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해석에 대한 비판 1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신영복 선생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해석에 대한 비판 1
이종철(한철연 회원)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이 종철의 에세이 철학]에 실린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소개합니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돌베개, 2004)를 eBook으로 읽고 있다가 나의 생각과 다른 점이 있어서 몇 자 적어 봅니다. 중국의 고전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선생의 글은 읽기가 좋아 틈나는 대로 보고 있습니다. 동양의 고전과 철학을 감옥에서 독학으로 공부하고 사색한 선생의 사유는 깊이도 있고 단단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간혹 나의 시선으로 볼 때 적절하지 못한 대목이 눈에 거슬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단순한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명백한 오류일 경우에는 반드시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 책에서 선생은 서양의 존재론과 달리 동양은 철저히 관계론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선생이 서양을 존재론으로, 그리고 동양은 관계론으로 해석한 것 자체가 담고 있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존재론은 문맥상 실체론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잘 알다시피 서양의 존재론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해주는 원인, 즉 아르케(arche)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의 밀레토스 해안 지방에서 최초로 시작한 자연철학은 존재의 궁극적 원인을 물이나 공기나 불처럼 가시적인 것에서 찾거나 혹은 수(number)나 형상(form)과 같은 비가적인 것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르케를 개별자와 보편자 같은 실체(Substance)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변화하고 운동하는 관계(Relation)로 볼 것인지에 따라 존재론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존재는 하나이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와 “만물은 변한다”(panth rhei)고 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가 그 각각의 존재론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서양에서는 실체 존재론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런 현상은 근대의 합리론자들이나 경험론자들에 이르기까지 대세를 형성했습니다. 서양의 존재론이 운동이나 변화 그리고 관계를 인정하는 입장은 주로 사회와 역사를 철학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비주류의 해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반면 동양의 존재론은 <주역>에서 드러나듯 모든 것을 변화의 도이자 관계의 그물망으로 인식합니다. 주역은 유불도 삼교의 공통된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영복 선생의 취지를 정확히 반영한다면 서양은 존재를 실체로 이해한 전통이 강했고, 동양은 관계로 이해한 전통이 강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지적한 문제는 아마추어로서 독학한 선생의 연구 배경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논어>에 나오는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에 대한 선생의 해석은 상당한 오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선생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습니다. 중국의 고전을 일관되게 관계론과 실천의 관점에서 해석한 선생의 입장에서 충분히 붙일 수 있는 제목입니다. 선생은 이 부분을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 번역으로 그 의미를 드러내기 힘든 것은 학學과 사思의 대비 형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요.
“사思의 구성도 전田과 심心, 즉 밭의 마음이고, 밭은 노동의 현장, 실천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한자의 특성상 이런 글자 풀이가 의미는 있겠지만 그 글자가 들어 있는 문장의 맥락이나 선생이 늘 강조하는 다른 글자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순히 글자 자체를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선생이 경계하는 실체론적 사고에 갇힐 수가 있습니다.
선생은 자신의 이런 해석에 대해 전문 연구자(누군지 밝히지 않습니다)의 반론을 언급하면서 전田은 어린아이의 두개골에 있는 숨구멍이기 때문에 사思는 두뇌와 마음을 합한 것이라고 친절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고가 가슴이 아닌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거의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해석이고 견강부회로 곡해될 위험도 없지 않지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선생이 학學을 보편적 사고로 간주하고 사思는 관념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실천이나 그 기억 또는 주관적 관점으로 해석한 데 있습니다. 선생은 學而不思則罔에 대한 개인적 체험 이야기를 끌어들여 자신의 해석의 설득력을 높이려고 합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무릎 위에서 배운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할아버지는 책을 읽고 나서 반드시 30분 정도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나중에 감옥에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책을 읽고 생각을 해도 머리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뒤에 가서 언급하겠지만 이 대목은 선생이 곡해한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선생에 따르면,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소요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思를 경험과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선생은 드러 내놓고서 학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이고, 사는 특수한 것(specialism)이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나 실천이 사상된 보편주의적 이론이 현실에 어둡고, ‘사이불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보기에서 여기서 선생의 해석의 결정적인 오류가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선생은 학과 사를 정 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다음회에 계속)
출처: https://contents.premium.naver.com/leejongcheol/knowledge/contents/220801121307818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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