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삶과 플라톤의 ‘동굴’ [평이의 궁시렁]
‘우리 모두는 스스로 세상과 이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똑같은 지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모두의 지적인 능력도 때론 망각되거나 왜곡되면서, 그 어떤 외부의 상황과 조건에 눌려 변형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이 자신의 대화편 [국가] 7권에서 제시하는 ‘동굴’ 이야기는 바로 이런 외부의 조건에 대한 재미난 비유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동굴에 갇혀 동굴의 벽면에 비치는 현란한 그림자의 세계를 보며 자라온 죄수들에 대한 이야기. 그 동굴 속에서 죄수들은 동굴 밖의 세계에 찬란히 진리의 태양(플라톤에게는 ‘좋음의 이데아’)이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동굴 입구에서 타오르는 횃불에 의해 생겨나는 현란한 그림자의 세계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과 사회, 세계에 대해 판단하고 토론하며 산다.
아마 이 비유를 들으면, 당연히 여러 영화의 이미지들이 떠오를 것이다.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주입받으며 알처럼 매달려 사육되는 미래세계를 다룬 영화 <매트릭스>부터, 생방송 세트장에서 어린 시절부터 방송을 위해 사육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트루먼 쇼>까지.
그런데 과연 이런 이야기가 단지 영화 속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우리도 내가 어찌할 수 없이 속하게 된 수많은 외부적인 조건에 휘말려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 심지어 욕망까지도 좌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때로는 ‘한국’이나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 강한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국가가 제공한 다양한 감정과 자부심에 휘둘려 한때 우리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들의 젊음을 그 자랑스럽다 여긴 국가에 헌신하지 않았던가? 또한 지금도 ‘남성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사회가 강요하는 틀에 맞춰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착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만, 동시에 비슷한 사회적 환경과 조건 속에서 태어나 엇비슷한 상황 속에 휘말려 나름의 시대적인 동굴 속에서 세상과 사회에 대해 판단하며 산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모두는 결코 세상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보며 살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생각이나 관념 더 나아가 그런 제도들’까지도 지칭하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지적인 능력을 늘 그렇게 굴절시킨다. 누구보다도, 어느 시대보다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사실상 여전히 우리 외부의 그 어떤 동굴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는 노예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우리 외부의 미디어 환경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이 조금이라도 왜곡되고 굴절된다면 그 파괴력은 막강하다. 일부 보수 언론 매체에 사로잡힌 보수적인 어른들, 또 매순간 자극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들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러한 영향력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플라톤이 말하는 진리의 태양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사실 그렇다. 오늘날 현대 철학의 지형은 더 이상 그 어떤 명확한 진리의 세계도 확인할 수 없고, 때로는 그런 진리를 내세우는 일이 폭력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무언가 진리를 내세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철학은 마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내세웠던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우리 현대인들이 이런 진리 추구의 방향성을 상실한 채, 지금의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기만 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희망은 그저 헛된 이데올로기였기에,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체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늘 자신의 시대에서, 스스로가 갇혀 있는 시대의 ‘동굴’을 감지하면서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을 꿈꾸려는 지적인 노력의 일환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자신이 갇혀 있는 ‘동굴’의 실상을 몸소 경험하며 나름의 괴로움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인 괴로움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면, 이로부터 시작해 ‘동굴’로부터 탈출하려는 우리들의 지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은 여전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우리가 함께 속해 있는 ‘동굴’의 상황을 몸소 느끼며 경험한다. 때때로 내가 느끼는 괴로움과 외로움, 삶의 고통과 고뇌, 물질적인 고민과 절망 때문에 늘 혼자 안으로만 썩어 문드러지는 내 모습을 본다. 그럼에도 이런 나의 모든 괴로움이 나만의 문제는 아닐꺼라 생각하며 다시 딛고 일어선다. 아마도 이런 우리의 모습이 서로 만남과 실천을 이루어낼 때, 조금이나 동굴이라는 상황은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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