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는가 [베를린에서 온 편지 5]
베를린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는가 [베를린에서 온 편지 5]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재작년 겨울이었다. 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따스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학교 본관건물 뒷마당을 걷고 있었다. 눈이 내려 교정 전체가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본관 뒷마당 한쪽 구석에는 히틀러 파시즘에 맞서 저항하다 죽음에 이른 훔볼트 대학교 학생들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 역시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이날 비석 바로 앞에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꽃다발이 높여 있었다. 새하얀 눈에 덮인 비석과 꽃다발의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애잔하게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색색의 꽃송이들은 지금도 누군가 희생된 자들, 쓰러져간 자들을 추모하고 있음을 꿋꿋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파시즘과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 그리고 분단과 냉전이라는 독일 현대사의 흔적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려는 독일인들의 노력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벽에서는 파시즘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벽화를, 거리에서는 조각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들의 흔적들을 보존하려는 베를린의 노력은 이 도시가 현재 전 세계인들로부터 각광을 받는 새로운 현대예술의 메카이자 관광도시로 급부상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예컨대 베를린에서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Kaiser Wilhelm Ged?chtniskirche)는 이 도시를 새로 찾은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전달될까?
거대한 교회와 호화로운 궁전이 주요 관광지로 손꼽히는 여느 유럽 도시들과는 달리, 베를린의 전통적인 관광지인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파괴된 상태 그대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1895년 완성된 이곳은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2세가 독일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그의 할아버지 빌헬름 1세를 기리기 위해 만든 교회다.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독일은 소연방들로 분열되어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봉건적인 잔재 속에서 낙후된 상태를 타파하고 급속한 근대화와 공업화를 이룩하여 유럽 최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이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이러한 독일 통일과 그 이후 독일의 번영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으며, 그에 걸맞게 113m의 높이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큰 교회당을 가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대국 독일의 위용을 자랑하던 이 교회는 2차 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크게 훼손되었고,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예배당과 잘려나간 첨탑의 꼭대기는 급격한 근대화 이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나아가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향해 치달아 결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폐허와 분단이라는 처참한 상태로 전락해버린 현대 독일의 역사에 대한 독일인들의 트라우마를 반영하는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이 트라우마를 가리기 위함이었는지, 전쟁 이후 서베를린 당국은 도시 전체의 재건에 맞추어 교회 역시 재건축을 시도했다. 그러나 서베를린 시민들은 2차 대전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교회를 훼손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시당국의 재건축 계획을 좌절시켰다. 결국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폐허가 된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전쟁의 참상을 널리 알리기 위한 기념 교회로 관리되고 있다. 그것은 독일이, 그리고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과거를, 그리고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비극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은 베를린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상징하는 이 건축물 바로 옆에는 지난 2005년 세워진, “살해된 유럽의 유태인들을 위한 기념비”, 일명 “홀로코스트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축구장 두 개 크기인 13,100 m² 면적의 부지 위에 총 2711개의, 서로 다른 크기로 죽은 자의 관을 형상화한 모양의 조각들이 세워져 있고 관광객들은 각 조각상들 사이로 이동하면서 이곳을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이 지어질 때 ‘과연 시내 한 복판에, 그것도 그렇게 넓은 땅 위에 꼭 유태인 기념비를 지어야 하는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시내 중심이자 베를린을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문과 독일 연방의회 건물 바로 인근에, 그것도 드넓은 부지 위에 조성된 이 기념비들은 독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과거의 비극을 잊지 않고 여전히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 홀로코스트 추모비에서 멀지 않은 곳이자 (서울의 종로처럼) 베를린에서 가장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에는 훔볼트 대학교, 국립 오페라 극장, 베를린 돔과 같은 주요 역사적인 건물들이 몰려 있다. 그런데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이러한 역사적 유적들 한 가운데,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조각상이 건물 안쪽에 전시되어 있다. 보통 노이에 바헤(Neue Wache)라고 불리는 이 건물의 내부에는 독일의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여성 반전 예술가인 케테 콜비츠(K?the Kollwitz)가 조각한, 쓰러진 병사 아들을 안고 있는 피에타상이 놓여 있다. 일체의 조명이 없는 커다란 건물 내부에는 어둠이 깔려 있고 오로지 입구와 천장의 틈새를 뚫고 온 햇빛만이 이 피에타상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우리가 전쟁에 내보내려고 아이를 낳은 건 아니다!” 라는 말을 남긴 콜비츠는 그 자신이 당시 열여덟이던 둘째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였으며, 이 피에타상은 따라서 콜비츠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강한 호소력과 무게감은 이러한 그녀 자신의 슬픔과 상처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쾰른의 콜비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녀가 만든 반전 판화에는 “전쟁은 결코 다시는!(Nie wieder Krieg!)”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데, 그 스스로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로서 전쟁의 폭력과 광기를 비판하고 반전을 호소하는 그녀의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해 그 호소력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이 발사한, 시신의 뼈까지 태워버리는 악마의 무기 백린탄을 실은 미사일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난민촌 아이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우크라이나 반군이 군항기로 오인해 저격한 민간 비행기에 탄 2백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들이 전원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이 순간에도 케테 콜비츠가 조각한 피에타 상의 어머니는 아들의 주검을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6백만 명의 유태인과 소수자들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라는 참담한 비극이 탄생한 곳은 베를린 남동쪽에 위치한 커다란 호수 반제(Wannsee) 인근의 별장이다. 1942년 1월 20일, 나치 친위대(SS)의 제국보안국 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나치 당, 친위대, 경찰의 고위 간부들을 이곳으로 소환한다. “유태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을 논의하는, 이른바 “반제 회의(Wannsee Konferenz)”의 시작이었다. 이 별장은 지금은 유태인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나치의 거물급 고위직 간부들이 아우슈비츠, 다카우 등 죽음의 수용소에서 행해진 가스실 대량학살이라는 끔찍한 “최종해결책”이 논의된 곳이라서 그런지, 이곳의 정문을 들어서면 음산하고 오싹한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 내부에서는 나치 시기 선전부 장관 괴벨스(Goebbels) 등에 의해 이뤄진 유태인 혐오 연설을 소개한 당시의 신문 기사, 유럽 전역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의 현황 등이 전시되어 있고 관람 코스의 맨 끝에는 이곳에서 유태인 대학살을 결정한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의 최고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를 비롯한 나치 전범의 후손들이 자신의 할아버지, 선조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들이 글과 영상의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반제 회의에서 회의록을 작성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점령지역 유태인들뿐 아니라 동맹국, 중립국, 적국 등지의 유태인을 모두 합쳐 총 1천 1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제거할 계획을 수립했다. 하인리히 히믈러를 비롯한 대부분의 회의 참석자들은 전쟁 이후 열린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전범재판을 받지만, 회의록 작성자이자 유태인 수송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도주하여 아르헨티나에서 생활하다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들의 집요한 추적 끝에 체포되어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이 재판을 기록한 한나 아렌트는 오로지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고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하고, 전체주의적 지배란 이처럼 무반성적이고 모든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적 판단 능력을 상실한 주체들이 등장하는 “익명의 지배”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우리가 익명의 지배라는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이 강요하는 악의 평범성에서 벗어나 반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분명한 평가와 관점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한 사회의 노력은 끔찍한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반제 저택의 유태인 기념관에서 본, 하인리히 히믈러의 손녀가 진술한 내용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학교에서 자신의 친할아버지를 나치 범죄자로 배울 때 친구들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을 기억하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손녀는, 그러나 자신은 나치 정권을 수립하고 유태인 대학살에 기여한 자신의 할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으며, 독일이 두 번 다시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행한 잘못들이 낱낱이 알려져야 하고 자신도 이 일에 동참할 것이라 말한다. 과연 한국에서 친일파 조상을 두고 그들의 권력과 재산을 물려받아 지금도 기득권 지배세력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이 사진은 내가 사는 동네의 이웃집 대문 앞에서 찍은 것이다. 독일의 가정집이나 공공건물 앞에서는 이러한 작은 장식들이 바닥에 새겨져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 건물에 살다가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기념물이다. 사진에 나온 집의 경우엔 1891년생인 아르투어 단넨바움이 1920년생인 딸 일제, 1925년생인 게르다와 함께 살다가 셋 모두 테레지엔슈타트에 있는 수용소로 끌려가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나치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독일의 자세는 오늘날 과거사를 정당화하고, 이를 군국주의적 헌법 재해석과 재무장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일본의 아베 정권과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만이 아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국무총리 후보가 되고, 일본 식민지배를 미화한 극우 성향의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옹호한 사람이 교육부 장관 후보가 되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사회 전체의 노력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의 쟁점이 된다. 지나간 일 무엇 하나도 이 땅에서는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 현재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미화하거나 망각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맞서 ‘잊혀져선 안 될 것 들’을 ‘잊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그러나 역사를 망각하는 한, 비극적인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기억하기 위해 싸우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과거를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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