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선포했던 북한, 사실은 세계평화를 원한다![철학자의 서재]
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하다>
이정은(연세대학교 외래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불안한 사회에 살면서도 별로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불안한 정세 때문에 외부 투자자의 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나라가 있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종군 기자를 급파하게 만드는 나라가 있다. 외부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난리법석인데, 정작 내부에서는 조용한 일상만 반복되는 이 나라, 그래서 급파된 종군 기자들이 본국으로 송출할 전쟁 기사를 쓰지 못하는 이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
급파된 종군 기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는 이해당사자인 이 나라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전쟁 불감증에 걸려있기라도 한 것인가? 무덤덤함을 일상적 태도로 만든 요인이 있을 테고, 그 요인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로 상상 가능하다.
전쟁 도발 운운하는 북한이 실제로 전쟁을 원한다기보다는, 전 세계인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관심과 신경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구하겠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이다. 도발 가능성이 높은 집단도 평화와 안정을 갈망한다는 것에 귀추를 주목해 보자.
무서운 전쟁 무기나 핵무기는-간혹 그런 자들이 있다고 해도-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상대국의 도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며, 만약의 사태를 위한 대비용이다. 전쟁 대비는 자국의 안정과 평화를 지켜낸다는 데 목적이 있지, 전쟁 도발에 있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을 야기하는 강한 몸짓은 평화를 실현하고 싶다는 우회적 몸짓이다.
우회적 몸짓은 오늘날의 한반도 상황을 고려하면, 북한이 그들을 한 국가(state)로 인정해달라는 것, 달리 말하면 침략국 지위를 벗어나서 독립 국가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며, 정당한 국가로서 소통하는 국제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렇듯 ‘한 국가’로 인정받는 것은 전쟁을 운운하게 할 만큼 중요하다. ‘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벼랑 끝 전술을 끊임없이 구사하는 점에 주목하면,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 형태와 그로 인해 펼쳐지는 국제 관계는 ‘국가’라는 단위와 국가 수준의 상호 소통을 필히 요구한다.
공동체 관계에서는 ‘국가’가 본질적임을 세계사적 흐름에서 분석하면서 자본 팽창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의 고유성과 근원성이 존재한다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다. 고진은 문학 비평을 통해 국가 논의를 점차로 구체화해 나간다. 특히 후기로 이어지는 <트랜스크리틱>(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이나 <세계 공화국으로>(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자본=네이션=국가’라는 도식을 만들고, 국제 관계에서 국가의 역할과 평화로운 국가 관계를 구현하는 방법, 즉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고진은 그러한 고민과 사상 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인터뷰 형식으로 출판된 <정치를 말하다>(가라타니 고진·고아라시 구하치로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보여준다.
한반도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일본도 대미 관계에서 국가의 자존심과 굴욕적 상황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민족적 자존심을 우리랑 비슷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진은 고민의 출발점을 1960년대 ‘일미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반대’ 운동을 벌였던 상황에서부터 설명한다. 그는 이 세대를 유럽의 68세대와 같은 세대라고 규정한다. 일본의 학생 파워가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신좌익 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발휘되었으며, 이 당시에 ‘국가’와 ‘네이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한미 관계도 국가 간 문제와 남북 민족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지속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면서 우리네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효순이·미선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 간 상호 인정의 틀에서 동등한 한미 관계 문제를 고민하게 됐지만, 아직도 미진한 면이 많다. 하지만 남북 문제에 뒤따르는 민족 문제는 한반도가 고진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전쟁 발발과 관련된 세계 평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평생의 문제의식을 형성하고 그 뒤의 행보를 이끌어간 사상적 변화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를 말하다>는 우리네 삶을 위해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고진은 “일본이 메이지 이래로 봉건 사회에 존재했던 자치적인 개별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체하여 전부 전체 사회로 흡수하고 급속한 근대화를 달성”(153쪽)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중간 계급이 지속적으로 소멸했고 ‘대의제는 귀족정’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진단한다. 몽테스키외의 주장에 비추어 보면, 중간 계급의 소멸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고진은 “중간 세력이 일본에서 거의 소멸한”(156쪽) 2000년을 돌아보면, 일본은 데모가 없는 나라가 되었고, 민주주의 실현에서 맹점을 지닌 나라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면서 바다 건너 한국에는 데모가 있다는 것에 부러움을 표한다.
고진은 중간 계급이 소멸하면 민주 정치가 점차 전제 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치는데, 이런 우려를 한국 사회에도 적용하거나 예단할 수 있을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진은 ‘대의제 이외의 정치 행위’를 찾는다. 그는 “대의제만으로는 민주주의일 수 없습니다. 실제 아메리카에서는 데모가 많습니다. 선거 운동 그 자체도 데모 같은 것입니다. 데모와 같은 행위가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입니다.”(160쪽)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팽창이 극에 달하고 있어서 국가가 자본으로, 정치가 경제로 환원되며, 국가와 정치가 자본과 경제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런 상황이기에 더욱 더, 고진은 자본과 구별되는 국가 및 네이션(민족)의 독자적 역할을 강조한다.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해 국가라는 단위의 독립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잘 생각해 보면, 자국의 안정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자국 중심의 이해관계를 펼치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세계 평화를 실현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세계적 차원의 평화라는 착상이 없이는 자국의 평화도 보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진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이면서 ‘국가를 넘어서는 대안’을 마련하는 데 통찰력을 주는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 심취한다. 칸트의 세계 시민 사회와 세계 국가를 ‘세계 공화국’이라는 용어로 발전시키면서 ‘트랜스크리틱’을 펼쳐 나간다.
그는 9.11 이후에 특별히 더 국가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동체 관계에서는 ‘국가’가 본질적임을 세계사적 흐름에서 분석하면서 국가의 본질과 기원을 추적하면 “국가는 처음부터 다른 국가에 대해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 간 경계가 해체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다른 국가와 무관하게 일국만의 국가 지양”(99쪽)은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아나키스트적 공산주의가 국가와 민족 문제에 걸리면 자꾸 넘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를 기반으로 ‘국가를 넘어서는 대안’을 탐구해야 하며, 그래서 고진은 칸트의 ‘세계시민사회와 세계국가’로 나아간다.
왜 칸트인가? 고진은 공산주의라고 해도 ‘어떤 이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이념을 강력하게 설정할 때 생기는 부작용도 있다. 마르크스에게도 공산주의 이념은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칸트가 말하는 ‘구성적 이념’은 아니었다. 공산주의 이념을 구성적 이념으로 오인했기 때문에 소련식 사회주의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서, 고진은 이를 돌파할 방법을 찾아 나간다.
칸트가 ‘구성적 이념과 규제적 이념’을 구별하는 것은 규제적 이념에 구성적 이념을 적용할 때 이성의 폭력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련식 사회주의는 ‘이성의 구성적 사용이자 이성의 폭력’이다. ‘마르크스가 부정한 것’은 ‘공산주의 이념’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구성적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성적 이념을 휘두르다 스스로 좌절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이념 일반에 대한 원망”(72쪽)을 터뜨리는데, 그 결과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러나 고진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칸트와 마르크스의 규제적 이념과 만나는 지점이 있고, 그것 때문에 칸트와 마르크스를 통한 ‘트랜스크리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고진은 자신의 복안을 이렇게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비판을 받아들인 후에 코뮤니즘이라는 형이상학을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칸트가 불가결했던 것입니다.”(74쪽)
물론 고진이 칸트를 결정적으로 도입한 것은 정치적 대안 때문만은 아니다.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서는 자본주의 팽창, 신자유주의 효과는 경제 문제와 정치 문제를 동시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불리는 사태는 1970년대 선진국에서 발생한 이윤율 저하, 만성 불황이라는 위기에서 시작”(126쪽)되었는데, 지금 상황은 선진국의 내구 소비재 보급이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새로운 자본주의 활로를 찾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고진이 보기에, 이런 활로를 개척하는 것은 “아메리카의 군사적 헤게모니에 대한 의존”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기보다는 신제국주의”(126쪽)라고 진단한다.
자본 팽창 속에서 신제국주의를 포착하는 고진이 ‘국가와 네이션’의 독자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고민과 맞물려서 고진이 지적하는 것이 걸프 전쟁(1991년)이다. “소련의 붕괴, 냉전 구조의 붕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뼈저리게 느낀 것이 걸프 전쟁”(76쪽)이었고, 국가 간 대항 세력이 없으면, 일방적 국제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구 평화론은 혁명을 목도하면서 전쟁 위협을 뼈저리게 느낀 칸트가 결국 국제 관계는 평화 운동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평화 실현은 국가 관계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국가를 넘어서는 세계 공화국’이라는 국제적 대안이 있어야 현실력을 갖는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고진이 이렇듯 칸트를 대안으로 삼은 데는 정치 문제만이 아니라, 칸트 이면에는 윤리를 ‘주관적 문제’로만이 아니라 ‘경제적 문제'(75쪽)로도 생각한다는 자각 때문이다. 칸트는 도덕성의 근간으로 “타인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주장하는 데, 타인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이며, 타인을 목적으로 대우할 수 없는 구조가 ‘자본주의 경제 구조’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를 타개하고자 “상인 자본을 게재시키지 않는, 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협동조합)을 제창”(76쪽)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안이다. 그리고 칸트는 아무리 정의로운 사회라고 해도, 경제적 궁핍이 심각하면, 인간의 목적성과 존엄성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다고 본다. 경제적 궁핍을 해소하는 대안이 필요하며, 그것은 정치 행위를, 그래서 국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풍요로움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각 공동체를 ‘한 국가’라는 단위로 인정하고, 국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국제 관계와, 국제 관계의 연합된, 통일된 이념적 장치-물론 규제적 이념적 장치-로서 세계 공화국을 고찰해 보자.
그렇다면 전쟁과 분쟁을 원한다는 북한에게도 독립된 국가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를 실현하는 첫 단계가 될 수도 있다. 우회적 몸짓을 통해 평화를 보여주는 북한, 이런 우회적 몸짓을 읽어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우회적 몸짓을 애써 무시하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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