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⑧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⑧
[331d]
* 케팔로스가 소크라테스의 지적에 별다른 이의 없이 순순히 ‘옳은 말씀이다’ὀρθῶς라고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대뜸 정의에 관한 케팔로스의 견해가 ‘정의의 의미 규정’ὅρος δικαιοσύνης은 못된다고 비판한다. 그러자 이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폴레마르코스가 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 불쑥 대화에 끼어든다. 이에 케팔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여러분께 이 논의를 인계한다’παραδίδωμι ὑμῖν τὸν λόγον고 말한 후, 자신은 ‘제물을 보살펴야 한다’ἐπιμεληθῆναι며 웃으면서γελάσας 제물 쪽으로πρὸς τὰ ἱερά 가버린다.
* ἱερός(hieros)는 일차적으로 ‘신성한’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τὰ ἱερά(ta hiera)로 쓰일 경우 ‘제물’을 의미하고, τό ἱερόν(to hieron)으로 쓰일 경우에는 ‘성소(聖所)’, ‘사원(寺院)’을 의미한다. 그리고 케팔로스가 말한 ‘여러분’ὑμῖν은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 혹은 폴레마르코스와 뤼시아스 형제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곁에서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모두일 수도 있다. ‘보살핀다’의 동사 ἐπιμελέομαι(epimeleomai)는 ‘혼의 보살핌’ἐπιμελήια τῆς ψυχὴς(epimelēia tēs psychēs)으로서 철학을 강조할 때 많이 쓰이는 말이다. ‘혼의 보살핌’을 강조하는 소크라테스와 ‘제물의 보살핌’을 중시하는 케팔로스는 여기서도 대비된다.
* ‘의미 규정’의 원어 ὅρος(horos)는 원래 ‘토지의 경계’, ‘경계석’을 뜻하는 말로 ‘한계’, ‘끝’, ‘기준’, ‘규칙’, ‘목표’라는 뜻도 있고 ‘비율’의 뜻도 있다. 여기서는 ‘정의’(定義)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플라톤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기 대화편에서 줄곧 소크라테스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을 통해 요구하고 있는 것 즉, 탐문 대상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기 대화편 내내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요구는 충족되지 않는다. 물음에 접한 사람들 모두 케팔로스와 마찬가지로 사태의 본질이나 본성이 아닌 구체적 사례나 속성들을 답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크라테스가 그 대답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대답이 갖는 한계만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제1권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지속된다. 그러나 제1권 마무리에 가면 마침내 그 폭로의 단계를 넘어서려는 소크라테스의 단호한 의지가 표명된다. 제1권 말미에서 다시 살피겠지만 이것은 플라톤 대화편 전체의 구도뿐만 아니라, 그가 구상하고 있는 <국가>의 전체 논의 계획과 관련하여 제1권이 가지고 있는 중대한 함축을 내포하고 있다.
* 앞서(328c) 케팔로스는 제물을 막 바치고 소크라테스를 맞이했다가 여기서 대화를 접은 후 다시 제물 쪽으로 간다. 그가 다시 제물 쪽으로 간 것이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당황해서인지 제사가 아직 완전하게 끝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출구가 그쪽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려나 케팔로스가 제물을 바치고 나오면서 대화가 시작되고 또 케팔로스가 제물 쪽으로 가면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우리의 눈길을 끈다. 혹시 플라톤은 케팔로스도 트라쉬마코스처럼 문답에 따른 변화를 거부하고 자기가 하고픈 말만 던져놓고 처음 생각과 모습 그대로 자기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내보이려 한 것일까?
* 오랜만에 소크라테스를 불러놓고 이제는 대화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는 그가 이처럼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것은 어쨌거나 대화가 자기가 기대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폴레마르코스가 끼어들자 곧바로 논의를 인계하고 자리를 피하려는 모습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사실 케팔로스는 시종일관 재산 관련해서만 캐묻는 소크라테스가 마뜩치 않았지만 훈계의 방식이든 아니든 나름대로 점잖게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갑자기 소크라테스가 ‘의미 규정’이라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들고 나오자 이제 더 이상 문답을 나누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정말 대화를 즐기고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궁금했다면 자리를 뜨지 않고 남은 사람들의 대화를 경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케팔로스의 관심사는 역시 대화와 배움이 아니라 ‘혼자 말하거나 제물을 보살피는 것’이다.
* 곁에서 대화를 지켜보는 폴레마르코스도 마음이 편치 않아 어떻게든 참견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소크라테스가 ‘의미 규정’을 내세워 아버지를 비판하기에 이르자, 더 이상 부친이 문답을 이어갈 수 없음을 직감하고 바로 대화에 끼어든 것이다. 그런데 이때 폴레마르코스가 부친의 생각에 동조하면서 근거로 내세우는 것 역시 시인(詩人)의 말이다. 폴레마르코스는 ‘적어도 시모니데스의 주장에 어느 점에서 동조하신다면’εἴπερ γέ τι χρὴ Σιμωνίδῃ πείθεσθαι 아버지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χρὴ(chrē)는 ‘반드시 해야 한다’, ‘당연히 요구된다’의 의미를 갖는 비인칭 동사이고 그 동작내용을 나타내는 πείθεσθαι(peithesthai)는 ‘설득하다’의 의미를 갖는 πείθω(peithō)의 현재 부정사이다. 그런데 πείθεσθαι가 여격(與格,dative)과 같이 쓰일 경우 그 말은 여격에 해당하는 자에게 ‘복종한다’, 그 자를 ‘믿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시모니데스가 여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보다 정확히 옮기면 ‘적어도 시모니데스에게 뭔가 복종해야 한다면’, ‘적어도 뭔가 시모니데스의 말을 믿어야 마땅하다면’으로 옮길 수 있다. 이 말은 폴레마르코스를 비롯해 당대 사람들 모두 시인들의 말은 내용이 어떻든 일단 믿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음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도 그것을 환기시키며 아버지 말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폴레마르코스와의 대화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직면해야할 또 다른 도전과제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시인들에 대한 당대인들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것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다.
* 폴레마르코스는 케팔로스가 논의를 인계하겠다고 하자 ‘그렇다면, 제가 아버님의 모든 것에 대한 상속자 아닌가요?’οὐκοῦν ἐγώ τῶν γε σῶν κληρονόμος;라고 반문한다. 이 말은 단지 ‘자신이 아버지의 상속자’임을 확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당연히 이미 그는 상속자이다), 그 자신 상속자로서 재산만이 아니라 ‘논의와 생각까지도 이어받는 자’임을 내세우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러므로 ‘τῶν σῶν κληρονόμος’(tōn sōn klēronomos)를 단순히 ‘당신(아버지)의 상속자’로 옮기기 보다는 τῶν σῶν(tōn sōn)의 의미를 살려 ‘당신(아버지)이 가진 모든 것들의 상속자’라고 옮기는 것이 그 말의 의도에 보다 부합한다. 즉 그 말은 ‘아버지께서 논의를 인계하신다면 제가 아버님의 모든 것에 대한 상속자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라는 뜻이다.
* 케팔로스는 폴레마르코스의 말에 ‘웃으면서’γελάσας 자리를 떠나고 있는데 이 웃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혹자는 문답에서 벗어난 케팔로스의 안도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혹자는 케팔로스가 자기 아들이 이름 뜻 그대로(폴레마르코스Πολέμαρχος는 ‘싸움을 이끄는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에 열의를 가지고 잘 대처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혹자는 소크라테스와 젊은이들이 나누는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나이든 사람들 일반의 경멸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상속자로서 재산만이 아니라 논의까지도 이어받겠다고 나선 것이 기특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가난한 주제에 자기 지혜에 도취해서 감히 당대 거물로 자수성가한 자신을 다그치고 있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가소로움이 실린 것이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단어 하나에 매달려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 함축을 좇는 것도 플라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 아무려나 어떻게든 부친 편을 들려는 폴레마르코스의 태도는 가상해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늘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혈연과 가족주의는 양날의 칼이다. 그것이 내포하는 생물학적 맹목성은 가문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혈연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맹목성으로 인하여 가족들에 대한 감정 일체를 애착이나 집착으로 증폭시켜 때론 가족들 사이를 남보다 더한 사이로 갈라놓기도 하고,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해결 불가한 수렁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자식이라고 해서 부친의 생각까지 다 상속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를 잘 보살피는 것은 자식 된 도리로서 마땅한 일 지라도 아버지가 갖고 있는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마저 옳다고 믿고 받드는 것은 결코 도리가 아니다. 이처럼 생물학적 맹목성 또는 당파성은 때론 그 혈연 집단의 이익과 연대를 관철하는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그 만큼 분별력을 마비시켜 그 집단을 광기로 물들게 하는 독약이 되기도 한다. 물론 실천을 결단할 때가 있고 또 그때가 오면 더 이상 회의하지 않고 의지와 감정을 실어 온몸을 던져야 한다. 그럼에도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그렇게 몸을 던지는 순간마저 지성의 끈을 놓지 않는 것 또한 철학의 힘이다. 소크라테스의 삶이 그것을 그 자체로 증명한다. 그의 말 그대로 ‘성찰이 없는 삶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없는 삶이다’ὁ δὲ ἀνεξέταστος βίος οὐ βιωτὸς ἀνθρώπῳ(<소크라테스의 변명> 3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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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의 대화는 일단락된다. 앞서 이들의 대화는 소크라테스가 케팔로스에게 노령에 대한 심경을 묻는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케팔로스가 생활방식을 거론하자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재산 문제와 연계시켜 연이어 캐묻게 되면서 결국 정의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고 케팔로스가 물러난 후 제1권의 두 번째 대화 국면 즉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면 이제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의 대화 부분을 마무리하면서 플라톤이 케팔로스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종합적으로 음미해 보자.
*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의 대화에서 케팔로스의 언급 부분들은 크게 1)소크라테스에게 건네는 인사와 환영의 말(328c-e), 2)‘노령을 수월하게 해주는 유일한 원인으로서 생활방식’(329a-d), 3)‘재산과 훌륭함의 관계’(329e-330a), 4)‘ 상속과 돈의 취득, 재산에 대한 입장’(330b-c), 5)‘재산이 가져다주는 덕에 대해서’(330d-331b) 등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1)에서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를 맞이하며 그 자신이 먼저 찾아가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노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자주 찾아줄 것을 권하고 있지만, 그의 말에는 나이 든 노인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강권조의 말투와 와 훈계조의 과시가 묻어나 있다. 그리고 2)에서는 불행을 노령 탓으로 돌리는 세속의 노인들과 달리 자신은 시인 소포클레스가 그러하듯, 노령임에도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과시하면서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는 유일한 원인은 다름 아닌 생활방식임을 주장하고 있다. 3)에서는 생활방식이 재산에 기초한 위안거리 때문이라는 일반 사람들의 지적에 대해 재산과 생활방식 모두가 갖춰지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나름 유연한 태도로 반론을 펴고 있다. 그러나 반론을 통해 재산의 필수성에 대한 속내를 드러냄으로써 생활방식이 유일한 원인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뒤엎는 결과를 초래한다. 가난한 소크라테스를 앞에 두고 재산이 훌륭한 삶의 필수적 조건임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케팔로스의 태도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모멸적이다. 그리고 4)에서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그 자신 재산을 상속받은 사람이되 그 역시 돈을 자식처럼 여기는 ‘돈 모으는 자’임이 확인되고, 5)에서는 그가 가진 많은 재산을 바탕으로 그가 덕을 본 것들에 대해 자랑하듯 제법 길게 늘어놓는다. 이 가운데 특히 1)과 2), 5)는 재산가로서 자신의 삶을 자랑스레 과시하는 케팔로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고, 3)과 4)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음에도 그것을 짐짓 무시하는 케팔로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5)는 재산이 가져다 준 좋은 점으로 정의롭고 경건한 삶을 사례까지 동원하여 길게 이야기하지만 이미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와 경건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케팔로스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소크라테스의 지적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이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2)와 5)의 경우, 언급 분량이 곧이어 이어질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문답형 대화와 너무나 비교될 정도로 장광설에 가깝다. 두 경우 다 대답의 길이가 버넷판으로 각기 30행에 달하는데 이는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늘어놓는 트라쉬마코스 장광설에 필적하는 분량이다.
* 사실 케팔로스는 일단 겉으로만 보면 이상할 정도로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질문에 아주 선선하게 호의적으로 응하고 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의 의도 섞인 지적에도 매번 ‘진실된 말이다’ἀληθῆ(329e, 330c) ‘옳은 말이다’ὀρθῶς(331d)라는 말로 맞장구까지 치고 있다. 어쩌면 케팔로스는 경륜 있는 노인이자 어른으로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누그러졌고, 특히 연하의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함과 포용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어쩌면 케팔로스가 이제 노령에 접어들면서 판단력도 옛날과 같지 않아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의도는 물론이고 문답의 내용들 제대로 눈치 채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이러한 추측들 모두 플라톤이 드러내고자 하는 케팔로스의 모습과는 일정하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우선 평생에 걸쳐 온갖 사람들과 만나며 온갖 이야기를 나누며 온갖 풍파를 다 겪었을 케팔로스의 경륜과 내공을 염두에 둔다면, 케팔로스가 비록 노령이어도 소크라테스의 의도와 그가 제기하는 지적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늙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케팔로스가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마다 매번 호응하고 옳다는 말을 연발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깊이 이해하고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판단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누가 보기에도 케팔로스를 대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그리 호의적이지도 않고 지적 또한 케팔로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임이 분명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케팔로스가 시종일관 그리 선선하고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케팔로스 자신 소크라테스의 말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 자신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다 알아차리고 있지만, 그의 지적에 능치 않은 논리로 대응을 했을 경우, 그 자신 어떤 처지에 직면할 지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지레 그 국면을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사실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 일행을 막아서고 집으로 데려오는 전후 정황을 되새겨 보면, 케팔로스가 소크라테스를 초대할 목적으로 그리했다고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초청 목적 또한 비록 거류외인이지만 자수성가하여 귀족 못지않은 권위와 품위를 갖추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소크라테스에게 과시하고 싶어서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래서 케팔로스는 훈계조로 대화를 시작하였으나 곧바로 이러한 자신의 생각이 여의치 않음을 알고 내심 당혹스러웠으나 체면상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케팔로스는 그러한 상황에서 의연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은 충분히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노련한 노인들이 짐짓 그러듯 소크라테스가 무슨 말을 하건 태도상으로는 점잖게 받아들이되, 소크라테스의 질문 의도와 상관없이 그냥 자신의 생각만 늘어놓기로 작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어가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소크라테스에 대한 생각 즉 듣던 바대로 소크라테스가 ‘그저 입만 살아서 살아가는데 별 소용도 없는 논리나 따지려 든다’는 자신의 생각이 역시 맞았다고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 그 자신 성공한 어른으로서 게다가 경륜까지 갖춘 사회 원로로서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와 경건에 대해 한 수 가르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 만약 이러한 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면 어쨌거나 플라톤은 문답이나 철학적 의미규정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귀 막고 자기 생각만 늘어놓는 대표적인 군상으로서 처음부터 케팔로스와 트라쉬마코스 두 사람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 일행의 길을 막아서며 체류를 강권하며 설득을 부정하는 장면은 앞서 살폈듯 앞으로 전개될 트라쉬마코스를 드러내기 위한 복선일 뿐만 아니라, 케팔로스까지 포함해서 그들 모두 자신의 약점과 무지를 드러내 보이기 싫어하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자기 스타일로 자기가 생각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완고한 사람들임을 드러내기 위한 복선일 수도 있다. 물론 두 인물의 스타일은 매우 대조적이다. 둘 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처음부터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지만, 한 사람은 그런 내색 없이 허투루 속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고 점잖게 처신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속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시종 일관 공격적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들은 하나같이 공동체적 삶에 등을 진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며 돈과 권력의 힘을 믿는 그야말로 삶의 진실에 무지하고 혼의 불행을 안고 사는 어리석은 군상들인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이 케팔로스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태도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대 기득권층으로서 그가 가진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라 할 것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대화 시작부터 일관되게 케팔로스에 대해 재산 관련해서만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이 당대 최고의 재산가 케팔로스를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플라톤은 결국 등장인물 케팔로스를 통해 그가 말하는 훌륭한 생활방식이란 다름 아닌 그야말로 재산에 힘입어서나 가능한 것으로서, 자신의 개인적인 안녕과 행복을 위한 나름의 방책일 뿐이며, 그것에 격조까지 내보이기 위한 일종의 생활 속 행위 지침에 불과한 것임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사실 케팔로스 같은 재산가들에게 부(富)πλοῦτος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미 충분하고, 또 굳이 힘들게 절제해가며 결핍을 견뎌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산가들은 이미 자족함을 누리고 있다. 물론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정도의 모습과 태도를 간직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태도는커녕 격조라고는 눈곱만큼 찾아 볼 수 없는 게다가 눈 하나 까딱함이 없이 적극적으로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재산가들도 부지기수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케팔로스를 적극적으로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이 케팔로스 같은 부류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이미 케팔로스가 내세우는 개인적인 수준의 자부심이 아니다. 당대 기득권층이자 신흥 부유층인 케팔로스 정도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단순히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 ‘나는 계율을 어기지 않았음’을 떠벌이며 내세우는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내면의 덕과 지혜를 갖추고 있지 않음’, ‘재산과 명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잘 한 것이 없음’을 뼈아프게 반성하며 부끄러워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자유와 평화’, ‘정의와 경건’이 정말 절박하게 요구되는 이 절대 절명의 위기시대에, 당대 사회경제적 현실의 가장 큰 수혜 계층이자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케팔로스 부류의 사람들이, ‘자유와 평화’, ‘정의와 경건’이라는 말을 그저 자신의 개인적 삶의 안녕 차원에서만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이 자신들의 삶이 마치 정의롭고 경건한 삶에 일치하는 삶인 양, 아무런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내세우기까지 한다는 것은 정말 더욱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정의는 단순히 그러한 개인의 사사로운 안녕과 행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인 영혼의 조화를 통해 드러나는 덕과 지혜로서, 그 자체에 의해서건 결과에 따라서건 자신은 물론 공동체 모두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후의 보상 또한 케팔로스가 말하듯 사후의 처벌이 두려워 ‘마지못해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신들과 남에게 빚지지 않는’(331b) 그런 정도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벌을 덜 받으려고 비싼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적극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대로 ‘평생을 통해 각고의 노력으로 정의가 그 자체로나 결과에서나 늘 좋은 것임을 믿고, 덕과 지혜를 쌓아 가면서 개인의 내면에서나 사회적 삶에서나 하나같이 정의로운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 당대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케팔로스는 거류외인을 포함하여 당대 부유층 모두에게 요구된 공적 기부(leitourgia)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케팔로스는 당연히 그런 점을 재산 덕택에 갖게 된 ‘가장 좋은 것’τί μέγιστον ἀγαθὸν이자 명예로 자랑스레 내세울 법하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린 케팔로스는 그것을 입에 올리고 있지 않다. 이 또한 최소한 케팔로스가 실제 그런 공적 기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거나, 이미 플라톤 자신 <국가>에서 케팔로스를 그 만한 수준의 인물로 설정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 아무려나 기타 여러 가지 점에서도 <국가> 도입부에서 케팔로스의 등장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서두에서도 살폈듯이 <국가>의 논의가 마무리되는 제9권에 가면 부정의한 삶에 대한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이 증명된 다음에, 마지막 제10권에 가면 정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보상의 문제와 그들의 영혼의 불멸에 대한 문제가 다시 거론된다. 이것은 제1권과 제10권이 서로 주도면밀하게 맞물려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 제10권의 그 내용은 제1권에 담긴 여러 가지 도전들 가운데 하나 즉 케팔로스 같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와 사고방식과 그들의 기복적 종교관에 대한 플라톤의 답변인 것이다. <국가> 제1권의 케팔로스 역시 폴레마르코스가 거론한 시인들과 트라쉬마코스와 함께 <국가>라는 플라톤 자신의 거대한 정치철학적 프로젝트 안에서 반드시 비판적으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될 당대 아테네 현실을 대표하는 인물상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알림> 추석 연휴와 개천절 공휴일을 맞아 정암학당 현장 강의가 휴강함에 따라 웹진 연재도 잠시 쉬었다 10월 중순부터 다시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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