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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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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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있거나 잘나고 싶은 마음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결여를 보고 내심 좋아한다. ‘그래, 저 사람은 저런 결여가 있어. 나보다 못하지.’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서 타인의 단점과 결여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도 유능해진다. 그래서 또 남들과의 관계가 엉켜버리지만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타자의 결여 한 가지를 보고서는 안심을 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자기보다 잘났다는 증명을 만나면(즉 어느 한 부분에서 자기보다 성취를 이룰 때) 굉장히 당혹해한다. ‘저 사람에게 저런 면이 있었는데 내가 몰랐구나! 내가 정신없이 사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앞서가는구나.’ 하는 느낌에 괴로워한다. 여하간 이런 사람들의 경우 십중팔구는 과거에 어떤 결정적인(그 사람으로서는 결정적인) 실패를 맛본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어릴 때 신동 소리 좀 들었고 집안에서는 당연히 대학은 서울대쯤은 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했다든가 하는 사람들말이다. ?’나는 ΟΟ한 면은 좀 잘 하는 편이고, ΔΔ한 면은 좀 못하는 편이야. 그렇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사랑 받을만해’라는 확신이 없으면 참 인생이 괴로워진다. 타인의 시선에 그렇게 좌우되려니 얼마나 인생이 피곤해질 것인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피곤하게 사는지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게 피곤하다는 걸 알아야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데, 이를 감지하지 못하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다. 오히려 “아무래도 정신분석을 좀 받아봐야 할까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정신분석은 무슨 개뿔, 그건 밥 먹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복에 겨워서 하는 짓이지.” 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사실은 정신적 문제가 심각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신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정신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문제가 많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이 옆 사람을 정신병원에 보내놓고는 자신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병원까지 찾게 만든 원인임을 전혀 모르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의사들은 정말 치료 받아야 할 사람은 병원에 오지 않고 그 옆 사람이 환자로 온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의 정신 문제를 자각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조절할 수 있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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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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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자기가 자기를 알기 어렵다. 인간은 거울이라는 매개가 있어야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매일 남을 쳐다보고는 ‘저 인간은 이래서 문제이네 저래서 문제이네.’ 말하면서도 자신의 문제를 보지는 못한다. 그 눈으로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보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자기 자신을 성찰해내고 반성해내기 바쁜 사람은 타인에 대해 말할 여유가 없다. 자기반성 하느라고 바빠서 남들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남의 잘못이 눈에 잘 뜨인다면 그것 자체가 내가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그리도 나는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하는가?’를 말이다. 내가 A보다 못났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이 없는 사람은 A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그리 골몰하지 않는다. A의 잘못을 누가 말해도 그리 관심두지 않는다. A에 대한 험담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 나는 A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봐 두려워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기 잘못을 보면 볼수록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지게 된다. ‘나도 그런 잘못을 하는데 뭐’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열중한다. 자기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잘못에 대해 마음 놓고 욕한다.
사실 이렇게 욕하게 되는 데는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심리가 관련되어 있다. 그런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타인의 잘못을 보면서 확인하게 되는 우월감이라는 쾌감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남들이 열띠게 험담을 해도 그 험담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게 된다. 남의 잘못을 말하게 되는 것은 ‘잘못을 하는 그 사람’보다 내가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확인에의 욕구가 없는 사람은 타인의 잘못에 집중하지 않는다. 남의 잘못을 말하고 생각해봐야 나에게 남는 것이 없으므로 그 ‘남의 잘못’에 관심가지지 않는다. 그 ‘남의 잘못’에서 내가 배워야 할 것만 배워내자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는 사람일수록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남의 잘못을 말하면서 쾌감을 얻는 데 집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대신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쪽으로 생각을 가져가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되면 예전에 자신이 얼마나 예리한 비판력으로 남의 잘못을 들추어냈는지, 그 때 자신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관대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에 남의 잘못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게 된다.
당신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에 지나치게 유능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더 유능하다. 인간 인식의 특성으로 인해 남에게는 예리한 칼날을 들이대도 자신에게는 아주 뭉툭한 칼날만 들이대거나 아예 칼날을 들이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한 번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을 옆에 두고 싶은가? 우리 모두는 나의 단점은 덮어주고 나의 장점을 칭찬해주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싶어 한다. 어느 누구도 나의 단점을 들추어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은 자꾸만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고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알아주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빠져 살게 된다. 그 예리한 비판력으로 자신의 잘못을 본다면 인간관계가 좋아질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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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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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얼마쯤은 부당하고 얼마쯤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부당함은 잘 보면서도 자신의 부당함은 잘 보지 못한다. 그래서 역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측면을 돌아볼 줄 아는 반성능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수용할 수 있고 그래서 대체로 관대한 태도를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폭탄은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은 아주 잘 찾아내고 혐오하면서도,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균형은 언제든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철학적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철학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객관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식의 자연적인 경향성은 자신이 잘한 일과 타인이 못한 일을 보는 데 유능한데, 철학에서는 자신이 잘한 일과 못한 일, 타인이 잘한 일과 못한 일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하니 철학적 성찰을 하려면 머리가 아파진다. 그렇지만 철학적 성찰로 논리적으로 따지다보면 인간 인식의 자연적 경향성, 즉 심리가 더 잘 드러난다.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부당한 측면, 이상한 측면이 없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이상한 측면이 있고 그 사람에게도 이상한 측면이 있을 뿐인데, 왜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그리도 골몰하는가? 물론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이 나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이상한 측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그 사람은 자신의 이상한 측면이 나에게 어떤 불편을 끼치는지를 아는가? 대부분 모른다. 그러니까 계속 그 행동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바꿔서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특별한 싸이코가 아니라면 그에게도 자기 반성력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스스로 반성하면서도 그 행동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신은 그 사람이 스스로를 얼마나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합리적인 사람인가? “나만큼만 합리적이라고 해!”, “그래도 나는 합리적인 편이기야 하지.” 등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합리적이라고 느끼는 나 자신 역시 어떤 이상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나의 그 이상한 측면이 옆 사람을 나도 모르게 힘들게 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충분한 자기 반성력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 모두는 얼마쯤 이상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그의 이상한 부분이, 그에게는 나의 이상한 부분이 문제될 뿐이다. 나에게 그의 이상한 부분만 보이고 나의 이상한 부분이 파악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만 이상한 부분이 있고 나에게는 이상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혹시 옆 사람이 아무리 봐도 싸이코라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싸이코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싸이코라고 몰아붙이는 인식의 편향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또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실제로 이상하다고 치자.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대해 쑥덕거리면 그 사람이 그 이상한 측면을 고치는가? 나와 동료의 쑥덕거림은 그 사람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를 잘 따져 생각해보면 ‘나 자신의 이상한 측면을 조절해내기도 바쁜데, 뭣하러 굳이 남의 부당한 측면에 그렇게도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험담에 골몰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은 부당해. 내가 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야!’라고 하고 싶은 무의식 때문이다. 이러한 무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역으로 내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거나 열등하다는 것이 확인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당신이 불편해하는 그 사람도 대체로 꽤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 부분에서만큼은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나’이지만 나 자신에 대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대상화해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거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남의 얼굴만 쳐다볼 수 있는 우리는 남의 문제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 유능하지만,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는 특성 그대로 자신의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보아내지는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 인식을?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을 둘 때 훈수 두는 사람이?3배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일 때는 객관적 인식에 비해 1/3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 사람인지,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를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마음에 끄달려가면서 마음에 따라 반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잘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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