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악수와 소통의 문제[이종철의 세상보기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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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악수와 소통의 문제 [이종철의 세상보기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1.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는데 거부하는 나라..어이가 없네. 사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보통 사람도 악수를 청했는데 거절 당하면 불쾌한데,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이쯤되면 막나가자는 것이 아닌가? 이걸 그냥 둬, 말어. 권위주의 시대도 아니기 때문에 잘 못 건드리면 또 벌떼 처럼 달려붙을 텐데…사실 이 부분만 따로 떼어 놓고 비난할 일도 아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 시절 그를 얼마나 희화화했는가? 현 권력의 핵심 실세는 아예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싸이코라고 부르기도 하고,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배우 분장을 하고 그런 싸이코적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아랫것들이라고 배우지 말란 법이 있는가? 모 눈에는 모만 보인다고, 서로 막말이나 막가는 태도로 상대를 깍아 내리다 보니 이제 막 돼먹은 집의 망나니같은 아이들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모 그런 것을 정색하듯 따지나…그래도 대한 민국의 미래를 해서 탈 권위주의 시대의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박 근혜 정부를 ‘불통정부’라 부르는 이가 많다. 국민과의 소통이 적고 권위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굳이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많은 리더들이 이런 비판에 대하면서 억울해 할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아랫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 노력했고, 또 그들보고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노력을 했어도 아래 사람들이 별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말 해, 얼마든지, 다 들어 줄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왠지 고압적이고 권위적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말 잘못하면 경을 칠 일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자리 깔아줬다고 함부로 입을 나블대다 가는 신세 조질 수도 있다. 그러니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느냐를 먼저 판단할 일이다. 종종 TV를 통해 청와대에서 고위 공직자들을 모아다 놓고 회의하는 장면을 보면 가관이다. 수첩 공주 흉내를 내느라고 다들 열심히 펜을 들고 받아쓰기 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회의 참석 전에 관련 문건들을 검토도 하고 오지 않는지 궁금하다. 웬만한 기업이면 다들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모든 문건들을 등급별로 공유하고 있다. 청와대의 내부 시스템은 다른 어떤 기업들보다 최상급일 텐데 그들은 여전히 종이와 연필을 들고 대통령의 목소리를 받아쓰는 데 정신이 없다. 이쯤 되면 대통령의 목소리는 가신들의 영혼에 각인되는 아버지 남성의 목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2012년 대선 시 연세대 심리학과의 황상민 교수가 박근혜 후보보고 “생식기만 여성”이라는 말을 했다가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고위 공직자들도 제 말을 못하는 분위기에서 국민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말로는 연일 소통하자고 하지만 그야말로 꽉 막혀 있다. 불통이 되다 보면 오해도 심해지고 갈등도 많아진다.

?그림을 한 번 보자. 유명한 Matisse의 그림이다. 그림 속의 남자는 고압적으로 서서 여자를 내려다 보고 있다. 반면 여자는 의자에 앉아서 남자를 올려다 보고 있다. 이런 눈높이의 차이는 권력 관계를 반영하기도 한다. 시선으로 제압할 때는 대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때이다. 그래서 팽팽한 기 싸움 할 때 상대방 보고 눈 내리까라고 겁준다. 게다가 남자의 손은 주머니 속에 꽂혀 있다. 여자에게 다가 가려는 태도가 아니다.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데서 그만큼 여자의 감정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보인다. 그렇길래 여자는 의자에 갇혀서 남자의 처분만 기다리는 것 같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그림의 제목은 대화(Conversation)이다. 대화라면 당연히 서로의 눈높이도 맞추고, 거리도 줄이고, 주머니에서 손도 빼 상대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이 그림은 역설적으로 ‘대화의 부재’를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여자는 그런 고압적인 분위기에서 남자의 일방통행 식의 하명을 거부할 도리가 없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침묵하는 것뿐이다. 이런 여자의 마음은 분위기로, 즉 그들 간의 마음이 교류되는 창의 창살로 표현된다. 창살에는 non이 표시되어 있다. 당신이 아무리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도 내 마음은 ‘아니예요’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역설적인 그림을 통해 대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대화는 소통이다.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아니 그 전에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오랫동안 불통인 상황에서 갑자기 고압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무조건 말하자고, 네 말을 다 들어주겠다고 말만 하지 말고 말을 할 수 있는 눈높이, 거리, 자세를 먼저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이 그림이 주제에 충실하려면 남자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여자의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그런 제스처를 취하기 힘들면 적어도 다른 의자를 가져와 무릎을 맞대고 서로의 눈을 맞추면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종종 강한 자가,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그렇게 하면 밑에서 올려다 보는 사람은 더 감동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릇 소통은 되먹임이고 순환이다. 순환이란 높은 것이 낮아지고 낮은 것이 올라가는 것, 혹은 외부가 내부로, 내부가 외부로의 전환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정체는 이런 입출력의 균형이 깨어질 때 나타난다. 맛있는 것을 죽도록 많이 먹어도 변비로 배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을 맛이리라. 로마의 귀족들은 아래로 배설이 안되니까 어거지로 구토를 유도하기도 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성찬을 즐기면서 바로 옆에다가 그것을 토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하지만 입출력의 자연스러운 균형이 파괴되면 신체의 건강도 깨진다. 현대인의 비만은 대개는 좋은 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서 너무 적게 배설하는 데서 나온다. 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늙은 생명의 죽음도 그렇게 이해한다. 이런 입출력의 균형이 깨어지면 사회 생태계도 깨질 수밖에 없다. 오래 사는 것이 능사일 수는 없다고 본다. 좋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좋은 삶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이다. 그것이 반드시 오래 사는 것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2. 동양의 오랜 철학서인 <주역>에도 이런 소통에 관한 괘가 있다. <주역>은 점서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중국인들의 오랜 경험이 녹아진 자연관, 우주관을 특별히 괘(卦)라는 일종의 이미지(象)를 통해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이미지는 마구잡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극에서 음과 양이 나오고, 이 음양으로부터 4상이 나오고 하는 식의 ‘이치 논리’의 일정한 규칙을 띠고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총 64가지의 괘가 만들어지고, 이 괘를 통해 인간사와 우주 자연사를 설명한다. 이 중에 ‘천지비'(天地否)(왼쪽 그림)와 ‘지천태'(地天泰)(오른 쪽 그림)라고 하는 두 가지 괘가 있다. 이 두 괘는 모두 하늘과 땅이 중첩된 형상을 하고 있다. 천은 하늘이고, 남자이고, 왕이고 하는 것이다. 반면 곤은 땅(地)이고, 여자이고, 백성이고 한다. 만일 우리가 자연의 질서를 고려한다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남자가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식이다. 왕은 위에서 다스리고? 백성은 아래서 다스림을 받는다. 그래서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괘가 천지비이다. 그런데 이 괘를 설명한 것을 보면 象曰 天地不交이다. 천지가 불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괘를 얻으면 아주 좋지 않다. 불통이라 함으로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폐색되어 있다는 의미다. 장 폐색 때문에 장이 썩는 질병을 생각하면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입출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이 오히려 불통해서 폐색한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반면 이 괘를 뒤집어 놓은 것이 지천태이다. 이것은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습이다. 오히려 이것은 자연의 질서, 사물의 질서, 사회의 질서 등이 전도된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이 괘의 설명을 보면 이렇다. 象曰 天地交泰 상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태평하다. 전도된 형태가 오히려 화합과 교류가 잘 이루어져 태평하고 번성한다는 의미다. 이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천지의 관계, 임금과 백성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오히려 정상적 형태의 관계 보다는 전도되고 역전된 관계에 있을 때 더 소통이 잘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 원리는 아주 단순하다. 양기는 위로 올라가고 음기는 아래로 가라 앉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을 상징하는 하늘이 아래에 있고, 음을 상징하는 땅이 위에 있다면, 양기는 위로 올라가고 음기는 아래로 내려와서 서로 소통할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을 위시한 우주 만물의 모든 건강은 이런 자연스런 소통에 기초해 있다.

 

머리를 차게 하고 발을 따뜻하게 하라는 것도 이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동양의 모든 양생 수련법은 수승화강(水升火降)이 기초다. 즉 물의 기운인 음기는 위로 끌어 올리고, 불의 기운인 양기는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이런 소통이 잘 이루어질 때 신체의 건강이 유지될 수 있다. 책을 많이 보거나 머리를 많이 쓰면 머리에 열이 많이 난다. 열이 나면 골도 아프고 잠도 잘 오지 않는다. 수행을 잘 못 하다 보면 이렇게 양기가 위로 뻗쳐 며칠씩 잠을 못 자서 나중에 머리가 도는 경우가 있다. 주화입마(走火入魔)나 상기증(上氣)이 그것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렇게 미친 사람들을 몇 번 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런건지 옛날 선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책을 한 권 마칠 때마다 반드시 책 걸이 행사를 한다. 이 책 걸이는 음주가무로 노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부 때문에 위로 뻗친 기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라 해도 좋다. 특히 이런 기가 머리로 뻗쳐서 통제가 안 될 때는 육체 노동을 강도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대 문호 톨스토이는 통제할 수 없는 이런 양기(성욕)를 풀기 위해 생활공동체를 운영하면서 강도 높은 노동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종종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은 육체노동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독서나 음악 감상 등 정신노동으로 푸는 것이 이상적이다. 정신과 육체의 통일의 원리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런데 양과 음은 사물의 고정불변하는 속성이 아니다. 양과 음은 관계 속에서 주어지며, 이러한 속성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과 소멸을 반복한다. 우리 태극기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음이 커지면 양으로 변하고, 양이 커지면 음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 논리 속에서 음과 양의 지위가 결정되는 것이다. 남자는 존엄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남존여비의 사상도 남과 여를 불변적 속성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오류이다. 동양의 전형적인 새옹지마의 논리가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지천태의 좋은 괘도 방심하면 나빠질 수 있고, 천지비의 나쁜 괘도 대비를 하고 개혁을 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나쁜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좋은 것도 없다. 정치에서 여-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여이지 불변하는 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선거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언제든지 야가 될 수 있으며, 야 또한 불변하는 야가 아니다. 국민의 지지 여하에 따라 여야의 관계가 결정된다. 그런데 종종 정치인들은 이런 권력의 속성을 절대 불변하는 것으로 착각해서 자신의 지위가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권력을 장악하면 일방 통행 식으로 행사하려 하고, 그 권력을 상실하면 한없이 조롱하고 희화화한다. 이런 형태로는 권력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만이 있을 뿐이다. 정작 국민의 지지로 탄생한 그 권력이 진정 국민을 위하는 생산적 권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 부를 가진 자가 국민과 법 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먼저 하심하고, 낮은 데로 임하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여야간의 소통, 국민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는 정치인들도 국민이라는 바탕 위에서 서로 상대방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 소통과 대화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니까 직립 감읍해서 두 손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은 권위주의 시대의 관념이다. 그런 일방 통행 식의 권위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상당 부분 의미가 퇘색했을 뿐더러 희화화되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정치인들의 일방통행 식의 악수를 거절했다고 어이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요즘 세대에게는 더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다. 50대가 보수 꼴통이 되는 것은 이런 변화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몸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남북 정상 회담할 때 김장수 국방장관이 김정일과 악수를 할 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고 꼿꼿장수로 칭송을 받은 적이 있다. 북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그것도 어이상실이고 패륜이다. 제왕 같은 지도자 동지 앞에서 감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악수를 하다니. 하지만 우리 국민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탈 권위주의 시대에 중요한 선거관리 직무를 보는 사람들이 갑자기 직립 도열해서 악수를 해야 한다고 하는 모습이 더 이상할 수 있다. 물론 악수를 거절하는 모습을 무조건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맺힌 마음에 악수를 거절했다면 그것을 비난하기 보다는 먼저 그 아픈 마음을 쓰다듬으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그런 장면을 포착해서 이상한 시각으로 전달하는 언론이 더 문제이고, 별 생각 없이 그런 비난에 동조하는 태도도 문제인 것 같다. 그것은 언론의 공정성을 상실한 채, 선거의 효과를 노린 일종의 악마의 앵글이고 편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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