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필요한 스물여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2) – ‘비움’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여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2) – ‘비움’
마리횬
지난 시간에 우리는 도종환 시인의 시 <깊은 물>을 함께 읽었습니다. <깊은 물>을 통해 내면의 강물을 깊이 채워야 한다는 ‘채움’의 메시지를 읽었는데요, 오늘은 ‘채움과 비움’ 두 번째 시간으로 ‘비움’에 관한 메시지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비움’은 ‘채움’과 정 반대의 행위를 말하는 것 같지만, 오늘 함께 읽을 시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채움과 비움의 두 행위가 만나는 지점이 분명히 있음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도종환 시인의 시를 만나 보실 텐데요, 바로 <여백>입니다.
여백
도종환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네, 도종환 시인의 시 <여백> 듣고 왔습니다. 차를 타고 숲길 높은 곳을 달릴 때, 산 능선을 따라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의 실루엣을 보신 적 있을 겁니다. 참 아름답죠. 특히 해 질 녘에 해가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곧게 뻗은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뾰족뾰족한 그림자는 노을을 더 운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 자연의 풍경들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시를 읽으면 더 좋겠습니다.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시인의 시각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시인은 높이 솟은 나뭇가지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의 여백, 허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세세한 나무의 가지들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하늘의 빈 여백이 있는 공간에서는 나무의 잔가지들이 다 보이죠. 시인은 그 모습을 가리켜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이라고 표현합니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가지를 뻗어 곧은 나무로 자라나기까지 나무는 무수한 세월을 견뎠을 것이고, 수 백 번의 겨울을 보냈을 겁니다. 그 살아온 길이 잔가지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것이죠.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마구잡이로 자라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 있는 나무끼리 서로 겹치지 않게 균형을 잡고 멋들어지게 가지를 뻗어 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시인의 말처럼 나무의 가지는 나무의 생명의 손가락인 것이죠.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하지만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배경 속에서는 잔가지들의 모양이나 그 균형, 흔들림을 볼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은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풍경이 그렇지 않나요? 고층 건물에, 건물마다의 요란하고 휘황찬란한 간판들.. 정말 눈이 쉴 곳이 없지요. 그런 꽉 찬 배경은 나무의 생명의 손가락을 쓰다듬어 줄 수 없습니다.
무언가로 지나치게 꽉 차 있어 여백이 하나도 없는 풍경이 그 어느 것도 품지 못하듯, 우리의 내면에도 여유롭게 비워 놓은 여백이 있어야 누군가를 품어줄 수 있겠죠. 그렇기에 시인은 때로는 텅 빈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채움’과 ‘비움’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자세를 말해줍니다. 나 스스로는 중심에 깊은 물을 채우듯 무게를 잡고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깊은 자세를 가져야 하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는, 작고 연약한 나뭇가지부터 큰 산까지 넉넉하게 품을 수 있는 넓은 비움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가볍게 인생을 살지 말되, 너무 꽉 채운 삶을 살지 말 것. 쉽지 않은 삶의 태도이지만, 그럼에도 채움과 비움의 메세지를 통해 다시 한 번 다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을 노래는 ‘여백’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가수, 곽진언의 노래 <자랑>이라는 곡을 가져왔습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구요, 저는 다음 시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곽진언 – 자랑, 주소: https://youtu.be/aSD5Xx3f8do»
☞ 채움과 비움(1) 보러가기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