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일지(5)[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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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철학일지(5)

1)

앞에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관련되어 두 가지 이채로운 일 중 한 가지를 소개했다.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제 또 하나의 이채로운 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앞에서 나는 많은 인문학 연구자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세워질 때, 철학연구자들보다 앞서서 이들 연구자들도 이미 자기의 분야에서 연구회를 만들었다. 내 기억으로 거의 학문의 분과마다 하나의 학회나 연구회가 세워졌던 것 같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학문이 아카데미즘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와 현실에 복무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세워진 조금 뒤 다양한 연구회 사이에 통합된 단체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합동 단체를 만드는 데 모두들 진심이었다. 합동 단체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 역사의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이렇게 해서 학술단체협희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요즈음은 거의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었으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단체였다. 학문간, 학제간 통합된 연구자 단체는 아마 전무후무할 것이다. 가입한 연구단체의 전체 나, 정확한 결성 시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2)

학단협이 만들어질 때 준비 모임에 후배들의 위임을 받아 내가 참석했던 것 같다. 모임을 주도한 것은 산업사회연구회의 조희연 선생이었다. 당시 그는 상당히 급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를 만들려 했던 것 같은데 농업 문제 연구자인 이우재 선생이 제동을 걸면서 상당히 대중적이고 온건한 단체가 되었다. 나는 이우재 선생의 편에 들었기 때문에 조희연 선생과 여러 번 부딪혔지만, 그런 충돌이 학술단체 협의의 필요성에 대한 시대적 공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단체는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었고 나중에 이 단체 출신 연구자들이 대학교수로 진출하면서 민교협이나 교수노조를 형성하는 데 핵심이 되었다. 어떻든 이 단체가 세워지면서 이른바 학문 전선에서도 하나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림시의 영향을 받아 진지전이라는 개념이 유행했는데, 마침내 다른 모든 투쟁 전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영역에서 하나의 진지가 꾸려졌다.

3)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창립총회는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규모로 열렸다. 내 기억으로는 통신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아마 강당의 규모가 500석정도 되었는데 그 대강당을 가득 채웠다. 철학 전공자만이 아니라 비철학 연구자나 일반 대중도 이때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주제도 기존의 철학계에서 본다면 말도 안되는 주제였다. 우리는 당시 연구자들의 많은 존경을 받던 언론인 이영희 선생이나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 영문학자 백낙청 선생 등의 사상을 철학적 관점에서 연구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마 어마어마한 규모의 참석자가 창립총회에 모여들었던 이유는 이런 주제 때문이었으리라. 나도 역시 백낙청 선생의 사상을 연구해서 발표했는데, 그 본문 역시 어딘가 있을 텐데, 굳이 찾고 싶지는 않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기존의 철학계를 비판하자는 운동이었다. 당시 나는 누구도 하지 않던 연구를 했다. 철학계의 역사를 연구한 것이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우리의 철학을 세우기 위해서는 과거 우리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철학을 했는지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철학을 호기심이나 개인적 선호에 따라서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나 역시 개인적인 선호로 본다면 단연 실존철학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나는 철학에서도 올바름이라는 것이 적용된다고 보았다. 올바름 자체가 사실 철학적으로 형성된 개념이지만, 그때는 올바름이란 영원한 잣대가 있고 철학도 그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무엇이 철학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나는 간단하게 삶과 철학이 서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올바른 철학은 올바른 삶으로 나타날 것이고, 거꾸로 올바르지 못한 철학자의 삶은 원래 그의 철학 자체 내에 그런 올바르지 못한 삶이 잉태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런 올바른 철학의 흔적을 계승하고 싶었다. 나는 몇몇 철학적으로 올바른 흔적도 발견했다. 신남철, 박치우 등의 이름이 이때 기억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올바르지 못한 철학은 비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단순한 구도였다. 현실에 기여, 삶과 철학을 곧바로 이어버린 이런 구도는 지금 보면 어리석은 짓이지만 그때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였다.

3)

한국철학사상 연구회에서 했던 또 하나의 작업은 북한 철학에 대한 연구였다. 우리는 북한에서 일어나는 철학 연구도 우리 민족의 철학 연구이니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당시 북쪽의 철학이 운동권을 통해 소개되기는 했지만, 너무 단편적이었다.

북쪽의 철학이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런 철학이 전개된 과정이 이해되어야 했다. 단순히 그쪽 사회의 역사만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철학이 나오기까지 많은 철학 연구자들의 전문적인 연구가 바탕이 되었으리라. 그런 철학 연구자들의 연구가 이해되어야만 북쪽의 철학이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쪽의 철학자가 누구인지, 어떤 연구를 해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침, 송상용 교수님이 안기부와 협조하고 일본의 조선대학과 연결하여 북쪽의 철학자가 발표한 논문집을 복사하여 들여왔다.

대부분의 복사는 북쪽의 학계에서 발표한 전문적인 연구잡지였다. 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잡지 전체를 복사했는데 유감스럽게도 70년대 말 이후 철학 잡지는 단절되었고 80년대 후에 다시 복간된 철학잡지는 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 연구잡지를 철학의 분야별로 나누어 연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안기부의 도움으로 잡지를 복사해 왔으니 우리의 연구발표도 안기부에서 허용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나중에 북쪽 철학에 관련된 심포지움을 열고자 했을 때는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안기부에서 허용할 수 없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우리의 연구는 시대와 철학에 발표하기로 하고 심포지움 개최는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이 심포지움에서 북쪽의 사회철학적 연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발견한 잡지의 대부분의 연구는 북쪽이 아직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에 머무를 때 나온 것이어서 소련이나 기타 사회주의 진영에서 연구된 내용과 크게 다른 내용은 발견할 수 없었다.

4)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성과는 쌓여갔으나, 현실의 운동은 점차 좌절감에 사로잡혀갔다. 80년대 말 노태우 정부 시절 3당 합당이 일어나자, 사회의 민주화는 다시 한 번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산화를 신문지상에서 보면서 나는 죽음과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운동은 여전히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은 속이 빈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과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허감을 내적으로 느꼈으나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을 찾지 못했다. 80년대 말 고르바죠프의 사회주의 개혁운동이 전개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불투명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생계와 관련하여 여러 어려움에 부딪혔다. 나는 활로를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교내 민주화가 일어나면서 학생들은 사회철학이나 근대사와 관련된 교양과목을 새롭게 개설하였다. 마침 철학과에서 사회철학 담당교수를 뽑으려 했는데, 이때 동아대 학생들이 나를 찾아와 내려오기를 청했다.

나는 그들의 요청대로 동아대학교에 지원했다. 교내 민주화 운동이 전개된 민주적 총장이 선출된 상황이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다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말하자면 학생들이 뽑은 교수가 되었다. 68혁명 시대 파리 벵센느 실험대학에서 학생이 교수를 뽑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내가 그런 교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일도 그때는 있었다.

5)

나는 부산에 내려가면서 이제부터는 학자가 되기로 했다. 한편으로 학생을 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 철학 연구에 전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연구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헤겔 철학이었다.

내가 다시 헤겔철학을 하게 된 것은 마르크스 때문이었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는데 자본론 앞 상품 화폐 장 속에 마르크스의 설명에 너무 매혹되었다. 그 설명은 내가 헤겔 논리학을 읽다가 어렴풋하게 짐작했던 변증법의 논리를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드디어 헤겔의 변증법에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어 헤겔의 논리학을 자본론과 함께 다시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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