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일승천기 & 나치 식 경례, 학생들을 욕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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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옥·한상언의 <욕심쟁이 왕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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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01. 반성하다.

‘철학자의 서재‘에 원고를 싣기로 했다. 갚지 못한 원고 빚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철학 공부’를 업으로 삼겠다고 나섰다면 사회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일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쓴 소리’가 되든지 ‘단 소리’가 되든지 혹 ‘잔소리’가 되든지 간에 말이다. 나는 철학함의 진의(眞意)가 적어도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여튼 천장 끝까지 책이 빽빽하게 쌓여 있어. 뭐, 이깟 책을 도둑놈이 삶아 먹겠어? 아니면 이불처럼 덮고 자겠어? 도둑놈은 ‘책이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지. (13쪽)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먼지 쌓인 책장을 꼼꼼하게 뒤진다. 서평소개할 책을 고르는 엄중한 시간이기 때문에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마주한 자리다. 먼저 너무 가벼워 보이는 책들은 넘어간다. 어울리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철학자다움(?)’이 살포시 풍기는 그런 책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무겁지 않은 주제이면서 동시에 가볍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책이어야 한다. 학위논문 준비도 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티를 좀 내줄 수 있는 주제라면 완벽한 선택일 테지.

▲(김일옥 글, 한상언 그림, 별숲 펴냄). ⓒ별숲

물론 ‘철학자의 서재’에 별도의 투고 규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저런 요구사항은 전혀 없다. 다만 ‘철학자’라는 주체와 ‘서재’라는 공간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오묘한 시너지를 일으키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나도 철학자인가?’에 대한 성찰(?)을 먼저 해야 하고, ‘서재’라기엔 너무 초라한 책장 앞에서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책들을 뒤져야 한다. 과하지 않아서 좋은, 묵향(墨香)이 솔솔 나는 그런 책을 찾기 위해서.

글 좀 안다고 거들먹거리는 게 눈꼴이 시었지만 도둑놈은 꾹 참았어. (15쪽)

소름이 돋았다. 문득 학부 시절 후배의 절규가 떠올랐던 것이다. 뭔가 있어 보이고, 좀 멋져 보이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포장하면서 가식을 떨려고 분주히 움직이다가 문득 10년도 더 지난 그때,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내게로 왔다. 예리한 비수는 깊은 생채기를 내고야 만다. “철학자들의 심오한 시부렁거림에 기죽지 말지어다.” 반성해야지.

#02. 동화를 읽다.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책은 가장 최근에 몰입해서 읽었던 책으로 하자. 이왕이면 중간에 포기한 책 말고 끝까지 정독했던 책으로 하자. 그리고 읽어가면서 느꼈던 단상들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써나가자. 그래서 택한 책이 <욕심쟁이 왕도둑>(김일옥 글, 한상언 그림, 별숲 펴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데 흥미진진한 도둑놈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동화의 매력이란 생각보다 놀라웠다. 크게 세 가지 정도를 배울 수 있었는데, 먼저 내 어휘 능력의 형편없음을 깨닫게 되는 기회였다는 것. 대학에서 강의깨나 한다고 자부했는데 생소하고 헷갈리는 어휘들을 만난 것이 여러 차례다. 가장 놀랍고 창피했던 때는 ‘알나리깔나리’가 표준어라는 사실을 난생 처음 알게 된 순간이다.(웃음) 혹시 당신은 아직도 ‘얼레리꼴레리’가 표준어라고 생각하시는지?

책의 뒤표지에는 요약된 넉 줄의 이야기와 배경 삽화가 있었는데 동화의 내용을 너무나도 잘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이것은 마치 영화 광고에 ‘영화헤살꾼(스포일러, spoiler)’이 버젓이 등장해서 줄거리를 줄줄 읊어주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만약 실제로 그런 광고가 만들어진다면 아마도 많은 어른들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 영화는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에게는 이런 과도한 친절(?)이 책을 읽고 싶도록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동화는 줄거리 자체가 재밌어서 어른들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13년 전,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 아름다운전태일 펴냄) 이후 아주 오랜만에 단숨에 읽은 책이다. 피가 끓어오르는 ‘분노’도 아니고, 애달픈 사랑 이야기의 ‘슬픔’도 아니었다. 순전히 소소한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꼼꼼하게 정독을 해도 30분이면 다 읽는 분량이지만. 집 근처 도서관에서 아이보다 더 동화책에 열중했던 엄마들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문제는 나중에 터졌다. 읽기는 재밌게 읽었는데 막상 서평을 쓰려고 생각하니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제 버릇 개 못 주는 법이라고 했던가? 서평을 쓰겠다고 컴퓨터를 켜고 맨 처음 했던 짓(?)이 국립국어원에 접속해서 ‘도둑’의 사전적 의미를 찾는 것이라니. 사람은 쉽게 안 변하나보다.

‘욕심쟁이 왕도둑’이라는 제목도 마음에 걸렸다. 제목만 가지고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헤아리기 어려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의 지인들에게 제목을 보여주고 의미를 추측해보도록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재미나다. “그러니까 결국 왕이 도둑놈이라는 거 아니야? 때가 때이니만큼 그런 의미로 나온 책 아니겠어?”, “도둑놈 성씨가 왕씨(王氏) 아니야?”

#03. 도둑맞은 학생들

▲ 논란을 불러일으킨 합성사진.

얼마 전의 일이다. 모 대학 디자인학과 학생들이 만든 합성사진 한 장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배경으로 삼아 나치 식의 경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보는 어른들을 경악케 했다. 문제의 모 대학이 강원도에 있다는 기사를 보면서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3년째 출강을 하는 학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이번에도 비껴가지 않았다.

지난 3년간 수업을 통해 만났던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체로 수업에 충실했으며 밝고 명랑했다. 전체적인 학업 분위기도 좋아서 수업 내내 유쾌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엄청난 사건을 일으킬만한 심각한 철부지 집단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욱일승천기’가 무엇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군이 사용했던 깃발로 일본의 군국주의의 야욕을 형상화한 깃발이 아니던가? 위안부 문제처럼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수많은 악행들이 아직 해결되지도 않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전범의 상징을 도용할 수 있는가?

사건이 터진 바로 다음 주, 씩씩거리면서 학교로 향했다. 강사 휴게실에서 앉아서 어떻게 혼내줘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다른 강사의 이야기를 엿들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내가 너희들 때문에 창피해서 못살겠다. 아니 어떻게 욱일승천기로 디자인을 할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니? ……”라며 들어가는 강의마다 잔소리를 해댄다는 것이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학생들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문득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문제의 사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나치 식의 경례’와 ‘욱일승천기’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치 식의 경례 모습은 실제로 연출한 것이고, 배경은 컴퓨터 작업을 통해 삽입된 것이다. 만약 ‘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넣지 않고 단지 나치 식의 경례만을 사진에 담았다면 이렇게까지 큰 문제가 되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 우리와 나치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프랑스에서라면 어땠을까?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공격은 ‘나치 식의 경례’에 초점이 맞춰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었던 학생들의 잘못이라는 게 결국 ‘나치 식의 경례’와 ‘욱일승천기’의 무게감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함에 있는 셈이다. 바꿔 말해서 이 둘의 함의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먼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별다른 의식 없이 혼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접근은 달라져야 한다.

2005학년도 수학능력시험부터 국사 과목은 선택과목으로 전락했다. 필수 과목이 아닌 이상 학생들이 공부할 이유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생님이나 부모님도 시험에 나오지 않는 과목을 배우라고 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당시에 이들은 모두 초등학생들이었다. 일제강점기도 모르면서 ‘뽀로로‘만 좋아한다고 역정을 내시는 훌륭한 부모님을 만났다면 달라졌겠지만 대부분의 초등학생 중에 ‘일제강점기’ 따위에 관심을 두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우리의 역사는 늘 선택과목이었다. 즉, 그들에게 근현대의 슬픈 역사는 머나먼 이야기로 치환된다.

교양으로라도 일제강점기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보통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부터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로 보는데, 이 시기를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현재 연세가 90이 넘으신 분들이다. 문제의 학생들과는 70년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 둘이 만나서 당시의 아픔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럼 텔레비전이나 영화, 책에서 배울 수는 없을까?

일본의 극우 세력이 과거의 만행을 합리화할 때, 우리는 입으로만 ‘역사 왜곡 하지마라’고 떠들어댄다. 정작 자기 나라 아이들에게도 필수로 내세우지 못하는 역사 따위를 다른 나라에서 뭐라고 가르치든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역사를 배울 기회조차 빼앗긴 아이들과 그것을 빼앗은 도둑놈. 배우지도 않은 내용으로 시험을 치르고도 틀렸다고 호된 비판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과 그런 비판을 하고 있는 도둑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면 나와 일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숨는다.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는데도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치욕이요,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부유하거나 귀한 것도 치욕이다.” <논어> 중 ‘태백’ (황희경 옮김, 시공사 펴냄)

동화책 한 권 읽고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해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욕심쟁이 왕도둑>도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동화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참 다행이지만 현실과는 너무 다른 결론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나뿐일까?

일제의 치하에 있을 때나 해방된 이후에나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불길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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