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르’ – 음악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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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르’-음악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1) 타르의 몰락

영화 ‘타르’는 레즈비언이자, 베를린 필하모니 수석 지휘자인 타르의 몰락을 그리는 영화다. 그녀는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에 선 여성이다. 그녀는 줄리아드 교수이며, 자서전 ‘타르가 타르에 대해’를 출판했고, 아코디언이라는 여성 음악가를 육성하는 시민 단체를 맡고 있다.

그런 그녀를 몰락시킨, 그것도 한순간에 몰락시킨 것은 그녀의 성적 충동이다. 그녀는 이미 오케스트라의 제1 바이올리니스트인 여성과 함께 살고 있다. 그 외에도 그녀는 비서인 프란체스카나, 아코디언 소속 학생인 크리스타와도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암시된다, 그런 그녀에게 러시아에서 건너온, 아직 소녀 티를 벗어나지 않은, 발랄하고 육감적인 느낌을 주는 첼리스트 올가는 새로운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필하모니의 부지휘자의 자리를 기대했던 프란체스카는 그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자 크리스타와 타르의 관계를 폭로한다. 크리스타의 부모가 그녀를 언론에 고발하자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게다가 타르가 프란체스카를 대신하여 비서로 삼아 데리고 뉴욕에 출장 간 올가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그녀는 갑작스럽게 추락하고 만다.

성적 충동으로 한 인간이 몰락한다는 스토리만 놓고 본다면, 굳이 이 영화가 새로울 것은 없지만, 2시간 40분에 걸친 영화가 시종일관 관객이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몰락하는 타르 내면의 균열이다.

흥미로운 것은 타르 내면의 균열과 더불어 음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음악의 탄생은 타르의 몰락과 교차하고 있다. 처음 음악은 마치 딩동 하는 알림 소리처럼 마음에 떠오른다. 조금 지나면 음악은 어디선가 멀리서 들려오는 여자의 비명처럼 울린다. 그녀는 메트로놈 소리를 듣고 한밤중에 깨어나며, 살펴보니 메트로놈이 벽장에 감추어져 있다. 마음에 울리는 소리는 무언가 위기를 알리는 듯한데, 타르는 급히 오선지를 펼쳐 이를 음악으로 작곡해 나간다.

내면의 소리에서 음악이 탄생하는 모습은 키에슬로프의 영화 ‘세 가지 색깔-블루’에서와 마찬가지다. 거기서도 주인공 쥴리는 내면에서 점차 확대되며 들려오는 소리를 악곡으로 작곡해 나간다. 다만 ‘블루’에서는 죽음과 같은 절망에 빠진 쥴리의 내면에 조금씩 생명의 느낌이 되살아나면서 음악은 부풀어 오르는 생명감과 비례한다. 반면 영화 ‘타르’에서는 오히려 음악의 출현은 주인공의 몰락과 교차하고 있다.

2) 음악의 원천

음악과 몰락이 서로 교차하는 긴장의 정점에서 타르는 올가를 따라 어느 건물의 지하실로 내려간다. 마치 환상의 세계 속에 들어선 듯 지하실은 황폐하고 올가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타르가 지하실의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섰을 때, 거기엔 희미하게 호랑이 같은 물체가 으르렁거린다. 타르는 두려움에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올라가다 쓰러지면서 바닥에 얼굴을 크게 다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타르는 자신이 작곡하던 음악을 완성하게 된다.

영화 블루에서와 달리 생의 희망이 아니라 죽음에의 몰락이 오히려 음악을 탄생시킨다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상기시킨다. 쇼펜하우어, 그리고 그의 제자인 니체는 음악의 근원을 디오니소스적인 몰락에의 의지에서 찾았으니까 말이다.

과연 음악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 ‘블루’에서처럼 생에의 희망이 음악의 원천인가 아니면, 영화 ‘타르’에서처럼 몰락에의 의지가 음악의 근원인가?

영화 ‘타르’에서 감독은 영화에 들어가면서부터 어떻게 보면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전개한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이 보이는 타르와의 대담을 보여준다. 여기서 타르는 다음 번 작품으로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대부분은 이 작품(특히 4장)은 죽음을 그린 것으로 보지만, 그녀는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하겠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말러가 그녀의 연인인 알마에게 헌정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죽음과 사랑을 동시에 의미할 수 있는가? 영화 ‘타르’에서도 타르는 자신이 몰락을 경험하면서 작곡한 곡을 자신의 딸에게 헌정한다. 그 딸은(아마도 함께 살던 바이올리니스트의 딸인 듯한데) 타르가 유일하게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보살피는 딸이다. 여기서도 몰락에서 나온 음악이 생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죽음에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동시에 사랑, 또는 생에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어쩌면 죽음에 의지가 곧 생에의 의지, 사랑에의 의지인 것이 아닐까?

3) 음악의 자율성

이 영화에서 음악에 대한 물음은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첫 번째 대담 장면에 이어서 다음 장면에서 타르는 줄리아드 대학교에서 지휘법을 강의한다. 여기서 타르는 음대 학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타르가 바흐를 언급하자, 학생은 바흐는 반여성적이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음악이 음악가의 개인적 삶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음악은 고유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인지 하는 논쟁이 벌어진다.

타르는 음악은 자율적인 것이며 음악과 개인적인 삶은 서로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논쟁 중에 타르는 자신은 레즈비언이지만 자신은 음악 속에서 항상 신을 느껴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듯이 타르의 음악이 그 자신의 몰락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면, 음악이 자율적이라는 그녀 자신의 주장과 충돌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스토리 전개 대부분은 주로 클래식 음악에 기초한다. 영화 ‘타르’에서 흥미로운 것은 처음과 마지막에는 클래식과 대조되는 음악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처음 인트로 장면에서 오랫동안 어두운 화면을 보여주면서, 배경에 음악을 들려주는데, 아마도 아랍 쪽의 음악인 듯이 보인다. 음악은 비애적이지만 단조로운 여인의 한탄처럼 들린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부근에 나오는 음악은 타악기 위주의 사이키델릭한 전자 음악이다. 감독이 인트로와 마지막에 이런 음악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는 이런 음악을 통해 음악이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우리의 물음은 이렇게 종합될 수 있다. 음악은 자율적인가 아니면 삶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가? 음악은 삶 가운데 몰락하는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생에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음악이 지닌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헤겔의 음악론은 이런 이중성을 설명하는 데 하나의 디딤돌을 제시할 지도 모른다. 헤겔은 음악은 삶에서 나온 자연적 소리를 테마로 삼아 고유한 음악적 방법으로 이를 전개한다고 본다. 이는 마치 베토벤의 교양곡 9번에서 문들 두들기는 소리가 음악적으로 전개된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헤겔은 음악이 근대의 파토스적 인간을 표현한다고 본다. 이런 파토스적 인간이란 즉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오델로나 맥베스와 같은 인간을 말한다. 그런데 파토스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보듯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지만, 헤겔은 이런 파괴는 오히려 개인이 실체적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해방의 길이라 한다. 몰락이 곧 해방이라는 헤겔의 주장은 곧 음악의 이중성을 설명할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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