불허된 신의 영역이었다.
그로부터 무려 50년이 지나갔다. 아직도 나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자신하지는 못한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50년 간 헤겔을 연구했음에도 풍월은 커녕 말도 아직 더듬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세상을 들어 올리고 싶다는 야망은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언젠가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을 이해해, 일반인들도 이 비밀의 영역에 잠시 들러 볼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욕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나이가 많다.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한다. 무엇보다도 눈과 귀와 체력이 무너지고 있어, 얼마 가지 않으면, 더는 읽고 쓰는 것조차 어렵지 않을까 우려한다. 나는 그간 하던 많은 일을 이미 내려놓았다.
남은 힘을 기울여, 나의 아마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작업을 시작하고자 한다. 원래 이 일을 계획하기로는 몇 년 전이다. 같은 헤겔 학도였던 김우철 선생과 헤겔 논리학 본질론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고, 함께 책을 읽는 일이 끝나면, 이 일을 시작하고자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생은 코로나로 희생되고 말았으니, 풍선에 바람 빠지듯이 선생의 죽음과 더불어 그 의욕도 사라졌다. 그간 매달렸던 헤겔 미학에 대한 해설이 끝나자, 논리학의 해설에 도전하고 싶은 의욕이 되살아났으니, 이게 내가 지닌 운명인지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50년간 이책 저책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결과 헤겔의 논리학을 나름대로 약간은 이해하는 바가 생겼으니, 이거라도 남겨 놓으면 후대에 청포를 입고 오는 사람이 있어 딛고 설 계단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여 이제 헤겔의 논리학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두서 없이 늘어놓으려 한다. 먼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변명부터 올린다.
2)
실제 내용은 헤겔 논리학에 관한 설명이지만, 거창하게도 형이상학 산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헤겔이 대학에 처음 강사가 되었던 게 1801년이었다. 그해 겨울 학기에 헤겔이 개설한 강좌의 제목이 ‘논리학과 형이상학’이었다. 오늘날 생각하면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무관할 것처럼 보인다. 형이상학은 세계의 근원적 본질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논리학은 인간의 사유의 일반 원리를 다룬다.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사유는 서로 대립하는 데 왜 논리학이 형이상학과 연관되는 것일까?
논리적으로 사유하기만 한다면, 세계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일까? 논리에 맞지 않는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런데 논리학을 공부해 본 사람은 안다. 나는 철학과 입학해서 처음 논리학을 배웠는데, 거의 기계적인 작업이었다. 차라리 나중에 배운 기호 논리학의 경우 수학적 추론의 흥미라고 끌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2000년간 내려왔다는 논리학은 정말 따분한 작업이었다.
논리학은 타당한 사유와 부당한 사유를 구분하고 자주 사람들이 빠져드는 부당한 오류 추리를 막을 수 있다는 실용적 목표가 있기는 했으나, 그런 실용적 목적이 철학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왜 도움이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법을 모르는 사람이 말을 더 조리 있게 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논리학을 모르더라도 더 논리정연하게 사유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런 사람이 세계의 본래 모습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철학 하는 사람의 글을 보면 문장이 비논리적인 경우가 더 많다. 철학을 하다 보면 자연히 비논리적 문장을 쓰게 되는 것은 철학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철학처럼 비논리적인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위대한 철학자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문장을 읽어보라. 하다못해 논리 철학의 대가인 콰인의 논문을 읽어보아도 논리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를 내보이면서 이게 둘로 보이는 사람이 철학자라고 자주 우스개처럼 말해진다.
그런데 헤겔은 논리학과 형이상학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보았던 게 틀림없다. 그러기에 강의 제목을 ‘논리학과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도대체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
3)
헤겔은 다음 학기인 1802년 여름학기 강의 예고에서 ‘논리학과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의 저서를 발간하겠다고 했다. 그는 1804/5 강의 수고 ‘논리학, 형ㅇ이상학, 자연철학’을 남긴다. 아마도 정서한 것을 보니, 이게 발간 원고로 보인다. 어떻든 발간되지는 않았다. 이 수고는 헤겔 서고판, 전집7권에 실려 있다. 그 제목만 보면, 훗날의 논리학과 자연철학의 흔적이 보이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이 누락되어 아직은 사상이 형성 중이라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805년에 헤겔은 그 대신 철학 체계 전체를 건드리는 저서를 발간할 계획을 세웠고 그 서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 서문이 아주 길어졌고 철학 체계에 관한 저서는 포기되면서 그것이 1807년 발간된 정신현상학이 되었다.
1807년 헤겔은 예나를 떠나 밤베르크로 이주해 밤베르크 신문을 편집했다. 1807년 밤베르크 신문에 실린 정신현상학 광고를 보면, 헤겔은 곧이어 논리학과 자연철학, 정신철학을 포괄하는 철학 체계를 발간하겠다고 했으나, 이 계획은 계속 미루어진다.
헤겔은 1808년 11월 밤베르크 신문사를 떠나 뉘른베르크 김나지움 교사가 되었다. 이 시기 헤겔은 니트함머의 권고를 받아서 김나지움에서 강의를 위한 논리학 교재를 계획했다. 헤겔은 니트함머의 권고에 대답하면서 시간을 주면 먼저 자기의 논리학을 완성한 다음에 교재를 만들겠다고 했다.
김나지움에서 철학 강의를 위해 교재(수고)가 작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부분이 논리학에 관한 것이다. 다행히 이 논리학은 국내 위성복 교수가 번역해 ‘김나지움 논리학 입문’(용의 숲, 2008)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했다. 그 제목만 보면 나중에 등장하는 논리학과 기본적 구조가 동일한 것을 알 수 있으니(객관 논리 존재론과 본질론, 주관 논리 개념론), 이 시기에 이미 어느 정도 헤겔의 논리학의 골격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그가 논리학을 위한 작업을 그치지 않았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1811년 니트함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 해(1812년) 부활절까지는 논리학이 발간될 것이라는 희망을 적어놓았다. 실제 1812년 부활절에 발간된 것은 겨우 논리학 1부 1권 존재론에 그쳤다. 존재론과 함께 보낸 본질론은 출판사 사정으로 그해 년 말에 가서야 발간되었으나, 개념론은 헤겔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이전하는 1816년에 가야 발간되었다. 5년이나 뒤늦게냐 2부가 발간되었다는 사실로 보면, 헤겔이 좀 서두른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1811년 헤겔은 결혼했고, 그의 혼외 자식인 루드비히를 부양하기 위해 프로만에게 양육비를 보냈어애 했고, 김나지움을 벗어나 대학으로 나가고 싶기도 했는데, 그 모든 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저서였고, 그 저서는 당시 학계의 분위기 상 논리학이나 형이상학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필자가 쓸데 없는 고민을 한 것 같다.
4)
흥미로운 것은 헤겔이 1812년 초판 논리학을 발간했을 때, 이제 더는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은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논리학이 더는 형이상학이 아니라는 뜻인가? 1812-16년 사이 발간된 그의 논리학 초판 서문이나 서론을 읽어보면, 기존의 형이상학이 사라졌다는 한탄은 있지만 그렇다고 논리학이 형이상학이라는 주장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논리학은 이제 학문과 관련해서 제시된다. 즉 논리학은 다른 구체적 학문 즉 자연철학이나 정신철학과 구별되는 일반적인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형이상학 역시 존재로서 존재 즉 일반적 존재를 다루는 학문이므로, 헤겔의 논리학이 기존의 형이상학인 것은 틀림없다고 보겠다.
논리학이 발간된 후 그가 스스로 쓴 출간 광고문에는 논리학이 새로운 형이상학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철학에 일찍이 너무 성급하게 추방된 신비를 진정하게 해명된 형이상학을 통해 다시 부여하고”
헤겔의 논리학 1부 존재론과 본질론을 조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면,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존재와 본질을 다룬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책은 명백히 형이상학적인 책이다. 이런 1부 객관 논리학에는 기존의 논리학과 관련된 어떤 부분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2부인 주관 논리학의 경우는 그 첫째 장에서 개념과 판단, 추론을 다루므로, 굳이 말한다면 논리학이라 해도 되겠지만, 존재와 본질을 다루는 객관 논리학을 논리학이라 부른 것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명백히 형이상학 책에 대해 논리학이라는 말로 부르니, 공자가 알면 정명론을 부정했다고 화를 내지 않을까?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것을 통한으로 간직한 홍길동이 생각난다.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이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아니면 안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렇다고 나로서는 헤겔이 형이상학이라는 말 대신 논리학이라는 말을 선택한 이유가 어느 정도 짐작된다. 헤겔로서는 형이상학이나 존재론보다 논리학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 점을 앞으로 말하려 하나, 일반인이 이해하기로는 내용상 논리학보다는 오히려 형이상학이라는 말로 규정하는 것이 더 쉽게 다가갈 것 같다. 그래서 논리학이라는 말 대신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는 것을 밝히느라 글이 좀 길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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