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⑨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⑨
3. 폴레마르코스와 대화(331e~336a)
* 폴레마르코스가 부친 케팔로스의 논의를 이어받으면서 논의의 국면은 정의의 정의(定義) 문제로 전환된다. 대화의 방식 또한 전기 대화편의 방식 그대로 시종일관 귀류법적 문답의 방식, 즉 상대의 처음 생각이 끝에 가서 정반대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들의 대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첫 번째 부분(331e-334b)에서는 케팔로스가 제시한 정의에 관한 생각이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으로 정립되면서 그 정의관이 안고 있는 한계가 정의의 쓸모 문제를 중심으로 다각적으로 검토된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334c~336a)에서는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친구와 적에 대한 규정이 수정된 후, 정의의 ‘훌륭함’을 토대로 하는 즉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가 지적되고 동시에 그러한 정의관이 당대 권세자들 일반에 편만해 있음이 함께 언급된다.
3-1(331e-332b); 폴레마르코스가 시모니데스를 인용하여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이다’라고 말하다.
[331e]
* 폴레마르코스는 ‘정의는 정직함과 남한테서 받은 것은 갚는 것’이라는 부친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선대의 시인 시모니데스를 끌어들인다. 시모니데스가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빚진 것)을 갚는 것’τὸ τὰ ὀφειλόμενα ἑκάστῳ ἀποδιδόναι δίκαιόν ἐστι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앞서 ‘맡은 것’λαβή(331c)이란 말이 ‘갚을 것’τὰ ὀφειλόμενα이란 말로 바뀌었을 뿐 내용상 이미 소크라테스에 의해 그 한계가 지적된 말이다. 그럼에도 폴레마르코스는 그러한 지적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자기가 보기에는 훌륭한 말 같다’δοκεῖ ἔμοιγε καλῶς λέγειν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주장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는 당대 아테네인들이 그러하듯 시인들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맹목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 같은 정도의 사람이 한 말은 믿어야 하며 설혹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은 뭔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폴레마르코스의 태도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가 ‘지혜롭고 신과도 같은 분이니까’σοφὸς γὰρ καὶ θεῖος ἀνήρ라고 비꼬듯 말한다. 이처럼 시모니데스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가 시인들을 힐난하거나 비꼬는 부분은 <프로타고라스>(339a-b)를 비롯해서 대화편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cf. <뤼시스>214b, <카르미데스>162a, <테아이테토스>194c.
* 앞에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당대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늘 시인들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그러니까 폴레마르코스도 당연하듯 그렇게 말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조차 시모니데스의 말이니 안 믿기도 쉽지가 않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당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시인들과 시인들의 작품은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별해주는 권위 있는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아테네에서는 호메로스의 작품은 거의 경전(經典)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시모니데스는 6세기 중반에 태어난 고전기 시인들의 대부격인 인물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플라톤도 <국가> 606e-607a에서 당대의 그러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플라톤도 기본적으로 전통을 매우 중시했던 사람이어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 선대 시인들과 그들의 작품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인들 특히 당대 시인들 대부분이 기득권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시가들을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혼란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각 자의 방종과 이기심을 부추기고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하고 있음 또한 목도하고 있다.
* 시모니데스(Σιμωνίδῃς 기원전 556?~468?)는 에게 해의 키오스 출신으로 그의 출생 연도가 보여주듯 그리스 고전기 시인들의 선구자로 바킬리데스, 핀다로스와 함께 ‘3대 합창시인’으로 일컬어진다. 호메로스 시절부터 이미 능력 있는 시인들은 당시 왕이나 참주 또는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의 공적을 노래하곤 했다. 페르시아 전쟁 때의 전사자의 묘비명, 특히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한 300인의 스파르타 용사를 찬양하는 노래는 아이스퀼로스를 꺾을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는 합창대가, 승전가, 찬가. 애가(哀歌) 등 여러 영역에 걸쳐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약간의 단편과 비문 정도만 전해지고 있다. 그는 특히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애가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다나에의 슬픔을 노래한 <다나에의 비가>는 남아 있는 그의 시편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기원전 476년경에 히에론 1세의 초청으로 시칠리아섬에 가있다가 히에론의 궁정에서 사망하였다.
[332a]
* 소크라테스는 앞서 케팔로스의 정의관이 갖는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했음에도, 폴레마르코스가 다시 시모니데스를 끌어들여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에 의아해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맡은 것’과 ‘갚을 것’이 같은 것임을 들어 그러한 주장의 문제점을 재차 환기시킨 후에, 시모니데스의 말을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앞서 제기된 문제와 관련해서라면, 그 말은 ‘친구끼리는 서로에 대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하되, 나쁜 일은 하지 않음이 마땅하다’라는 게 ‘그 취지’라고 답을 한다. 그리고 황금χρυσίον을 되돌려 주어야 할 때라도 친구에게 해가 된다면 되돌려주지 않는 것이 정의라는 게 그 취지임이 확인된다. ‘황금이 탐나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라는 주변의 오해도 이겨낼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로써 ‘정의는 갚을 것을 갚는 것’이라는 시모니데스의 정의관은 폴레마르코스가 이해한 취지에 따라 정의는 ‘친구끼리는 서로에게 무언가 좋은 일을 해주고 나쁜 일은 하지 않는 것’τοῖς φίλοις ὀφείλειν τοὺς φίλους ἀγαθὸν μέν τι δρᾶν, κακὸν δὲ μηδέν이라는 정의관으로 새롭게 확장된다.
3-2(332b~334b)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 즉 ‘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인가?
[332b]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의 정의관에 폴레마르코스의 해석이 더해진 이른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적 검토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상대의 주장이 갖는 일면성 또는 자기 모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우선 그가 말하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친구가 아닌 적χθρός일 경우에는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묻는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적한테도 갚을 것(빚진 것)은 단연코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적이 적한테 갚는 것(빚진 것)일 경우 그것은 그에 ‘적합한 것’ 즉 나쁜 어떤 것κακόν τι이라고 답한다.
* 갚을 대상이 적의 경우로 까지 확대되자 폴레마르코스는 ‘갚을 것’(빚진 것)το ὀφειλόμενον(to opheilomenon)이란 말 대신 ‘적합한 것’τὸ προσῆκον(to prosēkon)이란 말을 사용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가 사용한 ‘빚진 것’이란 말이 적의 경우에까지 적용되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 말 대신 ‘적합한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에 적합한’, ‘~에 해당하는’의 뜻을 가진 προσῆκον은 ‘빚진 것’, ‘마땅히 갚아야 할 것’을 의미하는 ὀφειλόμενον이란 말이 갖는 구체성과 당위성이 약화된 다소 애매하고 포괄적인 말이다.(이런 점에서 τὸ προσῆκον은 ‘합당한’으로 옮기기 보다는 ‘적합한’으로 옮기는 것이 더 원의에 맞는다고 판단된다. ‘어떤 기준이나 도리에 맞는’의 의미를 갖고 있는 ’합당(合當)한’이란 말로 옮기면 오히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뜻하는 το ὀφειλόμενον과 의미상 차이가 잘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폴레마르코스가 ‘빚진 것’이란 말 대신 ‘적합한’이란 말을 쓰자, 바로 시모니데스가 정의 무엇인지를 말함에 있어 시인처럼 ‘암시적으로 말한 것’ἠινίξατο 같다고 말한다. ‘적합한’이란 말이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의 의미를 더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갚는 것’τὸ προσῆκον ἑκάστῳ ἀποδιδόναι이라는 정의관은 언뜻 보면 ‘각자에게 고유한οἰκεῖος 몫을 주는 것, 각자가 저마다 고유한 제 일을 하는 것’이 정의라는 플라톤의 정의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적합함’이란 플라톤이 말하는 ‘자연에 따른(kata physin) 본래적 고유함’과 달리 친구와 적이라는 말이 이미 그 자신을 기준으로 언급된 것이듯이 주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 폴레마르코스가 표현을 바꾼 것임에도 소크라테스는 마치 시모니데스가 실제로 그렇게 바꾸어 말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고, 질문도 직접 시모니데스에게 던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폴레마르코스가 마치 자신이 시모니데스라도 되는 양 열심히 그를 대변하고 있는 모습을 빗대어 말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시모니데스를 포함하여 당대 시인들의 말들이 이현령비현령 아무나 자기 식으로 말을 바꾸어 표현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애매모호하고 암시적인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332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이전에 우선 그가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주는 것’라는 그의 주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부터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기술’τέχνη개념을 끌어들여 먼저 의술ἰατρικὴ과 요리술μαγειρικὴ이 ‘각기 무엇에 대해 무엇을 마땅한 것이자 적합한 것’으로서 주는 ‘기술’인지를 묻고, 그런 연후에, 그런 방식에 기초하여 ‘정의란 누구에게 무엇을 주는 <기술>’ἡ τίσιν τί ἀποδιδοῦσα τέχνη δικαιοσύνη인지를 묻는다.
*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시모니데스의 말과 그 말에 대한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이 결합되어 구성된 것이라, 시모니데스가 말한 ‘마땅한 것’το ὀφειλόμενον이란 표현과 폴레마르코스가 말한 ‘적합한 것’τὸ προσῆκον 이란 표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το ὀφειλόμενον은 앞서 ‘빚진 것’, ‘갚을 것’으로 옮겼지만 여기서는 맥락 상 ‘마땅한 것’으로 옮겼다. 전에도 설명했듯이 ὀφειλόμενον은 ‘마땅히 해야 하는’의 뜻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332d]
*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의술은 약과 음식을 주는 기술(당시 의술적 치료 방법은 기본적으로 복용의 방식이다)로 요리술은 요리에 조미를 해 주는 기술이라고 답을 한다. 그런 연후 정의에 대해서도 정의는 ‘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ἡ τοῖς φίλοις τε καὶ ἐχθροῖς ὠφελίας τε καὶ βλάβας ἀποδιδοῦσα이라고 답을 한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에 의해 처음 언급된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갚는 것’이라는 말은 ‘정의란 친구들한테는 잘 되게 해주고 적들한테는 잘못 되게 해주는 것’τὸ τοὺς φίλους ἄρα εὖ ποιεῖν καὶ τοὺς ἐχθροὺς κακῶς δικαιοσύνην으로 구체화되면서 비로소 검토 대상으로서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정립되기에 이른다.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박할 수 있는 준비가 마련된 셈이다.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자 방책’으로서 기술τέχνη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은 논박과정에 단편적이나마 정의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의 핵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것은 여기에서의 문답법이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상대 주장의 한계를 폭로하는 데 그치고 있는 전기 대화편에서의 문답법과는 다소 결이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어지는 두 번째 대화 국면에 가면 이러한 특징은 앞부분 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국가>에서의 대화가 전기 대화편과 달리 논박을 넘어 플라톤 자신의 적극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 나중에 점차 밝혀지겠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는 기술이긴 기술이되, 폴레마르코스가 생각하듯 특정 시기, 특정대상에게 특수한 무엇을 마땅한 것으로 주는 일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건 사물이건 기능이건 간에 모든 대상에게 언제나 가장 고유하고 가장 훌륭한 상태로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능력과 방책으로서의 기술이다. 따라서 정의라는 기술을 정의하면서 어떤 특정인, 특정 대상에 국한된 기술이나 특정 기능으로 정의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잘못된 의미 규정이다. 정의는 ‘정의로운 행위’만이 아니라 ‘혼의 내적인 상태’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모든 대상, 모든 행위, 모든 기능에 늘 ‘좋음(善, to agathon)’으로 작용하고 무조건적이고도 전일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이자, 앎(epistēmē)이고 힘(dynamis)이자, 훌륭한 상태(aretē)’인 것이다.
* 물론 여기서 기술 관련 논의는 아직 단편적인 수준에 불과하고 폴레마르코스 또한 플라톤적 기술 개념을 아직 알 리도 없다. 그럼에도 기술 개념은 이미 여기서도, 주관적인 답들만 늘어놓고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보다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논박하기 위한 기본 바탕이 된다.
[332e]
*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기술을 끌어들여 이른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하나의 테제로 정립시킨 후에 드디어 그것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에 착수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유능성과 쓸모에 관하여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 또한 장차 드러나게 될 ‘기술로서 정의의 능력(dynamis)과 기능(ergon)’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먼저 질병과 건강과 관련해서 그리고 바다의 위험과 관련해서, 친구들과 적들한테 잘 되게 해주거나 잘못되게 해줌에 있어 가장 유능한 이가 각기 누구인지를 묻는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의사ἰατρὸς 와 키잡이κυβερνήτης가 각기 그러한 사람이라고 답을 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람은 ‘어떤 행위πρᾶξις와 어떤 일ἔργον과 관련해서 친구들한테는 이롭게 해주되ὠφελεῖν 적들한테는 해롭게 해줌βλάπτειν에 있어 가장 유능할 수 있는지δυνατώτατος’를 묻는다.
*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도 폴레마르코스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답을 한다. 즉 ‘항전을 할 경우와 연합해서 싸울 경우에’ἐν τῷ προσπολεμεῖν καὶ ἐν τῷ συμμαχεῖν,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유능하다고 말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용감하게 나서서 싸울 사람은 그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연합해서 싸울 경우에도 자기를 절제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힘을 합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폴레마르코스의 이러한 대답은 비록 특정 사례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리가 있는 대답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일단 그가 말한 경우에서의 정의의 쓸모에 대한 내용상의 반박은 잠시 접어두고,(이에 대한 반박은 334c~336a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식으로 정의의 쓸모를 말하면 쓸모를 따지기도 전에 쓸모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고 반박한다. 이를테면 의사와 키잡이는 각기 건강한 사람의 경우나 항해하지 않을 경우에는 쓸모가 없듯이, 전쟁이 없는 평화 시기에는ἐν εἰρήνῃ 정의는 쓸모가 없다ἄχρηστος는 것이다.
* ‘전쟁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없겠죠?’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은 ‘전쟁을 하는 사람들’과 ‘정의로운 사람’이 ‘질병을 앓는 사람’과 ‘의사’의 경우처럼 정의로운 사람들 따로 있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인 양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어떤 행위’와 ‘무슨 일’과 관련해서 정의의 쓸모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질병이 없는 경우 의사의 쓸모’를 묻는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전쟁이 없는 경우 정의의 쓸모’를 묻는 말이다. 플라톤에게는 누구나 다 정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그에 따라 그가 그리는 이상 국가에서는 통치자와 군인, 생산자 모두 다 정의로운 사람이다.
[333a]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평화 시기에 농사γεωργία가 농산물의 취득을 가능하게 해주고 제화술이 신발의 획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정의는 과연 용도와 획득χρείαν ἢ κτῆσιν과 관련하여 어떤 경우에 쓸모χρήσιμος가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계약과 관련한 일 즉 거래의 경우라고 답을 한다. 여기서 계약과 거래를 나타내는 τὰ συμβόλαια와 κοινωνήματα는 모두 협력 상대κοινωνός와 합심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호 협력과 협의를 요하는 경우들이다.
[333b]
* 폴레마르코스가 정의가 쓸모 있는 경우로서 계약과 거래를 제시하자 소크라테스는 장기와 같은 게임이나 돌을 쌓은 일의 경우를 들어 각기 장기 기사와 건축공이 그 일에 더 유능한지 아니면 정의로운 사람이 더 유능한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가 각기 기사와 건축공이 더 나은 상대라고 답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와 마찬 가지로 장기를 둘 때이건 벽돌을 쌓을 때건 키타라를 연주할 때 건 그 일에 능한 사람들이 쓸모 있는 것이지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로써 정의의 용도와 획득과 관련하여 계약과 거래의 경우에 정의가 쓸모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한계가 드러난다.
[333c]
*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는 재차 금전 관계 즉 뭔가를 공동 구매하는 경우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그런 금전 관련 협력관계가 두 사람이 물건을 사거나 팔기 위해 돈을 사용하는 협력관계πρὸς τὸ χρῆσθαι ἀργυρίῳ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경우는 제외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함께 말을 사거나 팔 경우 정의로운 사람보다 말에 대해 더 잘 아는 전문가가 협력자κοινός로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는 다시 금은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 즉 돈을 맡기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일의 경우를 꺼내든다. 여기서 ‘금은을 함께 이용해야하는 경우’ὅταν δέῃ ἀργυρίῳ ἢ χρυσίῳ κοινῇ χρῆσθαι란 금화 또는 은화로 뭔가를 구매하는 경우가 아니라 그것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그 누군가가 그것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경우 이를테면 은행업이나 금융업 같은 협력관계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경우에 대해서도 금전을 맡기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란 ‘금전이 소용이 되지 않은 그런 때’ὅταν ἄχρηστον에야 정의가 쓸모가 있다χρήσιμος고 말하는 꼴임을 지적한다.
* 말ἵππος은 당시 부유층이나 거래할 수 있는 고가품에 속했기 때문에 더더욱 전문가의 협력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돈이 소용없는ἄχρηστον 그런 때에 정의가 소용되는χρηστον가요?’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서 ‘소용없는’의 원어는 ‘소용되는’χρηστον(chreston)’에 부정어 ἄ가 붙은 ἄχρηστον(achreston)이다. ἄχρηστον은 ‘쓰지 않음’(unused)‘과 ’소용없음‘(useless)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쓰지 않을 때에는 쓸모가 있게 되겠군요?’ἡ δικαιοσύνη ἐν ἀχρηστίᾳ χρήσιμος(333d)라고 말할 때는 ἄχρηστον을 또 ‘쓰지 않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두 가지 다른 뜻을 가진 ἄχρηστον이란 말을 이용한 소크라테스의 말놀이인지 아니면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라는 우리말 속담처럼, ‘쓰지 않음’은 곧 ‘소용없음’임을 말하고자 하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나타낸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또 어쩌면 돈의 보관과 관리만으로 돈을 버는 당대 신흥 은행업이나 고리채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냉소를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쓰지 않음’과 ‘쓸모없음’은 엄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333d]
* 결국 금은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에 정의가 소용이 있다는 주장은 마치 낫이나 방패, 리라를 보관만 하고 있을 때에나 정의가 소용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정작 쓸 때가 되면 정의가 아니라 포도나무 가꾸는 기술이나 중무장 병기사용술ὁπλιτική, 시가 기법μουσική이 쓸모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결국 이러한 이치로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정의란 ‘그 각각의 것을 ’쓸 때‘ἐν χρήσε에는 ’쓸모가 없다‘ἄχρηστος가 ’쓰지 않을 때‘ἐν ἀχρηστίᾳ나 ’쓸모 있는‘χρήσιμος 그다지 ‘요긴한 것’τι σπουδαῖον이 못 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렇듯 쓸모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그리 내세울만한 정의관이 못 된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 정의의 쓸모와 관련하여 전개된 이상의 문답들은 상대가 특정 사례를 통해 논변을 펼 경우 오히려 그 주장과 모순되는 다른 사례들을 최대한 두루 제시하여 그 주장의 한계를 폭로하는 이른바 소크라테스적 논박(elengchos)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전개된 논박이 갖는 의미 등 몇 가지 종합적으로 음미할 사항은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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