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리스(sexless) [퍼농유]
우쑵니다.
더위 먹은 김에 공자 빼갈 먹는 소리 한 마디 하려고 합니다. 일할 의욕을 잃고서 몽롱한 정신에 인터넷을 들락거리다가 어떤 기사를 보고 불현 듯 일어난 생각입니다. 잠못 이루는 열대야가 만들어낸 난삽한 생각들입니다.
섹스리스(sexless)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 성인 부부 35.1%는 한 달에 1번 이하의 관계를 맺는 섹스리스 부부라고 합니다. 상당히 높죠. 세계 평균 20%, 미국 평균 6%에 비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일본은 44%. 1등입니다. 우리나라는 2등.
어쩌면 이런 통계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될지도 모릅니다. 설문지 답변을 솔직하게 쓸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지만 문화적 차이도 고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점은 부부 사이에 섹스리스가 상당히 높은 수치를 차지하는 시대라는 점입니다.
더불어 현대는 리스(Lease)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정수기 리스, 자동차 리스부터 사무실과 집까지 리스해서 쓰는 일은 상당히 실용적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입니다. 유용하면서도 깔끔하죠. 귀찮은 일이 없습니다. 어쩌면 섹스리스 시대에 ‘섹스 리스(Sex Lease)’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 중년들의 진정한 사랑은 불륜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더군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실용적 사랑은 불륜이 아니라 리스가 대세를 이룰지도 모릅니다.
궁금한 것은 섹스리스의 원인이었습니다. 주요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이더군요. 첫째 피로감.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와 생활고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만사가 귀찮다는 것입죠. 만성피로로 찌들게 만드는 피로 사회는 인간 행복의 본능까지도 저하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목할 만한 원인은 두 번째입니다. 흔히 하는 말이 있더군요. “가족까리는 키스하는 거 아니다.” 섹스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왜 그럴까요? 아마도 가족이라는 친밀감이 깊어지면 성적인 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친밀감이란 친하고 가깝게 지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잘 아는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친밀감과 성적인 매력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부부는 의리로 삽니다.
일반적인 생각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생각과는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왔더군요. 인터넷에서 본 기사입니다. 이스라엘 헤르츨리야의 복합 센터의 심리학 교수 구리트 번바움은 친밀함이 깊으면 성적인 욕구가 더 강할 수 있다고 오히려 반대로 주장하더군요. 실험을 통해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친밀함이 커져도 성적 욕구는 솟아나며, 규정하기 힘든 묘한 감각인 성적 욕구를 장기간에 걸쳐 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반응성을 높이는 것이다.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이 번바움의 결론에 따른다면 섹스 리스의 원인은 부부관계의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거꾸로 생각해야 합니다.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섹스리스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죠.
왜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질까? 문제는 그것입니다. 아 물론 다른 사회 정치적 분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친밀함의 깊이와 섹스는 반비례한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죠.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결혼한 뒤에 몇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아내는 이제 더 깊이 알아야할 상대가 아니다.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상이다. 알 필요가 없다. 왜? 모두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친밀성은 깊어지지 않는다. 친밀성이 깊어지지 않으니 섹스는 불가능하다. 이런 논리가 아닐까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무시가 친밀성이 깊어지지 못하게 가로막고 그것 때문에 섹스에 대한 흥미는 감소한다. 결국 더 친밀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섹스는 불가능하다.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섹스리스를 ‘섹스 리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요. 남편 혹은 아내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오만을 먼저 버릴 것. 남편 혹은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을 것.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남편 혹은 아내 그 사람 그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겸허히 경청할 것. 경청은 설렘이기도 합니다. 설렌다면 “그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물론 함정은 있습니다. 실행하기 힘든 일이라는 점.
그러나 이런 논리는 비난 섹스리스의 문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트 때문입죠.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이라는 감정들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름답지만 비루하며, 기이하지만 적나라하죠.
이 책의 구성은 특이합니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우연적으로 배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우연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우연적 배열들로부터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은 사랑이 성숙해 나가는 연대기이며 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이고 바르트는 구조주의자라고 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했고 바르트는 주체를 해체합니다. 문학적인 맥락에서 볼 때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대립적 입장에 서 있습니다. 바르트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고 하면서 저자의 죽음을 말합니다. 마치 주체의 죽음처럼 느껴집니다.
사르트르가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저자의 기능이나 저자의 의미가 담겨 있는 작품을 강조했다면 바르트는 수동적으로 의미를 경청하고 음미하는 독자의 능력과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담긴 텍스트를 강조했습니다. 텍스트는 저자의 의미를 해독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주이상스(jouissance, 향유, 즐김)의 대상이 됩니다.
섹스리스를 사랑과 관련시킬 때 드는 의문이란 이런 겁니다. 타자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증가할까? 아니면 감소할까? 바르트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멋진 생각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불투명함이 명백함으로 전환되는 이 역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불투명함이 명백함이 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논리는 역으로 타자에 대한 명백한 앎은 사랑을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역설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거나 친밀한 사람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착각입죠. 이러한 착각과 오만에 근거하여 나는 너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너의 이런 속성 때문에 놀라우며, 너의 의도가 이런 것이기에 화가 나고, 너의 생각이 이렇기에 짜증이 난다고 투덜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과연 타자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판단과 앎에 근거하여 상대를 함부로 대하고 평가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마치 어떤 작품을 읽고서 이 작품의 쓴 작가의 의도는 이것이며, 이러한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과서적 태도는 온당한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잘 안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그를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문제는 잘 알고 있다는 오만과 착각입니다. 그래서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된”다고 하는 말은 고정된 이미지로서의 외관을 통해서 실체를 규정하려는 주체의 오만한 노력들이 파기될 때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주체의 자기도취가 이르는 결말은 타자에 대한 지배 아니면 싫증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숙한 사랑의 지혜를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그대로’라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대로 TEL.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정의해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꿈꾼다.”
사랑하는 상대는 이제 주이상스(jouissance)의 텍스트가 됩니다. 바르트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향유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타자는 어떤 저자의 하나의 의도가 담긴 작품이 아니라 무한히 음미되어야할 텍스트인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의미가 정의되어 고정되어야할 명증함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경청하며 음미되어야할 모호함이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설렘의 흥분을 가지고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사랑의 역설에는 놓쳐버린 역설이 또 있지 않을까요. 독자의 탄생을 위해서 저자를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주이상스를 위해 주체는 죽었습니다. 결국 그는 ‘소유의 의지’를 포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에 타자를 소유하려는 의지를 포기하려는 것입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이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유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려는 순간 저자와 사랑의 주체는 죽은 것입니다. 바르트는 이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비소유의 의지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격렬하고도 메마른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메마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의 환상, 그 상상계가 메마르게 되기 때문에 주체는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소유의 의지에 대한 상념이 상상계의 체계와 단절되기 위해서는 내가 언어 밖의 어디엔가로,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해야만 한다.”
무기력하고 메마른 사랑이란 또 다른 사랑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창조적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는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긍정적 역설을 말했지만, 또 동시에 타자의 불투명함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사랑을 창조할 수 있는 저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역설에 빠지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를 강화시켰다면 바르트는 주체를 무화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주체의 능력이 강화될 때 사랑은 투쟁이 되고 밀당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체의 능력이 무화될 때 사랑은 식은 재가 되고 관조가 됩니다.
바르트는 도가(道家)적 사유와 근접해 있습니다. 바르트는 분명 노자(老子)의 논리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주희(朱熹)는 노불(老佛)에 대해서 비판적이죠. 죽은 재와 마른 나무와 같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항시 권모술수적인 측면으로 흐른다고 비판하죠.
바르트도 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이 ‘그대로’ 혹은 ‘비소유의 의지’라는 사랑의 방식이 빠질 수 있는 사기술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비소유의 의지가 어떤 전략적인 생각이라면(마침내!)? 만약 내가 그 사람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그를 정복하려 한다면(물론 은밀하게?) 그를 보다 확실하게 소유하기 위해서 내가 사라진다면?”
전략적으로 주체를 무화시킨다면? 그것은 사기술이죠.
아! 죄송합니다. 더운데 피곤하게 해드렸군요. 쿨럭~
세줄 요약은 이렇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잘 안다고 오만 떨지 말 것.
상대를 그 자체 그대로 경청할 것.
그러나 사기 치지는 말 것.
이상입니다.
ㅎㅎㅎ 결론이 재미있어요^^ 바르트의 ‘불투명함은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말 인상적이에요. 명백함이 명백하기 어렵기에 불투명함은 항상 신비로 다가오는 것 같지만 그 불투명을 깨고 들어갔을 때도 끝없는 불투명이 있기에 그래서 비소유의 의지를 소유하는 척하는 것 같습니다. 비소유의 의지는 소유하고자 하는 의지와 같은 것 같아요.
사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 그런 뜻에 공감하시는 건…… 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