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미래가 없는 도시문명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대로, 그야말로 ‘되는’ 대로, ‘될 대로 되라’고 살아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떨쳐 일어서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냐입니다.
도시에서 봉기해서 혁명이 성공한 예는 역사상 한 번도 없습니다. 의회주의에 기대서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아옌데 정권을 들 수 있는데 결국엔 미국이 뒷받침한 군부 쿠테타에 의해서 무너졌죠? 지금까지 인류 혁명의 거점은 늘 농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산과 혁명의 거점이던 농촌이 다 무너져버리고 있습니다.
제가 변산에서 십여 년 이상 농사를 짓다 보니까, 이상하게 나무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물고기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들에 나가서 볍씨들이 수군거리는 말도 알아듣게 됩니다. 제가 사는 변산은 소나무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변산 기후도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면서 소나무가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참나무가 자라는데, 가을이 오면 많은 도토리 알을 떨굽니다. 한 해에도 수천 알의 도토리를 땅으로 떨구는데, 제가 참나무에게 물어봤습니다. ‘우리 나라 산지가 70%인데 거기에 모두 네 씨만 뿌리내리게 하려고 그래?’ 그랬더니 아니랍니다. ‘그러면 해마다 뭐하러 그렇게 많이 떨어뜨려?’ 물었더니 자기가 죽을 때쯤 떨어뜨린 씨앗 가운데 한두 그루 건강하게 자라서 자기를 대신해 종이 유지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해요.
볍씨도 마찬가지죠, 한번 심을 때 두 알 세 알 심으면 스무 포기로 늘어나는데 한 포기당 백 알 넘게 달리고 해서 풍년에는 볍씨 하나가 때로는 천 단위로, 때로는 만 단위로 열매를 맺죠. 그래서 볍씨한테 ‘야 들판 전부를 니 종자로 덮으려 그래?’ 물으니 아니라 그래요. 쥐도 먹고, 새도 먹고, 당신도 먹고 씨앗으로 남긴 것으로 우리 종 유지하면 그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다에 사는 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수억 개의 알을 낳아서 태평양, 대서양까지 온 바다를 전부 니 새끼로 덮을 생각이냐?’ 했더니 아니라 그러죠. ‘그중에 한두 마리만 남아서 자기 종을 유지시켜 주면 그만이다’ 해요. ‘그럼 나머지는 뭐하려고 그렇게 많은 알이 필요하니?’ 물으면 자기 몸을 던져 다른 생명체를 살리고, 자기 새끼들이 그 생명체에 기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알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삼시 세끼 먹는 반찬들이 전부 다른 생명체가 밥상에 올리는 ‘생체보시’입니다.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생산력이라는 건 없어요. 그것은 ‘신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시대의 신화죠. 씨 하나 뿌리면 수천수만 알을 얻을 수 있는 유기물의 세계에서도 무한이라는 건 없어요. 도시에서는 5%의 생산력만 늘어나도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 이런 소리를 하는데 유기물은 무한축적이 안 돼요. 곡식의 씨앗을 이년만 묵혀버리면 발아율이 현저히 떨어져버려서 곡식 구실을 거의 못 합니다. 유기물이라 오래 두면 썩어버리니까 싫든 좋든 나눠야 해요.
그런데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과 ‘생산물의 무한한 축적’에는 썩는다는 개념이 없어요. ‘무한축적’이 가능한 것도 무기물밖에 없는데 그것은 전부 ‘부동산’, ‘동산’으로, 화폐나 유가증권 같은 것으로 되면서 종이쪽지 하나에 수억, 수십억의 자산도 축적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어요.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자손만대를 물려줄 ‘사유재산’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아요. 폭력적인 국가기구가 이 사유재산을 보호해 주죠.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 도시 사람들은 답변할 길이 없어요. 도시공간에서는 사람들만 모여 사니까 ‘착취하고 살거나 착취당하면서 살지 뭐~’, ‘주인이나 노예로 살지 뭐~’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어요. 전체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서로 도와 그물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갈 길이 없어서 도시사람들은 덫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리고 환상 속의 세계를 실제 세계라고 자기최면을 겁니다. 정신적인 유목민들이 우글거리면서 ‘가상의 초원’, ‘의식의 평원’을 질주하고 있어요. 실재하는 평원이 아니라 등질화된 의식 공간을 질주하면서 나는 지금 말을 타고 달리고 있다고 상상을 해요. 어쨌든 밥상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올라오는 것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이다, 살아있는 몸을 나에게 제공하는 거니까 이것을 먹고 뭘 ‘해야 할지’ 성찰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하면 된다’는 능동성은 사라지고, ‘되면 한다’는 수동적인 반응만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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