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㊾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㊾
1-3-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1) 지혜와 용기
[427d-428b]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네의 나라가 세워졌다고 말한 후에 그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고 행복하게 될 사람은 그중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고 말한다.(427d-e)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나라가 올바르게ὀρθῶς 세워진다면, 완벽하게τελέως 좋은ἀγαθός 나라이며 그에 따라 그 나라는 지혜롭고σοφός 용감하며ἀνδρεῖ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정의로운δικαία 나라라고 말한다.(428a) 그리고 이 가운데 무엇을 찾아내면ἐζητοῦμεν 나머지는 아직 못 찾은 것이지만 맨 먼저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을 알아보았을ἔγνωμεν 경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셋을 먼저 알아봤다면ἐγνωρίσαμεν 그것 또한 우리가 찾고 있던 것τό ζητούμενον을 알아본ἐγνώριστο 셈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나라에서 정의를 찾는 방법은 바로 정의를 찾아서 알아보거나 나머지 셋을 찾아서 알아보면 된다는 것이다. 아데이만토스가 이 말들 각각에 다 동의를 표하자 소크라테스는 바로 후자의 방법을 택해 나머지 셋 가운데 하나인 지혜σοφία를 찾아 알아보기 시작한다.(42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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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과정(375a-434c)에서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 통치자의 생활 방식과 임무 등 나라의 기본 틀을 언급한 다음에 이제 그렇게 세워진 나라가 과연 정의로운 나라인지 그리고 그러한 나라야말로 행복한 나라인지를 살핀다. 그것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지금까지 세워진 정의로운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자고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정의를 찾는 방식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J. Annas(1981) An intriduction to Plato’s Republic. p.109-111 참고) 우선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올바르게 세워지면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왜 그 나라가 완벽한지 따로 설명이 없다. 둘째 그 나라가 완벽하게 좋은 나라임을 근거로 바로 그 나라가 우리가 이제 찾고자 하는 정의를 포함 지혜, 용기, 절제 등 4가지 덕들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의아스럽다. 왜냐하면, 이 말은 완벽하게 좋은 나라는 당연히 4가지 덕을 갖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인데 그 전제의 근거 또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로 소크라테스는 그 4가지 덕 중 정의를 바로 찾아 알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나머지 셋을 먼저 알아봤다면 정의를 알아본 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세 가지 덕을 아는 것만으로 정의라는 덕까지 알 수 있는 것인지 그 근거 또한 불분명하다. 정의는 따로 살피지 않아도 세 가지 덕을 찾아 알면 당연히 알 수 있다는 것일까?
*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당연하듯 동의하고 있다. 물론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수준에서 동의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아데이만토스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데는 앞서 다루어진 내용에서건 우리가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에서건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이유가 될 만한 것들을 생각해보자. 우선 첫째 의문과 관련해서는 앞서 다룬 내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어 보인다. 앞서 이 나라는 자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자기의 소질과 적성에 따라 서로 분업적으로 의존하여 자족을 실현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애초 의도대로 올바르게 나라가 잘 세워지면 애초 목적대로 모두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족적인 삶을 이룰 수 있다. 애초 자족할 수 없는 결핍된 삶에서 상호 협동적 공동체를 통해 자족적인 삶이 가능해졌다면 소크라테스로선 그 나라를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문제와 관련해서도 앞선 설명들에 의지해서 일정 부분 설명이 가능하다. 앞서 논의에서(412d-414b) 우리는 이곳의 덕목들과 그 특징들이 일종의 총론적 서론의 형식으로 예비적으로 드러나 있음을 살핀 바 있다.(강해45 참고) 소크라테스는 그곳에서(412d) 이미 현명(phronimos)함을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능력으로서 제시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에게 현명함(phronēsis)은 지혜(sophia)와 같은 의미를 갖추고 있다.(433b) 그리고 그곳에서(413b-e)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고유한 덕으로서, 강제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 갖추어진 능력과 어떤 환락의 상황에서도 홀리지 않고 의젓함을 유지하는 능력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능력들이 각기 용기와 절제의 덕임을 간취하는 것은 전후 문맥상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 그러나 위와 같이 앞에서 논의된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이유를 아예 다른 곳에서 끌어와 설명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그들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플라톤이 국가의 덕으로 새로 발견한 덕목들이 아니라, 그리스 사회에서 좋은 삶의 토대로서 4가지 기본 덕목들, 이른바 4주덕(四柱德, the cardinal virtues)으로 이미 확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화 상대자들은 사주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별다른 이의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 점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로 플라톤 대화편은 물론 피타고라스학파의 교리와 핀다르(Pindar)의 네 가지 덕(tessares aretai), 크세노파네스의 <회상>(III 9 1-15, IV 6 1-12), 아이스퀼로스의 <9월> 등 여러 곳을 제시한다.(J. Adam note 참고) 실제로 플라톤은 여러 대화편을 통해 비록 이곳과 그대로 일치하지 않지만 이러한 덕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프로타고라스> 329c, <라케스> 199c, <메넥세노스> 78d, <고르기아스> 507b, <파이돈> 69c, <법률> Laws 631c에서 절제, 정의, 용기 및 슬기로움이 함께 거론되고 있는데 앞서 인용했듯이 현명함(phronēsis)은 지혜(sophia)와 같은 의미이다. 다만 경건(hosioēs)은 포함되지 않거나 정의와 같은 것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이미 사주덕이 대화자들 모두에게 따로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친숙한 덕목들이었음을 보여준다.(J. Adam. note 참고) 다시 말해 그들 모두에게는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한다면 그 사주덕은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하는 덕목들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이곳에서 사주덕과 관련하여 일단 전통적인 관념에서 출발하되 이제 새롭게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면서 기존의 관념과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 사주덕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셋째 의문에 대한 이해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지혜, 용기, 절제의 의미를 찾아 안다고 해서 아직 살피지도 않은 정의까지 그 내용적 의미를 찾아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과 하나가 포함된 4개의 과일 중 3개의 다른 과일을 찾는 것으로 사과를 찾는 단순 귀류법과도 거리가 있다. 찾는 것은 정의의 정재(Dasein)가 아니라 상재(Sosein) 즉 내포이다. 이렇듯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판단해도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했을까? 여러 주석가들이 이에 대한 해명을 내놓고 있지만(J. Adam note 참고) 사실 그리 신통치는 않다. 굳이 앞서 논의된 내용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아래와 같은 설명 정도이다. 앞서 살폈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미 제2권(370b – 374c)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모든 사람은 각자 나라와 관련된 일 중에서 자기 성향이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 일에 종사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고 그 천성과 소질에 따라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를 임명한 바 있다. 이것은 정의로운 나라란 다름 아니라 구성원들 모두 자신의 고유한 덕을 기초로 각기 자신의 역할을 하는 나라임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의 고유한 덕들로부터 ‘각자 자기 할 일을 함’이라는 정의의 덕을 추론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433a에서 정의의 의미를 드러내기에 앞서 제2권의 내용을 정의를 규정하는 바탕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다만 문제는 ‘각자 자기 할 일을 함’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중대한 덕목임에도 그것이 정의로 규정되는 것은 이후의 논의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의 말에 바로 동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논의에 대한 혜안을 가졌으면 모를까 여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428c-429a]
* 소크라테스는 우선 이 나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κατάδηλος 것은 지혜이고 그 지혜는 이상한ἄτοπον 뭔가가 있다고 말한다. 아데이만토스가 그 이유를 묻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답한다. 먼저 그는 이 나라는 진정으로τῷ ὄντι 지혜로운 나라인데 그 까닭은 숙고εὔβουλος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숙고를 잘하는 것은 무지ἀμαθίᾳ 때문이 아니라 앎 때문이므로 숙고를 잘함은 일종의 앎ἐπιστήμη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앎은 목수τέκτων나 농부들이 아는 앎들이 아니다. 그런 앎은 목공이나 농사에 대한 최선의 상태를 숙고하는 것이지만 그 숙고로 인해 나라가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것에 능하다고만 불릴 뿐이다.(428c) 요컨대 지혜는 일종의 앎이되 ‘나라 안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를 위해서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시민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ὁμιλοῖ 가장 좋을지를 숙고하는 앎’이다. 그리고 그 앎은 수호하는 앎이고 완벽한τέλειος 수호자로서 통치자들에게 있는 앎이다. 그리고 통치자들의 그러한 앎을 통해 나라는 숙고를 잘하는 나라, 진정으로 지혜로운 나라라고 불린다.(428d) 그리고 그러한 앎을 가지고 있는 수호자들은 자연적 성향에 따라 수가 가장 작은σμικροτάτῳ 집단ἔθνος이자 가장 작은 부분μέρος이고 그 집단에 있는 앎 때문에 전체가 지혜롭다.(429a) 요컨대 이 앎은 앎들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지혜라 불러 마땅한 앎이고 본성상κατά φύσιν 가장 수가 적은 통치자들이 그 앎에 참여하기에 적합한 이 부류γένος들이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넷 중에서 하나를 찾아냈고 그것이 나라의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찾아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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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지혜(sophia)를 ‘숙고를 잘하는 앎’으로 규정한다. ‘숙고’로 옮긴 그리스어 εὔβουλος(euboulos)는 ‘take counsel, deliberate, determine or resolve after deliberation’의 뜻을 가진 동사 βουλεύω(bouleuō)에서 나온 말로서 ‘뭔가를 결정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사려 깊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서 나랏일 전체에 관한 최고 의결기구인 평의회(boulē βουλή)도 이 말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목공이나 농부도 숙고한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자처럼 나라 전체에 관한 것을 숙고하지 않고 자기 일에 한정해 숙고하므로 지혜라고 하지 않는다. 지혜는 ‘숙고를 잘하는 앎’이되 ‘나라 안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해서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시민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가장 좋을지를 숙고하는 앎’인 것이다. 요컨대 이곳에서 지혜는 나랏일 전체를 숙고하는 정치적 통치 능력으로서 총체적 앎이다. 그리고 유념할 것은 이 나라가 지혜로운 나라인 까닭은 이 나라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자로 있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지혜로운 자가 통치하지 않는 한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
* 그런데 플라톤에게 있어 숙고를 통한 총체적인 앎으로서 지혜는 여기에서처럼 나랏일 즉 통치 영역에만 한정된 앎이 아니다. 점차 밝혀지겠지만 지혜는 원천적으로 총체적 앎의 극치로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앎에 이르기까지 사물과 사태에 관한 총체적인 앎 그 자체를 의미한다.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으로 불리는 것도 이미 철학적 앎의 기저에 총체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곳에서는 논의 계획과 순서에서 아직 철학자로서 통치자를 논하기 이전이므로 소크라테스는 일단 지혜를 나랏일과 관련한 통치자의 총체적인 숙고 능력, 즉 통치자만 유일하게 갖는 덕으로 한정하여 말하고 있다. 요컨대 여기에서 통치자는 아직 철학자로서 통치자는 아니다. 진정한 지혜를 가진 철학자로서 통치자는 제6권과 7권에서 다룬다.
* 그런데 나라에 필요한 부분적 역할을 나름의 수준에서 숙고하여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을 수 있어도 나라라는 공동체 전체의 선을 숙고하고 그에 필요한 역할과 기능을 총체적으로 숙고하는 앎으로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나라 안에서 소수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가장 작은 집단(ethnos), 부분(meros), 부류(genos)라고 부른다. 물론 이들의 수를 정확히 계산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지난 강해(강해 46)에서도 살폈듯이 아무리 수호자까지 포함하여 크게 잡아도 1.5%에서 3% 정도로 추정될 만큼 극히 소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혜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말(428c)은 이렇듯 소수의 지혜 있는 자가 나머지 대부분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 누누이 살폈듯이 통치자들은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소수의 특권 계급과 전혀 거리가 멀다. 그들은 소수이지만 여느 특권 계급처럼 사유 재산은커녕 가족도 꾸리지 못하고 통치권력 또한 여럿이 돌아가며 수행하며 기간 또한 한시적이다. 그에 비해 나머지 시민들 모두는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있고 결혼으로 가족도 꾸릴 수 있고 평생을 자기 일에 종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통치자 혼자 전제 권력을 종신토록 휘두르고 시민들 모두는 사유 재산도 가족도 가질 수 없는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공산주의 사회’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권력자들은 시민들과 달리 어떠한 재산도 주택도 가질 수 없으며, 일정한 지역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고된 훈련을 수행해야 하고,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자기 가족으로 여기면서, 오직 시민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서로 돌아가며 한시적으로 나랏일을 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을 특권층이라고 선망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의 대화자들마저도 이미 그런 사람들이 어찌 행복할 수 있냐고 반문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 권력자들의 횡포와 부정부패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사람들은 감탄하면서 그들 권력자에게 선망이 아닌 연민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 나라에서는 권력자들이 그렇게 갇혀 지내면서 아예 재산조차 가질 수가 없네!’라고.
* 이 부분에서 주목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설명하면서 숙고의 대상에 이 나라와 이 나라 시민은 물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가장 좋을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현대의 정치적 현실에 적용할 때 일단 2000년이라는 시대적 격차가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하지만, 일반적인 주제에서조차 그 어려움이 뒤따르는데 그 대표적인 영역이 곧 국제관계에 대한 정치철학적 이해 영역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정치철학적 관심사의 경우 비록 다른 나라의 침입이나 내전을 막는 게 근본 목표로 주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대책의 대부분은 국내 문제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대화편 전체에서 타국과 관련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약간의 교역 문제 이외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현대의 대부분 국가에서 이른바 세계화와 지구화가 국민국가 차원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정치철학 영역에서도 가히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문제에 대한 접근은커녕 해결을 위해 어떠한 방책도 구해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분명 플라톤 정치철학의 현대적 적용은 여러모로 근본적인 제한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구체적으로 국제문제를 다루는 부분들은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여기서도 통치의 중대사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듯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보여주고 있는 국제관계의 기본 원칙만은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다. 오늘날 국제관계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가 국가 간 갈등과 나라 간 빈부의 차이, 그로 인한 전쟁 발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면 플라톤은 이미 그에 대한 원칙적인 대답을 대화편 전체 내용을 통해 내놓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나 <법률>을 통해 서로 다른 여럿의 조화와 공존이 정치철학의 근본 목표이자 원칙임을 하나같이 견지하고 있고 그에 따라 타자와의 차별과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서 물질적 욕망에로의 획일화를 극력 비판하고 있다. 특히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연설을 다루는 <메넥세노스>는 전쟁을 해야 한다면 오로지 방어 전쟁에 국한할 것을 강조하면서 타국에 대한 침략적 지배를 통해 관철된 아테네의 제국주의와 페리클레스의 패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메넥세노스>(2021) 이정호 옮김, 아카넷 참고. 이 점에서도 알렉산더의 등장은 고대 그리스의 종말을 상징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기본적으로 나라 안은 물론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반패권주의 및 반제국주의에 기초한 평화와 공존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나라에서 가난을 가장 나쁜 최대의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한 나라에서건 여러 많은 나라에서건 빈부의 양극화를 없애는 것이 정치가들이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역할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국제적 현실은 어떠할까?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대부분 나라는 하나같이 무한경쟁과 노동의 유연성을 내세워 분배와 복지보다 나라 전체의 총량적 경제 성장에 매달리고 있다. 특히 강대국들의 경우,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여 AI, 챗 GPT 등 첨단 지식정보산업에 마치 미래의 사활이 걸린 듯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 그들은 모두 그것들이 초래할 수 있는 인간 지성의 왜곡과 노동의 소외, 환경의 파괴, 빈부의 세계적 양극화에는 눈을 감은 채, 오직 효율지상주의를 통한 패권주의적 우위를 달성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그러한 문명적 위기에 대한 총체적 비판은커녕 누가 먼저 그러한 전환에 발맞추어 살아남을 것인가 각론적 해결 방안에 대해서만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어떻게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각자도생하여 살아남을 것인가가 지적 성찰의 주제가 된 세상이다. 2000년 전 삶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 숙고 능력으로서 플라톤의 지혜와 현실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429b-430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같은 방식으로 용기ἀνδρεῖα와 그 용기가 나라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를 찾아서 알아본다. 우선 용기는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일에 복무하는 군인στρατιώτης들에게 있다. 즉 나라가 비겁한 나라인지 용기 있는 나라인지는 순전히 그들에 의해 결정된다.(429b)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입법가가 교육을 통해 알려 준 그런 류의 무서운δεῖνος 것들에 대한 믿음δόξα(doxa)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할σώσει 수 있는 힘δύναμις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429c)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힘을 용기라고 부르고 그런 의미에서 용기는 일종의 보전σωτηρία이라고 말한다. 즉 용기는 법과 교육παιδεία을 통해 생겨난 믿음의 보전 즉 무서운 것이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믿음의 보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함’이란 괴로움λύπη이나 즐거움ἡδονή, 또는 욕구ἐπιθυμία나 공포φόβος 속에서도 믿음을 내내 보전하고 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429d)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보전을 염색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염색공βαφεύς은 염색하고βάπτω 싶을 때면, 먼저 그 다양한 색깔의 모직 중에서 본래 흰색만을 가진 모직을 고르고, 그다음에는 최대한도로 색깔을 받아들이도록 적지 않은 공을 들여 미리 준비하고 나서, 그런 상태가 되어야 염색을 한다는 것이다.(429e) 그래야만 모직이 단단히 착색되어 세제를 쓰든 안 쓰든 세탁을 해도 광택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인στρατιώτης들을 뽑아 시가μουσική와 신체 단련γυμναστικῇ으로 교육하는 것도 염색의 예에서 보듯 그들이 우리의 설득을 가장 훌륭하게 받아들여, 적합한 자연적 성향과 양육을 갖춤으로써 무서운 것들에 관한 믿음이든 다른 것들에 관한 믿음이든 단단히 갖게 하여 강력한 세척력을 지닌 어떤 쾌락이나 고통과 두려움, 욕망도 그들에게서 그 믿음을 씻어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용기는 무서운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올바르고 적법한 믿음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전하는 힘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올바른 믿음일지라도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생긴 믿음을 짐승들과 노예들의 믿음에 비유하며 소크라테스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430a-b)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용기를 다만 시민적πολιτικός 용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데이만토스가 원할 경우 나중에 다시 더 잘 살펴보겠지만 여기에서는 정의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용기에 대한 탐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43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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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덕으로 지혜에 이어 용기(andreia)를 찾아 살핀다. 그에 의하면 용기는 법과 교육παιδεία을 통해 생겨난 믿음의 보전 즉 무서운 것이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믿음의 보전을 의미한다. 앞서(413b-e) 통치자들의 선발 조건에서도 시사되었듯이 이곳에서 말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함’이란 괴로움이나 즐거움 또는 욕구나 공포 속에서도 믿음을 내내 보전하고 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무서운 것들에 대한 믿음’에서 믿음δόξα(doxa)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신앙이나 신뢰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능력에 의해 획득된 어떤 ‘생각(a notion, true or false)’ 내지 ‘견해(opinion) 즉 넓은 의미에서 모종의 앎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앎은 고도의 철학적 인지 단계에서 획득되는 참된 앎으로서 앎(epistēme)이 아니라 다만 그보다 낮은 인지 단계, 이를테면 감각이나 경험을 통해서건 혹은 일정 수준의 추론을 통해서건 인지자 스스로 참이라고 믿고 있는 일종의 자기 확신으로서 앎이다. 그런 만큼 그러한 믿음은 진정한 앎과 비교하여 어떤 경우 그에 근접하여 올바른 믿음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잘못된 확신 즉 거짓된 믿음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플라톤이 말하는 믿음(doxa)의 정확한 의미와 인식론적 위계는 선분의 비유(509c-513e)를 다룰 때 따로 자세히 다룬다] 그런데 이곳에서 용기와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는 믿음은 오랜 기간 ‘법과 교육을 통해 생겨난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비록 고도의 인지 능력에 의해 획득된 앎에는 미치지 못하나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올바른 믿음’(orthē doxa)으로서 건강한 앎이자 능력인 것이다.(J. Adam note 참고)
* 소크라테스도 언급하고 있듯이 무지한 노예도 용감하고 오늘날 깡패들이나 조폭들도 싸울 때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용감하다. 이들 모두도 그럴 수 있는 믿음 즉 나름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주인이나 두목으로부터 생계도 보장받고 지위와 금전 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모두 신분적 예속이나 조건에 기초해 있으므로 신분이 달라지거나 조건이 달라지면 언제든지 뒤바뀌거나 배반할 수 있는 조건부 생각이자 유동적인 믿음이다. 동물도 살기 위해 본능으로 용감하지만, 더 강한 것 앞에서는 바로 꼬리를 내리거나 도주한다. 충성스러운 개조차 먹이를 주는 주인이 바뀌면 바뀐 주인을 따른다. 그 믿음을 보전하는 힘은 일시적이고 본능적이어서 강렬한 듯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용기는 이와 달리 오랫동안 법과 교육을 통해 생겨난 올바른 믿음이자 그 믿음 자체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보전하는 일관된 힘이자 능력으로서 덕이다. 특히 시가 교육과 신체단련 교육은 어떠한 경우도 탈색이 되지 않는 잘 염색된 모직물처럼 그러한 믿음을 자신에게 적합한 자연적 성향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다.
* 그리고 나라가 용기 있는 나라일 수 있는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나라의 수호자로 복무하기 때문이다. 용기 있는 사람이 수호자로 나서지 않거나 그런 사람을 수호자로 임명하지 못하는 나라는 결코 용기 있는 나라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수호자로 나서지 않는 그 개인 역시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앎은 곧 실천인 것이다.
* 이렇듯 용기는 단순히 용맹한 행위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의미 이전에 그 행위를 가능케 하는 굳세고 올바른 믿음 즉 내적인 앎이다. 현명한 사람은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의연하게 거짓과 탐욕을 멀리하지만, 어리석고 무지한 자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의 용기와 무지한 자의 만용을 가르는 것은 진정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진정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즉 ‘진정한 가치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앎은 능력 곧 힘이자 덕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에서 용기를 덕이자 믿음으로 말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용기를 힘이자 능력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 용기는 ‘올바른 믿음의 보전’이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은 올바르다는 점에서 앎에 근접해있지만 믿음인 한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epistēme)에는 못 미친다.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의 용기를 ‘시민적 용기’(politikē andreia)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중에(500d) 언급되는 시민적 덕(politikē aretē), 평민적 덕(dēmotikē aretē)도 이곳에서 언급되는 시민적 용기 수준의 덕을 가리킨다. 요컨대 시민적 용기는 진정한 앎으로서 용기에는 못 미치지만(<라케스> 195a, 196e ff., <프로타고라스> 349d)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관여되어 있으므로(제6권 506a 참조) 믿음이되 ‘올바른 믿음’(orthē doxa)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철학과 지성 없이도 습관과 훈련을 통해서 생길 수 있는 것’(<파이돈> 82a-b) 즉 오랜 기간 시가와 체육 교육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신념이자 확신이다. 요컨대 수호자들은 무서운 것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올바른 믿음을 확고하게 내면화하고 있어서 어떠한 상황에도 그 믿음을 흔들리지 않고 보전한다. 그리고 이 올바른 믿음은 고도의 철학 교육과 훈련을 통해 진정한 앎으로서 상승할 수 있다. 다만 현 단계 수호자의 경우 믿음을 앎으로 상승시키는 철학적 성찰의 능력은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수호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군인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시민적 용기는 수호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앎으로서, 시민들에게는 최선의 교육 목표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도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덕으로서 용기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시민적 용기로 불렀을 것이다. 시민들은 최선의 시민적 용기를 갖고 수호자를 따르고 견고하고 올바른 믿음을 지니는 수호자는 진정한 앎으로서 용기를 지닌 통치자를 따라 나라를 지킨다. 종국적으로 지혜는 물론 용기와 절제의 덕 모두 고도의 철학 교육과 훈련을 마친 수호자 중의 수호자 즉 철학자 왕을 통해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이자 덕으로서 구현된다.
* 플라톤이 <국가>에서 나라를 세우는 과정을 잘 들여다보면 나라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청소년기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거론하고 20세에 이르면 수호자를 선발 임명하고 그 후 고도의 철학 교육과 현장 실습 단계를 거쳐 통치자 즉 철학자 왕이 되는 방식으로 기본적으로 발생론적인 단계와 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지혜에 관한 논의에서도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통치자의 덕과 앎을 논의하기는 하되 좋음의 이데아를 본 ‘철학자 왕으로서 통치자’를 논하는 단계까지는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를 시민적 용기로 제한하면서 여기서 용기에 대한 탐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430c) 앞에서 언급된 교육과 양육의 목표는 나라의 덕을 다루는 현 단계로서는 ‘올바른 믿음’ 정도 수준의 앎이다. 그러나 나중에(6권-7권) 철학자로서 통치자가 다루어질 즈음에 이르면 지혜, 용기는 물론 절제, 정의 모두 통치자가 갖추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앎이자 덕임이 밝혀진다. <국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맞이하는 난관의 대부분이 ‘철학자 왕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을 다루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루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끝-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427d-434c) (2) 절제와 정의.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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