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특별해 [내가 읽는 『자본론』]
우린 모두 특별해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인간은 모두 각자의 고유한 개성과 특별함을 지닌 자립적이고 창의적인 개별 개체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세간의 꽤 많은 감성-에세이들은 개별적 인간 개체의 특수함을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소중히 어루만지며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다. 하나 (개별적 존재자의 자존감을 제고하는 개체적 특별함뿐만 아니라) 기실 모든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특별함을 갖는다. 어떤 개체건 상관없이, 인간 일반이 지니는 고유한 특수함이 있다는 의미다. 인간만의 특별한 성질은 오랜 시간 과학, 신학, 문학, 인문학 등의 학문적 분야를 넘나들며 매우 흥미로운 탐구 소재로 기능해왔다. 오늘 다루어보고 싶은 인간의 특별함은, 독특하게도 경제학적 논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각각의 상이한 개체성을 지닌 개별적 인간들은 서로 다른 특수한 영역에서 이 사회의 경제적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 개별적 인간 개체는 그 특수성을 말미암아 세상의 다양한 층위에서 경제적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개별 인간 각자의 개인적 사정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어떠한 종류의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라도, 인간이라면, 인간이기만 하면,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유하고 있는 인간의 경제학적 특별함을 찾는 것이 오늘 글의 주목적이기에 그렇다. 논의의 목적의식을 다시금 상기하며, 인류(인간 일반)를 인격적으로 대표하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인간’씨를 임의로 상상해보자. 우리의 ‘인간’씨는 경제학적으로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을까? 분명 그의 특별함은 이 땅의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닌 특별함일 것이다.
이 사회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경제학적 문제들은 경제적 ‘가치’의 생산과 교환, 증식, 축적 등의 복합과 그 순환에 비롯한다. ‘인간’씨는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특별한 성질을 띤다. 우선, 모든 경제학적 논의의 출발이 될 ‘가치’의 생산은, 오로지 ‘인간’씨의 노동 일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씨가 행하는 여러 종류의 노동들의 특수한 구체적 형태(이를테면 망치질하는 노동, 재봉틀을 다루는 노동, 고객을 응대하는 서비스 노동 등)를 잠시 제거했을 때, 우리는 ‘인간’씨의 ‘노동 일반’만이 추상적 형태로 응고되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노동 일반’이 바로 경제적 가치를 생산해내는 힘의 원천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노동1으로(노동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가치’의 창조는 ‘인간’씨만이 해낼 수 있는 신비하고 특별한 경제적 행위다.
‘인간’씨의 사회적 유용 노동으로 잉태되어 여러 가지 외형의 모습을 드러낸 ‘가치’들은 저마다 상이한 개성과 특수한 쓸모를 자랑한다. 각자의 유용성을 한참 뽐내던 이 ‘가치’들은 이내 본격적으로 자신의 인기를 겨루기를 위한 (가치)교환의 장으로 향할 것이다. ‘인간’씨는 훌륭한 통찰력으로 이 과정을 미리 예측하여 어느 시점부턴 자신에게 필요한 ‘가치’가 아닌 교환을 위한2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 ‘인간’씨가 만든 가치의 겉모습은 매우 다양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교환을 위해 생산되며 실제로 다른 ‘가치’와 교환된다. 타인의 사용을 위해 생산되어 교환의 과정을 거치는 (유용성, 다시 말해 사용가치를 지닌) ‘가치’를 우리는 ‘상품’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인간’씨는 경제적 ‘가치’를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다양한 쓸모를 지닌 여러 종류의 상품들을 생산해낸다.
인류 혹은 인간 일반, 즉 ‘인간’씨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별함은 ‘인간’씨가 만들어내는 상품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씨가 교환의 과정에 조심스레 내미는 상품들을 유심히 살펴보자. ‘인간’씨가 들이미는 대부분의 상품들은 그 탄생 과정과 생산 과정의 성격이 흡사하다. 예컨대, 나무토막이라는 원료를 손에 쥔 ‘인간’씨가 망치와 톱을 비롯한 각종 기계와 장치를 도구로 이용해 나무 테이블이라는 상품을 제작해내는 과정을 상상해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상품들은 위와 같은 형태의 생산 과정과 유사한 단계를 거쳐 생산된다. ‘인간’씨가 노동수단(도구)을 활용하여 노동대상에 투여한 노동을 통해 제작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씨의 여러 상품 중에는 이와는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생산된 특이한 종류의 상품도 존재하며 이 특별한 상품은 우리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이 상품의 이름은 ‘노동력’이다.
‘인간’씨는 경제적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자신의 특별함을 상품으로 삼는다. ‘노동’을 통해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노동력’이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단순히 추상적 행위인 ‘노동’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만들 수 있는) ‘노동’의 행위능력과 그 힘을 시간 단위로 상품화한 ‘노동력’을 판매하는 셈이다. ‘인간’씨의 인기 상품 ‘노동력’은 나무 테이블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제작된다. 상품 ‘노동력’은 노동대상이 되는 원료(혹은 천연적 노동대상 or 보조재료)에 노동수단을 도구로 활용해 인간 노동을 투하하는 방식으로 생산된다고 보기 어렵다. 상품 ‘노동력’은 그 힘의 원천인 노동자의 생활 영위와 그 생활의 안정적 재생산을 통해 생산된다. 즉 어느 노동자가 다음날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 완료할 수 있게끔 이 노동자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쉬게 하는 모든 과정에 투여된 ‘가치’들이 상품 ‘노동력’이 생산될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 된다. ‘인간’씨의 삶 유지 그 자체가 상품 ‘노동력’의 생산과정이며, ‘노동력’은 ‘인간’씨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의 상품화로 볼 수 있다.
‘인간’씨의 특별함이 빚어낸 상품 ‘노동력’은 그 제작자와 마찬가지로 매우 특별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상품, 예컨대 나무 테이블처럼 평범한 생산과정을 거쳐 탄생한 상품은, 정상적인 교환 거래의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가치’의 양과 그 비율에 따라 교환되며 거래를 완료한다. 이를테면, 50만큼의 ‘가치’를 내포한 A라는 상품이 거래의 장에 나왔을 때, 25만큼의 ‘가치’를 내포한 B라는 상품 2개와 교환 되거나 100만큼의 ‘가치’를 내포한 상품 C 1/2개와 교환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상품 A가 지닌 50만큼의 가치를 대표하는 화폐3와 교환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나무 테이블과 유사한 종류의 탄생 과정을 거친 상품들은 자신이 내포한 자신의 경제적 ‘가치’의 크기와 동일한 크기의 ‘가치’(혹은 같은 크기의 ‘가치’를 지닌 상품 or 화폐) 와 교환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일반이 지닌 특별함의 상품적 화신인 ‘노동력’은 이 지점에서 자신의 특별한 성질을 다시금 암시한다.
물론 ‘인간’씨의 상품 ‘노동력’ 역시도 처음 교환 과정에서 거래될 때에는 자신이 지닌 가치와 같은 크기의 ‘가치’를 그 대가로 지불받기로 한다. 하지만 ‘노동력’이 상품으로서 판매 완료되는 시점은 판매자의 실제적 ‘노동 행위’가 구매자의 의지에 따라 완전히 사용되는 시점인데, 바로 이 시점에서 ‘노동력’의 특별한 성격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일반적 거래에서 판매자는 자신의 상품이 지닌 ‘가치’를 구매자의 소유로 넘겨줌으로써 이미 (구매자에게) 지급받은 지불값의 등가를 지불한다.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을 판매한 후, 자신이 직접 ‘노동’함으로써 그 거래(등가의 지불)를 완료한다.4 하지만 웬걸? 노동자가 자신의 상품 판매 과정을 완료하기 위해 행하는 실제 ‘노동’ 과정에서, 상품 ‘노동력’은 판매자가 구매자에게 전달해야 할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게 된다. 다시 말해, (거래 이행 과정에서) 상품 ‘노동력’은 자신의 값어치이자 스스로 내포한 ‘가치’의 크기보다 더욱 큰 크기의 ‘가치’를 생산해내는 셈이다. 구체적 상황으로 예시 사례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평균적으로) 1시간에 10만큼의 가치가 만들어지는 사회적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때 노동자가 삶을 유지하는데 사용하는 생활수단에 들어있는 ‘가치’는 30이며, 이를 바탕으로 노동자는 6시간의 노동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실제로 어느 노동자가 구매자에게 자신의 상품 ‘노동력’의 6시간어치를 판매하고 그 대가로 6시간 ‘노동력’이 내포한 가치 30을 돌려받았다고 가정하자. 이 30은 이전에 노동자가 6시간 노동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먹고 자고 싸고 입고 휴식한 모든 과정에 체현되어있는 ‘가치’(사회적 유용 노동 시간)의 총합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 ‘노동력’의 판매를 마무리하기 위해 구매자의 요구대로 6시간 동안 실제 노동을 행한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노동자는 6시간 ‘노동’의 실제 이행 과정에서 60만큼의 ‘가치’를 창조해낸다. 분명히 30만큼의 ‘가치’를 교환하기로 하여 시작된 거래였다. 구매자는 판매자에게 6시간 ‘노동력’을 생산하는데 투여된 가치(노동시간5), 즉 6시간짜리 상품 ‘노동력’의 값어치와 등가의 크기인 30을 지불했다. 노동자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30만큼의 ‘가치’를 지닌 6시간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구매자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은 판매와 그 구체적 이행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가치’보다 더욱 큰 가치를 생산해낸다. 30의 ‘가치’는 ‘노동력’의 특별함에 의해 60의 ‘가치’로 증식되었다.6
요컨대, 오직 인간만이 생산할 수 있고, 인간이라면 누구든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는 특별한 상품 ‘노동력’이 이렇게 기이한 ‘가치’의 증식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증식된 ‘가치’는 ‘노동력’을 상품으로 구매한 구매자에게 돌아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 구매자들은 이 오묘한 현상을 진작 꿰뚫고 이처럼 추가적으로 발생한 ‘가치’들을 꾸준히 차곡차곡 축적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요상한 공통점을 지닌 ‘악질 구매자’들이 등장한다. 그 스스로 인간-일반에 속하면서도 미리 포착해낸 ‘인간’씨의 특별함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 악질 구매자들은 대부분의 개체적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는 다른, 온종일 빈둥대면서도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이 낳는 ‘가치’ 증식을 파악하고서는 타 개체적 인간들의 일반적(‘인간’씨-스러운) 특성을 몰래 활용해 침대에 누워 배를 불리게 된 것이다.
현실 세상에서 어떤 인간 개체는 위의 거래 속 구매자의 기능을 하게 되고, 또 다른 인간은 ‘노동력’의 판매자로 기능하기도 하며, 그 중간에 위치한 여러 애매한 인간 개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 있는 점은, 그 모든 개체적 인간들의 공통적 특성이다. 인간 일반으로서의 (경제학적) 특별함은, 이 특수한 상품 ‘노동력’을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언제 어디서든 생산해낼 수 있다는 점에 그 핵을 둔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처럼 특별한 상품을 언제 어디서든 만들어 판매할 수 있음은 우리 모두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다시금 곱씹게 한다. 모든 인간은 경제적 ‘가치’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고 유의미한 존재요, 이 ‘가치’를 언제든 스스로 증식시킬 수 있는 특수한 상품 ‘노동력’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점에서 또한 작지 않은 특별함을 함의하는 바다. 우리는 모두 실로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인류를 구성하는 인간 일반의 이러한 특별함은 매우 독특한 형태로 경제학적 담론의 곳곳에서 포착되며, 경제학적 측면에서의 휴머니즘적 사유의 근거를 구축했다. 이에 노동가치설, 특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인간’씨만의 특별함을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논의의 기본적 토대를 다져왔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하며, 앞선 논의에서 등장한 상품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설명하여 ‘노동력’이라는 개념이 함의하는 바를 본격적으로 체계화했다. 이들은 ‘노동력’의 구매자이자 증식된 ‘가치’의 주인을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가들로 상정하며 자신들의 이론을 구체화하는데, 이때의 자본가들이 바로 앞서 등장한 악질 구매자들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력’의 개념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가치’를 만드는 노동계급과 이를 앗아가는 자본가 계급의 대립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필연적임을 주장했다.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자본가 계급은 생산수단의 대부분을 독점하거나, 거대한 생산수단으로 언제든 탈바꿈할 수 있을 만한 양의 자본을 지닌 계급이다. 이때 생산수단이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인간’씨의 노동과정에서 노동의 대상과 도구로 기능했던 것들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노동수단으로서의 공장과 기계들, 노동대상으로서의 원료와 천연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본가 계급은 막대한 자본을 손에 쥔 채, 심오하게 머리를 굴린다. 이들은 자본의 일부를 생산수단(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의 구매에 투여하고, 또 다른 일부는 노동자(앞선 예시에서의 ‘인간’씨가 되는 격)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을 구매하는 데에 투여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따르면 자본가가 생산수단에 투여하는 자본의 부분은 ‘불변자본(不變資本 : constant capital)’으로 명명된다. 이는 자본가의 자본 중 생산수단으로 전환된 부분은 생산 과정에서 ‘가치’의 양을 그대로 이전할 뿐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반대로 자본가들이 ‘노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자본의 부분은 ‘가변자본(可變資本 : variable capital)’으로 칭해진다. 이는 자연히 ‘노동력’에 투여된 자본의 부분은 등가물을 재생산해내는 것을 넘어서, 초과분(잉여가치)을 생산하며 기존 자본의 ‘가치’ 양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암시하는 셈이 된다. [초과분으로 되는 잉여가치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이 글을 다시 한 번 정독해보라. 이는 선행된 논의에서 이미 살펴본 ‘인간’씨의 ‘가치’ 증식 능력과 정확히 일맥상통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인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 Ⅰ 제3편 제8장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를 조금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이와 같이 자본 중 생산수단[원료,보조재료,노동수단]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량이 변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자본의 불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불변자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 중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가 변동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또 그 이상의 초과분,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이 잉여가치는 역시 변동하며 상황에 따라 크게도 작게도 될 수 있다. 자본의 이 부분은 불변의 크기로부터 끊임없이 바뀔 수 있는 크기로 전환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자본의 가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가변자본’이라고 부를 것이다.”
“노동과정의 관점에서는 객체적 요소와 주체적 요소[즉 생산수단과 노동력]로 구별되는 바로 그 자본요소들이 가치증식과정의 관점에서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구별된다.”
위에서 드러나듯,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에 대해 진작부터 탁월한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가변자본’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 일반의 신비한 능력과 그 특별함이 낳은 상품 ‘노동력’을 명료화했다. ‘노동력’의 개념은, 나아가, 경제학적 담론 속에 숨어있는 휴머니즘의 요소로서 구실 해왔음이 자명하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인간 일반이 지닌 특별한 성격이 경제학적 문제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석적으로 해명한 셈이다.
다소 갑작스럽지만, 잠시 숨을 고를 겸 ‘맛있는’ 이야기를 좀 할까 한다. 노릇노릇하고 부드러운, 폭신하면서도 고소한 빵을 떠올려보라. 현대인들의 보편적 간편식으로 자리매김한 이 ‘빵’은 어떻게 식품으로서 완성될까? 밀가루와 강력분, 달걀과 이스트, 그리고 약간의 견과류를 모두 더하면 빵이 되는 것일까? 이 재료들을 한곳에 모아두면 당장이라도 빵집에 달려가 구매할 수 있는 따끈따끈하고 몽실몽실한 빵으로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직관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이 같은 추정이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 재료들을 빵으로 만드는 것은 무언인가. 몇 번이고 언급했던 ‘가변자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렇다. 다름 아닌 인간 일반의 ‘노동력’이 밀가루/달걀/이스트 따위의 불변자본을 ‘빵’이라는 완성된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이야말로 이 사회 모든 경제적 활동의 주역이자 경제적 가치 증식의 원천이 되는 바다. 우리 입안으로 뜨거운 풍미를 안기는 ‘빵’조차도 이 같은 경제학적 비밀을 암시하고 있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 기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지는 특별함을 예리하고 기민하게 체계화하고자 했던 학술적 조류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차고 넘쳤다. 이 글에서 이미 설명했듯, 경제학적/사회학적 영역에서 일렁였던 휴머니즘의 물결은 마르크스주의를 배제하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인간만의 특별함에 주목한 마르크스주의는 독특한 종류의 휴머니즘을 그 중심축으로 경제학-사회학-정치학-철학을 아우르는 방대한 학문적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의 사유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현대 신자유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씨들에게 작지 않은 의미로 작용하리라.
“정부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정책과 맞물려 심각한 노동권 박탈 상황에 처한 이주노동자들의 절규가 서울지방노동청 앞에서 울려 퍼졌다.”
······
“이날 기자회견에 모인 이주노동자들은 “오후 6시까지 근무하던 사업장에서 이제는 수당도 없이 9시까지 근무하고, 과거보다 적은 월급을 받아도 사업장 이동을 제한하는 고용허가제 때문에 옮길 수도 없다“며 “합법화가 이주노동자를 노예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후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 독소조항에 대한 개정‘과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합법화‘를 촉구하는 집회를 가졌다.”7
“지난해 노동권과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던 광주·전남지역 청소년들과 이주민들의 사연이 공론화됐다. 이들은 ‘법과 근로자의 권익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 폭언·폭행·체불·성희롱 등에 시달리면서도 생계유지를 위해 열악한 노동 조건에 순응해야만 했다. 청소년·이주민의 노동을 보호할 법적·제도적 장치도 미흡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임금 체불을 당하거나 최저임금을 받지 못한 청소년이 노동당국에 신고해도 사업주는 밀린 급여만 주면 그만이다. 처벌 규정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도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이동 제한‘과 ‘노동력 단기순환 정책‘에 따라 사업주의 권한에 종속되고 있다.”8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 전반에서 항상 ‘자본’과 ‘노동계급’의 필연적 대립을 시사해왔다. 그리고 그 예언에 답변이라도 하듯, (위 기사들의 내용대로)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에서도 ‘가변자본’의 구체적 형태인 ‘노동력’, 그리고 그 ‘노동력’의 소유자이자 판매자인 모든 ‘인간’씨, 즉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다각적 착취가 이미 참담한 수준에 이르렀다. 축복과도 같은 인간의 특별함은 이를 가변자본으로 착취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는 악질적인 자들에 의해 크게 위협 받고 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 63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직장인 가운데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해고 및 권고사직을 권유받은 비율은 전체 중 68.1%에 달했다고 22일 밝혔다. 이들에게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해고시점을 선택하게 했다. 그 결과, 코로나 이후 해고를 당한 비율은 무려 30.2%로 조사됐다. 즉 해고 경험자 10명 중 3명의 해고 시기는 코로나 이후였다는 것이다.”
······
“코로나 이후 해고방식으로는 ‘부당해고‘(33.5%), ‘정리해고‘(33.0%), ‘권고사직’(27.9%) 순으로 집계됐다. 특히 부당해고는 사용자가 근로자를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하는 것으로서, 코로나 이후 정당한 해고사유가 없거나 정식 해고절차를 밟지 않은 각종 부당해고에 따라 노사간 분쟁을 겪는 기업도 늘고 있다.”9
더욱이 근래에 발생한 코로나-팬데믹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는 그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자본의 소유주들께서는 불변자본(생산수단)을 독점하고 계시며, 이를 볼모로 삼아 재난 상황에 고통 받는 가변자본의 주인공들을 더욱 옥죄고 있다. 불변자본은 한 명의 자본가에게 독점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가 계급 일반’의 독점적 소유에 있다. 따라서 자신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가변자본으로 탈바꿈시키는 것) 외에 생계를 연명할 수단이 없는 노동자들은 이 자본가 계급에 완전히 종속된다. 자본가 계급 내의 어떤 특정한 자본가 한 명만이라도 자신의 특별한 상품을 구매해주기를 바라며 -또 이를 통해 삶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 영위할 수 있기를 바라며- 노동자들은 자본가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줄기차게 구매자-비록 악질적인 구매자일지라도-를 물색할 것이다. 그 어떤 훌륭한 이도 자본가 계급의 바깥에서 거대 불변자본을 굴리며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는 없으며, 자본의 소유주들은 이 같은 (불변자본에의)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마음껏 부려먹고, 또 물건 다루듯 함부로 대하고 있다. ‘인간’씨의 특별함은 ‘자본’의 성장스토리와 그 역사 속에서 점점 훼손되어왔고, 급기야는 사회적 모순의 핵심적 기제로 기능하며,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에서 이용당하고 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다. 이 사실은 이미 수없이 설명되고 논의되어왔으며, 오늘 이 글에서도 다시금 인간의 특별함에 대해 길고 긴 서사를 반복했을 뿐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충분히 특별하다. 더욱이 각자의 특수성을 지닌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체적 인간은 또 얼마나 특별한가. ‘인간’은 ‘인간’이므로 이미 특별하며, 그에 더하여 한명 또 한명 각각의 특성으로 인해 더욱더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오늘 하루를 살아내며, 스스로에 대한 어떠한 특별함도 느끼지 못했다면 이는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의 개성이 유별났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며, 당신의 정서적 상태가 그 원인적 요소일 가능성 역시도 크지 않다. 어쩌면 이미 당신은 이 사회 속에서 당신의 특별함을 잃어버려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노동은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통용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형태의 유용 노동이어야 할 테다.↩
사회의 일반적 틀 속에서 불특정 다수의 타인에게 쓸모를 제공하는 ‘가치’를 뜻한다.↩
‘화폐’ 역시도 일종의 ‘상품’↩
또한, 이때 ‘노동’ 행위와 그 힘의 시간적 양을 상품화한 ‘노동력’의 구체적 유용성(쓸모)은 노동자에 실제적/구체적 ‘노동’ 행위에서 말미암아진다.↩
이 경우에 6시간짜리 상품 노동력의 값어치는 30이므로, 6시간 노동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노동자의 삶을 재생산하는 데에 3시간(즉 30 만큼의 가치) 분량의 노동시간(가치)이 투여된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은 실제 수치와 비율을 달리하더라도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상품 ‘노동력’은 그 스스로의 생산에 투여된 ‘가치(노동시간)’보다 더 큰 ‘가치(노동시간)’을 실제 판매과정(노동과정)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주노동자, 노동권 침해 심각 – 강제추방과 고용허가제가 부르는 인권침해 사례 발표”(고근예), <인권운동사랑방>, 2004. 02. 04., <https://www.sarangbang.or.kr/hrdailynews/67264>↩
“[취약계층 노동 실태]<상> 인권·노동권 침해에 내몰리는 청소년들”(신대희 기자), <중앙일보>, 2018. 01. 01., <https://news.joins.com/article/22248863>↩
“코로나로 인한 직원 해고 잇따라, 부당해고>정리해고>권고사직 순”(김강한 기자), <조선일보>, 2020. 07. 22.,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2/20200722007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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