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한욕심이 결국 인간을 공격한다[썩은 뿌리 자르기]
구제역, 위기의 대한민국
작년 11월 안동에서 시작된 구제역이라는 가축전염병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여전히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문제는 구제역 자체보다 가축을 생매장한 이후의 일이 더욱 심각하다. 열악하고 지저분한 축사에서 나와 찰나의 상쾌함을 느꼈을 돼지들이 황당하게 죽어나간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작업에 동원된 공무원과 수의사들이 가축들의 비명소리에 환청과 불면으로 정신과치료를 받아야 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것은 비단 축산업계의 상업적 손실과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매몰로 농림수산식품부가 배포한 구제역 긴급행동지침이 지켜질리 만무하다. 같은 장소에 너무 많은 양의 가축들을 산채로 매장하였고 생매장당하는 가축들의 발버둥으로 오염방지용 비닐이 파손되면서 매몰지에는 가축들의 핏물이 땅위로 솟아오르거나 지하수에 섞여 나왔다. 이 뿐만 아니라 매몰가축을 들짐승들이 뜯어먹어 제2차전파의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도 있다. 환경학자들은 이러한 환경오염이 앞으로 20년 정도 지속될 것으로 내다본다.
중요한 것은 벌써 100여만 마리가 살처분 당한 지금의 상황이 천재(天災)라기 보다는 인재(人災)라는 점이다. 인간의 과도한 이욕(利慾)이 낳은 참사다. 가축(家畜, livestock)이라는 의미 자체가 인간 삶의 복지를 위해 야생동물의 생태를 개량하여 인간의 영역 안에 붙잡아둔 것이다. 따라서 가축의 생명활동에 지장이 있다면 사육자인 인간이 1차적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책임처리에 있어 많은 잘못이 발생했다. 불가피하게 가축을 도살해야 할 경우 안락사 시키는 것이 원칙이지만 살처분 약품의 부족으로 집단 생매장했다. 유럽연합 등에선 동물을 도축한 뒤 소각하는 게 원칙이고 일본도 마취제를 놓은 뒤 독극물을 주사해 살처분 하고 있다.
또 그 이전에 대한민국이 ‘구제역 청정국’임을 입증하여 육류의 수출?입 거래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알량한 욕심’으로 구제역 백신 접종을 소홀히 한 문제가 크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육류소비가 증가하면서 육류를 공급할 축산농장이 대규모로 공장화되었지만 그 설비는 양적 규모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사육시설이 가축 전염병에 취약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구제역이 본격적인 가축 전염병으로 자리 잡은 것은 2000년 이후 축산시설이 대형화된 시점과 일치한다. 농림수산식품부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2000년 이후 구제역을 비롯한 각종 가축 전염병으로 살처분한 소?돼지?닭 등은 1,980만6,972마리에 육박한다.
자연과 인간을 쪼개버리니 더 커져버린 이욕과 만물일체의 자연관
2008년 MB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이후 드러난 미국의 축산업 현실은 대규모로 기업화된 축산농장이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지 여실히 드러내었다. 미국 네브라스카주 한 농장은 8만5천 마리의 소를 한꺼번에 사육하고 있는데 축사의 위생문제는 물론이고 동물성 사료의 비율도 높아 소들이 광우병이나 구제역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 이것은 동물학대에 가깝다. 지금 인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고기를 소비하고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가축의 대량생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방목으로는 이것을 충족하지 못하므로 가축들은 대규모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된다. 게다가 연한고기를 얻기 위해 우리를 더욱 협소하게 하여 엄청난 고밀도 축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경우 인간의 이익이 동물의 이익보다 더 크다면 인간을 위한 동물의 희생이 정당화되지만 인간의 아주 작은 사소한 이익을 위해 동물들이 희생된다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육식은 과거 인류가 생존을 위해 야생동물을 사냥하던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고 단순히 기호의 한 단면일 뿐이다. 맛을 위한 행위는 생존을 위한 행위보다 더 클 수 없다. 물론 싱어의 이런 주장이 모든 육식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극지에 살고 있는 주민이나 아프리카나 남미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영양공급원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 공동체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으로 적극적인 육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국가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 인류의 엄청난 육류소비는 극?오지의 상황과는 달라서 인간의 미각적 즐거움을 위한 사치에 가깝다. 사치행위를 위해 대규모 공장식 사육시설이 창궐하고 있는 것이다. 사치행위는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욕심을 불러오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 구도로 나누는데서 출발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미국이 서부 개척시대 때 서부라고 하는 자연대상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현재의 전지구적 생태위기는 근대과학의 태동 이후 산업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자연을 생명이 없는 인간역량의 실현 대상으로 파악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인간중심의 도구적 자연관은 자연을 인간의 욕망충족과 복지확충의 도구로 판단한다.
이와 관련하여 비토리오 회슬레(V. Hoesle)는 「생태계 위기의 정신사적인 기반」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자연’과 ‘인간’이라는 단어사이의 접속어 ‘과’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예를 들면 ‘식물과 동물’의 ‘과’는 양자를 서로 대립시키는 기능을 하지만 ‘심장과 신체’의 ‘과’는 인간 내부의 장기와 그것을 포괄하는 인간 신체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두 예시의 유형이 바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유형이라고 말한다. 인간중심관점에서 자연계와 인간을 대립적으로 나누어보는 입장이 있다면,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형태로 보는 입장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데카르트의 자연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자연과학에 근거하고 후자는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에 근거한다.
이런 비유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논리를 중국 명대의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이 제출한 적이 있다. 『전습록(傳習錄)』에서 어떤 사람이 왕양명에게 묻기를 “회암 선생(주희:朱憙)이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마음(心)과 이치(理)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어떻습니까?”(晦庵先生曰 人之所以爲學者, 心與理而已. 此語如何)라고 하자, 양명은 주희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마음이 곧 본성(性)이며, 본성이 곧 이치이다. ‘마음과 이치’의 중간에 ‘과(與)’라는 한 글자는 마음, 이치를 두 가지로 삼음을 아마도 면할 수 없을 것이다.”(心卽性, 性卽理, 下一與字, 恐未免爲二)라고 했다. 왕양명의 견해는 주희의 이원화 관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는 사물에 정해진 이치가 있다고 하여 대상 사물 속의 이치를 구하려는 입장이다. 이는 결국 마음과 이치를 둘로 가르게 하고 인식 주체와 대상 객체를 분리한다. 그러나 왕양명은 인간에게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양지(良知)가 있어서 마음에 있는 양지를 사물에 이르게 하여 사물이 모두 그 이치를 얻는 방법을 취한다. 왕양명은 천지만물과 사람은 본래 한 몸이어서 해와 달, 별, 비, 바람, 산, 강을 비롯하여 금수(禽獸)와 초목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자연계가 총체적인 우주를 구성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자연관으로 자연과 인간이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생태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 위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북송의 철학자 주돈이(周敦?)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오직 인간은 그 빼어난 기운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惟人也得其秀而最靈)”고 했지만 이 명제를 해석하는 주희와 왕양명의 태도는 차이가 있다. 주희의 관점이 자연을 주관(主觀)한다면 왕양명의 경우 자연과 인간이 일체이고 그 속에서 가장 정묘한 것이 인간이므로 인간을 천지의 마음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은 총체적 자연계에서 주체(主體)적인 입장에 있고 자연계의 모든 사물을 보살피고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왕양명의 관점에서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가축에 대한 책임문제는 철저히 인간 자신에게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왕양명이 말한 자연적(저절로 그러한)인 양지가 굳어버렸고 인간과 자연사물의 감응통로인 양지를 상실하면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감통(感通) 자체가 사라진다.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중심적 합리주의가 인간 이외의 것에 있어야할 생생한 ‘생명성’을 함몰시켜 버린 것이다. 중국 당대 이감(李甘)의 글 「찬리설(竄利說)」중 한 구절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감응과 그 감응을 상쇄하는 인간의 이욕을 자세히 꼬집어 설명한다. 다음은 그 한 구절이다.
“지금 탐욕 부리는 사람은 본디 인자한 마음이 없지만, 항상 잔인한 마음이 있는 것은 이욕의 침해 때문이다. 땅강아지나 지렁이가 사슴보다 크다면 인정하겠는가? 그 대답을 인정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땅강아지나 지렁이를 보면 발을 피해 밟아서 살려줄 것이고 실수로 땅강아지나 지렁이를 밟아 죽인다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가슴 아파할 것이다 그런데 다시 사슴을 본다면 활을 잡고 쫓아서 사슴을 맞추면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기뻐하는 법이니 큰 것에 잔인하고 작은 것에 인자하게 함은 무엇 때문인가? 사슴은 입과 배에 이롭고 땅강아지나 지렁이는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모할 만한 이익이 있다면 비록 큰 사슴이라도 잔인하게 하고 도모할 만한 이익이 없다면 땅강아지나 지렁이라도 잔인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今是頑人, 曾無不忍之心, 然常獨有忍心者, 由害於利也. 且謂??大於?鹿, 則許之乎. 聲不許也. 然人顧而遭??則迂足而活之, 過而傷??則失聲而痛之, 顧而見?鹿 則援弓而逐之, 幸而中?鹿則失聲而喜之, 忍於大者, 不忍於小者, 何歟. ?鹿利於口腹也, ??不利也. 故居於利則雖?鹿忍也, 不居於利則??不忍也)
자연을 대상화하면 동물도 대상화된다. 가축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자연을 철저히 대상화시킨다 하더라도 인간이 이익에 대한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자연생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회피할 겨를도 없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구제역과 관련한 문제뿐 아니라 4대강 사업이라든지 골프장건설에 의한 산림파괴, 지구온난화 문제 등이 그렇다. 이런 문제에 가장 1차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은 국가정부에 있다. 구제역의 경우 지금 한국의 축산업계가 적절한 설비 없이 우후죽순으로 방대해진 원인은 국가이익을 극대화 하려한 정부정책에 있고 구제역의 예방과 발생한 이후의 안일한 대처도 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차적 책임소재의 문제를 떠나, 예를 들면 지금 논의하는 구제역과 같은 가축 질병의 원인을 대규모 공장화한 사육시설의 소유주에게 전적으로 떠넘기는 것도 옳은 시각은 아닌 것 같다. 소비자들도 공동의 책임이 있지 않을까. 개인이 대규모 사육이나 도축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점잖게 식당에서 고기만 구워먹었다고 해서 자신이 구제역이라는 결과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 역시 갈라지고 나누어져 양지를 상실한 사회시스템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맹자(孟子)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은 아마 이런 개개인에 쓰여야 할 말이 아닐까?
불인지심(不忍之心)
구제역 파동이 연일 TV화면에 보도되면서 안타깝게 죽어나간 동물들의 처참한 모습도 볼 수 있지만 유독 눈길을 끄는 장면은 농촌의 돼지농장 주인들이 가슴아파하며 돼지들을 목 놓아 부르는 모습이다. 아마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면 자신이 기르던 가축에 대한 농민의 애정이 어떠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농민들의 그 모습이 경제적 이익의 문제 때문인지 인간적 정감의 발동인지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모습이 적어도 『맹자』에서 전국시대 제선왕(齊宣王)이 흔종(?鐘:제사)에 사용될 소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양으로 바꾸어 쓰라고 했던 모습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소를 양으로 대체하라는 발상은 우습지만 그래도 맹자는 다른 제후국들의 왕에 비해 그런 제선왕의 마음을 두고 족히 왕 노릇 할 수 있다고 격려하지 않았던가. 그 농민들의 마음이야 말로 ‘불인지심(不忍之心)’의 발로에 가깝다. 하지만 구제역에 대응하고 처리하는 정부와 관계기관의 모습을 보면 사람으로서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 차마 하지 못할 일을 버젓이 하고 있다. 이제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야할 문제다.
진보성(대진대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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