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 일지(4)[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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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철학 일지(4)

1)

역사의 전환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85년 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역사의 때가 오고 있다는 직감이었다. 가만히 시골에서 무위 도식할 수는 없었다.

85년은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사회철학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철학도들이 모여 작은 연구실을 마련했다. 처음엔 신림동 어디에 있었던 것 같은데 곧 봉천동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 같다.

연구실에서 처음 했던 사업이 사전을 번역하던 것 같은데, 사전을 만들기 위해 연구실이 열린 것인지, 연구실을 열어놓으니 사전이 만들어졌는지, 기억이 불분명하다. 아마 후자였으리라. 그렇다면 왜 처음에 연구실을 내려 했던 것일까? 모여서 공부할 장소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때 다른 학문 영역에서 우후죽순으로 연구자들이 모인 연구실이 세워졌으므로, 거기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당시 운영은 어떻게 했을까? 그때의 이런저런 앞에서 말했던 데이터베이스 안에 들어 있을 텐데 그걸 열 수 없으니,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하자.

대체 무엇을 연구했을까? 모두 생각나지 않는다. 그 당시 나는 역사나 사회과학 연구자들과 함께 공부했는데, 그때는 학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때 그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남은 노트들은 여전히 보관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에 관해, 경제학이나 정치학에 관한 노트들이다. 그런 것들은 철학 밖의 글이니 여기서 소개할 것은 못 된다. 철학적으로는 여전히 철학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나는 이런저런 장소에서 철학 논쟁에 관해 설명했다.

이 시기에 거꾸로 나는 철학을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할 수 없었다. 방금 말했던 다양한 사회 역사 공부와 철학 소모임 활동으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생계를 위해 몇몇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건성으로 했을 뿐이다. 나는 밖으로만 돌았고 집에는 밤에 늦게 들어갔다. 어쩌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곧 전환점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있었고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다시 확신시켜주는 여러 사건을 만났다.

뭐가 할까, 순진한 시절이었다. 사회 역사적 현실을 알기만 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열정이 지배했던 모양이다. 내 생각에 그 시절만큼 철학자가 높이 대우받았던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정말 자부심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스스로 철학을 통달했다고 믿었고 남들 앞에서 자랑했으니 어리석은 치기가 지배했다. 곧 그런 치기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했으나, 그때는 아직 아니었다.

2)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한 달이 다가왔다. 87년 6월이었다. 매일 거리로 쏟아져 나갔고 우리 대학원생도 석 박사 과정 가릴 것 없이, 사회철학을 하든 아니든 함께 모여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최루탄을 뒤집어쓰고도 행복했고 거리에서 만난 누구도 모두 친구였다. 길거리에서 흩어졌던 철학과 대학원 선후배를 만나면 그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해 이한열 열사 장례식으로 시청 앞 광장에 10만 군중이 모였을 때, 나는 역사의 대낮에 서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은 역사의 신과 내가 직접 만난 순간이었다. 자유와 행복감이 물 밀려오듯 나를 덮었으니, 나는 지금도 그때의 떨림을 잊지 못한다.

마침내 6월 항쟁은 노태우의 항복으로 끝났으나 곧이어 7월에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우리가 같이 학습했던 노선 소위 민중민주주의라는 노선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좌절의 시기가 다가왔다. 믿었던 김대중 선생이 노동자 대투쟁의 정점에 재를 끼얹었다. 그는 노동자에게 자제하라는 신호를 공개적으로 보냈다. 나아가서 그는 정부의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탄압을 허용하였다. 배반이라고 느껴졌다.

8월 말 정점에 이르렀던 노동자 대투쟁이 한순간 꺾이고 곧바로 선거전으로 흘러갔으므로 배반이라는 느낌을 곰 씹어 볼 겨를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래도 김대중 선생을 믿었고 나 역시 그의 배반은 선거투쟁을 위한 일시적 양보 정도로만 믿었다.

그해 정확히 언젠가는 모르겠다. 10만 명이 김대중 선생의 연설을 들으러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6월 항쟁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 이후 다시 한번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같이 행진했던 후배가 말했다. 만일 김대중 선생이 당선되면, 내 말을 따르겠노라고. 그러면서 그가 당선될지를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목청껏 김대중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후배에게 어떤 말로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뒤로 그 후배는 나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결국, 그해 12월 겨울, 역사는 독재자의 승리로 끝났다. 80년 봄의 패배와 좌절의 지긋지긋한 감각이 다시 되살아났다.

3)

80년 봄처럼 나는 다시 철학을 시작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다. 어떤 까닭이었는지 소위 신 마르크스주의자의 철학 특히 알뛰쎄와 그람시가 많은 사람의 입에 올랐다. 그것은 87년의 거대한 역사적 실험은 그동안 갈고 닦았던 민중민주주의라는 노선이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로서는 알뛰쎄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보다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더 마음에 다가왔다. 지배 계급에 대한 문화적 투쟁이 없이, 기습적인 공격이나 정치적 투쟁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그의 주장이 당시의 내 마음에 설득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알뛰쎄 파와 논쟁을 위해서도, 그의 주장 역시 학습해야 했다.

선거전에서 패배 이후 이런저런 학습과 활동으로 바빴지만, 내 마음에서 이미 열기는 사라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지치지 않았고 마치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가는 사람처럼 앞으로 나갔다.

이즈음 사회철학 연구실은 사전 번역을 마치고 사전을 출판했다. 사전을 번역하는 데 박정호 선생을 비롯한 사회철학연구실 후배들이 무척이나 고생했다. 그들의 노고와 개인적인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 대표자로서 박정호 선생의 이름을 밝힌다.

사회철학연구실은 거기서 얻은 돈으로 좀더 넓은 연구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사이 다른 대학에서도 사회철학이나 헤겔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연구자들이 많이 출현했다. 여러 집단, 그룹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회철학 연구실은 헤겔 학회 성원과 만나, 통합을 준비했다. 두 집단이 모여 만들어 낸 것이 한국철학사상 연구회라는 단체였다.

이 연구단체는 창립하면서 두 가지를 강조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는 철학이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히 외국의 철학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 현실에 맞는 철학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선배님들 역시 철학이 시대에 기여하고, 우리 철학이 세워져야 한다는 대의에 동의했다.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는 철학계 선배님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학계에서는 새로 출발하려는 단체에 대해 마땅찮다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는데,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시기는 조금 늦어졌지만, 성대를 중심으로 한 동양철학 연구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졌고 곧 철학사상 연구회에 합류하면서 철학계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 지방에서 철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도 사회철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고 그들 역시 차례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가담해주었다.

이런 움직임 가운데 이채로운 게 있다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이규성 선생을 비롯하여 내가 대학 시절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이 가담했다. 이 잡지 역시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와 같은 의식과 목적을 가졌지만, 다만 여기 참가했던 사람들은 사회철학이나 헤겔 철학 연구자는 아니었다. 고대철학, 동양철학, 분석철학 등 다양한 연구자가 사회에 관한 관심과 우리의 철학이라는 지향점에 대해 동의했다.

그들은 대개 일찍부터 교수가 되어 지방에 흩어져 있어서 단체를 이루어 함께 연구하기보다는 글을 써서 잡지를 만들어 새로운 철학을 직접 제시해 보자는 생각에서 잡지(부정기 무크지를 표방했다)를 만들었다. 제목은 ‘시대와 철학’이며, 출판은 윤구병 선생이 주선하여 종로서적에서 맡아주었다.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가 만들어지면서 이 집단 역시 연구회에 가담했다.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의 이름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말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다. 헤겔은 거기서 그의 시대는 새로운 정신이 탄생하는 여명의 시대라 했는데, 그 때문에 ‘사회와 철학’이라고 할 것이 ‘시대와 철학’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나는 이 잡지가 철학논문집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나는 대학시절부터 사르트르가 현대지에 발표했던 철학에세이를 좋아했다. 나는 새로 만드는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가 이런 철학에세이로 채워지기를 기대했다. 시대와 철학은 나중에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발간하는 잡지의 이름이 되면서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1호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소수 동호인 그룹이 만들었던 시대와 철학은 1호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시대와 철학을 인수했을 때도 나는 이 잡지가 철학 에세이집이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당시 후배들의 일반적인 입장은 오히려 철학 논문집으로 만들어 기존 학계의 논문집과 대결하자는 입장이었다. 나는 상당히 강하게 나의 생각을 내밀었으나 후배들은 나의 생각에 관심이 없었고 결국 시대와 철학은 철학 논문집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결정된 데에는 아마도 철학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요구 때문일 것이다. 현실과의 타협은 이때부터 시작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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