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전서파의 사랑 / 유일한 자에게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종교적 습관이자 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유운의 전개도 접기]
백과전서파의 사랑
이유운
나는 사전이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창틀에 정의들을 끼우고 학습하기에
적절한 탄생이다
많은 것을 외우며 자랐지
죽은 비둘기의 표정, 싸구려 조명,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 무릎의 튼살, 양철통으로 만든 마음, 꿈의 안팎에서 소진되어 돌아온 패잔병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더 이상 외울 정의가 없었으므로
그 또한 적절한 단락이었다
너는 자주,
날씨의 정의 아래에 서 있었다
헝클어진 얼굴
부르면 돌아보는 이름을 가진
그건 너무 순진한 모양이어서
나는 네 살갗을 짚으려고 손을 만들었다
내 손금에 박힌 절반의 문장을 보여줄게
이것이 우리 집에 마지막으로 남은, 아무도 외우지 않은 말이다
사물들이 점친 내 운명의 점괘다
요약하자면
돌이킬 수 없고 자주 갈라진다는 것이고
밝은 밤에 죽을 거라는 결말이다
결말이 오기 전까지
나는 주로 지칭대명사처럼 기능할 것이고
대부분 너를 위해 주먹을 쥐었다 펼 지도 모르겠다
이 점괘가 입술의 단위로 부서질 만큼 자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너를 부르면
너는 너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했지
아쉽지 않다
주인이 된다는 건
언젠가 그걸 잃어버린다는 거니까
네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며 집을 돌아다닌다
네가 지나치는 곳마다 정의들이 우수수 비처럼 떨어지고
비참하게 쌓인 종이들이 오래들 자고 있다
우리가 그 위에서 춤을 추면 어떨 것 같아?
나 아주 슬플 것 같아
유일한 자에게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종교적 습관이자 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내게 많은 풍광을 보여준다. 그는 내가 살지 않은 모든 곳으로 나를 데려갈 수 있다. 내가 아직도 공릉과 헷갈리는 정릉, 서울의 골목들,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걸음들, 학교, 순간들, 사람들, 얼굴들, 사랑들, 시간들, 미움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절대 알지 못했을 것들. 그 풍광들을, 순간들을 자꾸 글로 쓰게 된다. 그게 나로부터 미끄러지지 않았으면 해서. 내 마음과 시간과 우리에게 무언가 자국을 남기고 내려갔으면 해서. 그 자국이 쌓여서 스키드 마크를 남겼으면 해서. 그 마크를 손으로 짚으면 맥박이 느껴졌으면 해서. 내 손바닥을 간질이는 맥박. 고동. 규칙적인 심장의 소리. 우리 이 도시에 잔뜩 스키드 마크를 남기자. 모든 자국은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 언어 사이로 미끄러져 가는 사랑을 지켜보고 서 있다. 비가 내린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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