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풀어주시오(2)-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를 풀어주시오(2)-
정보라 작가의 단편집 저주 토끼를 읽고
6)
작가가 절망감을 탈출하려는 시도를 처음부터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작품마다 탈출을 기획한다. 그러나 탈출을 감행한 주인공의 시도는 번번이 전도되고 만다. 정보라 작가에게서 삶은 아이러니로 보인다.
아이러니 개념은 낭만주의 문학자 프리드리히 슐레겔에게서 미학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아이러니란 곧 어떤 것이 자기의 반대로 전락하는 것을 말한다. 슐레겔은 문학이 단지 세상사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를 파악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슐레겔은 작가 자신의 아이러니를 말한다. 작가가 자기가 만든 세계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작품에서 작가를 대변하는 것은 곧 화자인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자기 부정이 슐레겔에서 아이러니 미학의 핵심이 된다.
정보라의 소설 곳곳에서 이런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작품 ‘머리’에서는 변기 구멍에 자신이 버린 머리칼과 배설물, 휴지 등으로 이루어진 머리가 커서 그 자신을 오히려 변기 구멍에 밀어 넣는다. 작품 ‘몸하다’에서는 배가 불러오자, 아이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좌충우돌하거나, 마침내 아이의 아버지가 나타났으나 이번에는 아이가 물거품 같은 핏덩어리이다. 작품 ‘안녕 내 사랑’에서는 자신이 만든 반려 로봇이 수명이 다해 이를 폐기 처분하려 하자, 반려 로봇이 오히려 그를 찌르고 도주한다.
정보라 작품에서 아이러니는 세계의 아이러니만은 아니다. 심지어 주인공 자신의 아이러니로 발전한다.
정보라 단편집 ‘저주 토끼’를 대표하는 단편 ‘저주 토끼’를 보자. 할아버지는 자신의 친구 회사를 망하게 한 경쟁사 사장에게 저주 토끼 인형을 보낸다. 저주 토끼는 회사의 문서를 갉아먹고 나중에는 사장 손자의 뇌를 갉아먹는다. 사장과 그의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삼대가 죽으면서 경쟁사는 무너진다.
한편으로 보면 통쾌한 복수극이지만, 작가는 복수한 할아버지 역시 저주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할아버지는 죽어도 죽지 못한 채로 유령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화자인 나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해 끝없이 되풀이 말한다. 영원히 방랑하는 유령, 죽어도 죽지 못한 것처럼 잔인한 처벌이 어디 있겠는가?
아마도 이런 아이러니가 정점에 이른 것은 작품 흉터가 아닐까? 주인공은 돈벌이 수단으로 능력을 상실하면서 해방된다. 그는 숲 속에 사는 눈먼 여자를 만나 자신이 동굴에 갇히게 된 사연을 듣게 된다. 주인공은 눈먼 여자를 구하기 위해 그녀 대신 괴물에게 바쳐진 희생물이었다.
주인공은 그를 한없이 고통 속에 밀어 넣은 여자를 오히려 사랑하면서 만악[萬惡]의 근원인 동굴의 괴물을 처치하러 떠난다. 마침내 동굴의 괴물을 자신을 묶었던 쇠사슬로 쳐서 죽이고 돌아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눈먼 여자는 물거품이 되고 지금까지 그를 괴롭혔던 마을도 마을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작가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다만 그는 마을 전체가 그것의 존재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이 괴물은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생존 본능이며 황금의 매력이다. 그것은 우리를 가두어 두는 괴물, 다름 아닌 ‘그것’이지만, 우리의 생존 자체가 사실은 그것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7)
저주 토끼라는 단편집에 실린 작품 가운데 가장 음울한 색채를 띤 것은 세 번째 작품인 차가운 손가락일 것이다. 이 작품은 동시에 가장 실험적인 작품이어서 독자로서 작품을 이해하기 정말 어렵다. 작품 속의 시간도 순환적으로 흐른다. 전체적으로는 꿈속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주인공은 이 선생이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한 모양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보니, 누군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는 차를 빠져나오라고 한다. 문을 미는 데 누군가의 손가락이 닿는다. 주인공은 그런 가운데서도 손가락에 끼였던 반지를 찾는다. 주인공에게는 아주 소중한 거다. 반지는 차밖에 있던 손가락이 전해준다.
차를 빠져나가니 바닥은 물컹거린다. 진흙 바닥 같다. 주인공은 손가락을 잡고 빠져나오며 손가락이 누군지 묻는다. 손가락은 자기가 같은 학교 동료 교사인 김 선생이라 한다. 손가락은 어떤 일이 주인공에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데, 매번 말이 바뀐다. 처음에는 동료 교사인 최 선생의 결혼식에 갔다 오다 사고 났다고 하더니, 다음에는 최 선생이 이혼하고, 퇴직해 시골에 내려가자 위로차 갔다 왔다 한다. 또 목소리는 최 선생의 장례식에 갔다 왔다고 한다. 꿈속의 장면으로 보면 이런 말 바꿈이 이해할 만하다. 오히려 이런 말 바꿈을 통해서 전체 사건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주인공은 두 사람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소리는 불분명하고 마치 바람 소리같이 들릴 뿐이다. 자기를 김 선생이라고 하는 손가락은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손가락은 자기에 의존해서 따라오는 주인공을 비웃기 시작한다. “똑같이 사고 나도 누구는 끈질기게 살고 누구는 그 자리에서 그냥 죽고…”라고 말하든가, “살아 있을 때도 혼자였는데, 죽어버리고 나서도 계속 혼자면….”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손가락은 주인공 보고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자기를 따라온다고 비웃는다.
그러자 두려움을 느낀 주인공은 뛰어간다. 시간은 여기서부터 처음 사고장면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갑자기 땅이 다시 물컹하고, 정면에서는 차가 달려온다. 운전석에는 주인공 자신이 앉아 있고 운전대에는 자신의 것이 아닌 다섯 손가락이 자신의 양손 사이에 놓여 있다. 이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이 차를 운전하면서 그녀를 덮치고 있다.
그 후 첫 장면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리면서 그 자신은 차에 갇혀 있다. 이때 차가운 손가락이 닿으면서 반지를 빼낸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녀를 비웃는다. 차가 가라앉으면서 주인공은 자신의 뼈가 부러지는 것을 느낀다.
꿈과 같은 시간이 역전된 상황 속에서 독자로서 혼란스럽지만, 최 선생의 남편을 빼앗아간 장본인이 바로 주인공 김 선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사고 가운데서도 반지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장면이 꿈속의 상황이라면 교통사고로 보이는 이 사건은 주인공의 죄책감의 표현일 것이다.
주인공은 최 선생의 남편을 빼앗았고, 그 때문에 최 선생은 자살했고 주인공은 그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주인공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더없이 행복하다. 타인의 것을 뺏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절망적인 운명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재회’의 남자는 자기 손을 자기가 묶은 채로 목을 매달아 죽고 만다. 자기 손을 묶은 것을 혹시 자기 손으로 자기를 살릴까봐서다. ‘재회’의 화자인 나는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폴란드로 다시 온다. 그리고 환상 속에서 그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 묻는다. 풀어줄까? 남자는 목이 매여 있어 대답할 수 없다. 눈을 깜박거림으로써 대답한다. 작가는 죽음을 통해서 외에는 이 삶의 아이러니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8)
아이러니는 단편 ‘즐거운 나의 집’에서도 나타난다. 주인공은 7년을 노력한 끝에 빚을 전부 갚고 도시 변두리에 4층 건물을 구했다. 행복의 출발점일 수 있는 이 건물은 그녀의 불행의 출발점이었다.
건물에서는 바퀴벌레가 나오고 동네 사람은 텃세를 부려 자동차를 해친다. 남편은 비어 있는 3층을 친구 회사에 세를 내주지만 회사는 망하고 사장은 도망간다. 알고 보니 남편은 실내장식을 하는 동아리 후배와 내연의 관계에 있다. 둘은 함께 교통사고를 죽는다.
그 모든 것을 그녀는 견딘다. 이런 불행을 벗어나는 길은 없다. 그래도 이 작품에서는 작가는 우리에게 약간의 희망을 보여준다.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건물의 지하에 그녀의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실제는 아니다. 그 아이는 주인공이 보는 환영이다. 처음 아이는 희끄무레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고통이 심해 감에 따라서 아이는 무게를 지니고 촉감을 지닌 존재로 성장했다. 아이는 자물쇠를 가지고 논다. 자물쇠를 철컥하고 잠갔다가 다시 여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모양이다. 그녀는 이 아이와 함께 지하실에 숨는다.
이상하게 다른 곳은 바퀴벌레와 쥐가 들끓었는데, 이 지하실만은 깨끗하다. 아마도 이 지하실조차 현실의 공간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아이 만큼이나 가상의 공간이다. 이 지하실은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주로 연극 무대에 쓰이는 의상이나 소품이다. 그렇다면 이 가상의 공간은 예술의 세계가 아닐까?
황금 물신주의 세계에 대립하는 구원의 세계를 작가는 환상과 예술 세계 속에 찾는다. 이 예술 세게 속에는 황금 물신주의가 파괴하는 가족이 살아 있다.
그러고 보면 이런 가족에의 희망은 곳곳에 숨겨져 있다. ‘몸하다’에서도 주인공은 끝까지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는다. 비록 물거품 같은 핏덩어리를 낳고 울음을 터뜨리지만, 그녀가 아이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그 마음이 느껴진다.
‘모래와 바람의 지배자’라는 작품에서 초원의 공주는 모래바람에 파묻힌 황금 물신주의의 나라를 떠난다. 황금 배의 주인인 주술사는 공주에게 자신과 함께 황금 배를 타고 “영원히 시간의 지평선을 떠다니며” 살자고 한다.
하지만 공주는 황금의 배를 떠나면서 자기는 인간 세계로 돌아가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할 거라고 말한다. 주술사는 그런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공주는 이렇게 말한다.
“알아요, 그러나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살아갈 테니까요”
하지만 그녀가 그리는 가족의 세계는 황금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는 없다. ‘재회’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주인공이 말한다. 이게 이 단편집 전체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하다.
“이제 내가 기다릴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욕실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기적처럼 찾아와서 이 삶에 묶인 나를 풀어 주기를 기다리며….”
기적처럼 찾아온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가상의 공간, 예술의 공간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9)
우리의 생존 의지, 욕망이 우리를 가두는 괴물, 동굴, 바로 ‘그것’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삶에서 풀려날 길은 없는가? 기적 같은 그 순간은 오지 않을까? 이 글은 작가의 질문을 다시 던지면서 끝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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