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언어와 분석철학의 전통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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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언어와 분석철학의 전통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내가 철학을 처음 배우던 시절에는 한국 사회의 80년 대 분위기 때문에 주로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이 주도했다. 처음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이 들어왔고, 다음에는 시대와 현실을 담은 헤겔 철학이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변혁 철학의 심장과 브레인 역할을 하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철학이 한 시대를 휘어 잡았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영미권의 분석 철학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반 시대적이어서 특별히 관심 있는 학생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외면 당했다. 비판적 합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K. 포퍼의 철학 조차도 완전히 무시당했다.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가서 내가 배운 철학은 프레게와 러셀과 논리실증주의자 그리고 전후기 비트겐슈타인 등이었다. 이들 철학은 일단 분석적이고 명쾌해서 접근하기가 쉬웠다. 덕분에 나도 석사 3학기 때 까지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을 가지고 논문을 쓸까 고민을 했었다.

분석 철학은 영미 철학의 전통에서 성장한 철학이다. 영국의 경험론은 대체로 반 형이상학적이고 반목적론적이었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이 실체가 무엇이고, 그것이 하나인지 둘인지 아니면 라이프니츠 처럼 수도 없이 많다고 하는 지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 로크는 적어도 우리 정신 밖의 실체인 X를 인정했지만, 그것이 무엇인 지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했다. 버클리는 그것을 지각적 표상으로 환원했다. 그의 유명한 “존재는 지각이다”는 명제가 그것을 말해준다. 데이비드 흄에 오면 이런 실체는 단순히 인상들의 다발로 간주된다. 불멸의 영혼이라는 실체는 감각의 다발이고, 뉴턴의 기계론적 인과법칙도 반복적 습관에서 이루어지는 연상의 법칙으로 주관화된다. 이런 면에서 데이비드 흄은 근대 경험론이 갈 수 있는 막다른 골목까지 간 셈이다. 20 세기의 ‘논리 실증주의’는 흄의 20세기 버젼이나 다름 없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역할을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애매하고 모호한 말들로 인해 철학의 문제들이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추방한다면 철학의 전통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그의 정신을 추종한 비엔나 써클은 세상에는 단 두 가지의 명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의미있는 명제’와 ‘의미없는 명제’가 그렇다. 수학과 논리학의 명제들, 그리고 경험적 검증이 가능한 명제들이 전자에 속하고, 가치 명제나 형이상학적 명제는 논리적인 명제도 아니고 경험적으로 검증이 되는 명제도 아니기 때문에 후자에 속한다. 비엔나 써클의 철학자들은 검증이론(verification theory)의 이러한 분석을 통해 철학의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러한 도발적인 주장들이 철학적 문제들을 다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끼친 공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엔나 써클의 일원인 루돌프 카르납은 그 당시 대단히 떠 받들어졌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모호하고 애매한 명제들을 하나 하나 까 뒤집으면서 분석 비판을 시도한 적이 있다. 철학을 형이상학의 모호한 구름 위에서 지상의 밝은 빛 한 가운데로 끌고 내려오려 한 것이다. 물론 형이상학의 전 체계를 낱낱의 명제들로 해체해서 명제 단위로 비판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하지만 카르납의 작업은 적어도 비판적 언어 철학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 셈이다. 이런 전통이 미국으로 건너가 분석 철학의 초석을 만들었다.

<트락타투스>(Logico-Tractatus)에 나타난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은 언어와 세계의 대응을 통해 명제의 의미를 단순화 시켰다. 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일상 언어의 문맥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의 쓰임을 통해 언어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저항이 없으면 더 빨리 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진공 상태를 가정했는데, 오히려 더 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들은 대륙의 철학자들처럼 사변의 전체로 얽혀 있지 않고, 일상 속에 살아 있는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만큼 이해하기 쉽고 철학적 작업이 무엇인 지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삶과 현실에서 유리된 추상 개념들을 현란하게 구사해야지만 철학을 하는 거라는 전통 철학의 모호한 환상을 확실하게 깨버린 것이다.

내가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을 할 때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에서 영미권의 분석 철학을 무조건 백안시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일상 언어에 기초한 에세이 철학을 하면서 분석 철학의 정신, 그들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 삶에 기초한 철학 등과 같은 분석 철학의 정신이 에세이 철학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철학의 정신을 살려서 삶과 시대의 문제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굳이 대륙권 인가 영미권 인가의 구분도 무색해질 수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미권의 철학에서 헤겔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헤겔 철학에 대한 논문과 연구서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분석 철학의 한계를 대륙 철학의 정신을 받아들여 돌파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가 있다. 독일 철학 역시 하버마스 이래로 어중쩡한 포지션 때문에 새로운 철학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영미권의 철학에 대해 적극 관심을 보이는 철학자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고정된 하나의 길만 고집하려는 것은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한계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형이상학자들이 믿는 전통적인 명제 하나가 있다. 화엄의 인드라 망처럼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는 하나이지만, 그것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다.”라는 명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본다면 진리는 그것을 어떤 길로 어떻게 접근하느 냐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한계를 인정한다면 동과 서, 그리고 고금의 벽을 얼마든지 벗어 던지고 철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와 장자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부활하고, 화엄과 주역의 존재론이 양자역학과 대화하고, 분석적 정신과 종합적 정신이 동양의 음양의 관계처럼 대대 관계를 이루어 하나의 방법론을 구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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